지난 10월 6일 오후 워싱턴의 연방대법원 근처에 가보니 수백 명의 시위대가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대부분 여성들이었다. 시위대는 “여성들을 믿어라”라고 외쳤다. 이날은 고교 시절 성폭행 시도 의혹을 받는 브렛 캐버노 연방대법관 후보자의 인준안이 상원 본회의에서 최종 통과된 날이었다.

치열한 싸움이었다. 청문회장에서 캐버노의 고교 시절 성폭행 시도를 고발한 크리스틴 포드 교수는 가끔 울먹이긴 했어도 담담했고, 눈물 콧물 쏟아가며 억울함을 주장한 캐버노는 격했다. 이들의 증언이 있던 날을 전후해 며칠 동안은 어디 가서 누구를 만나도 이 인준청문회가 화제였다. 특히 감정을 폭발시키며 분노한 캐버노는 ‘공부 잘한 트럼프’란 말을 들었다. ‘공부는 잘했을지 몰라도 기질은 트럼프’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트럼프의 대응은 평소 예측불허와는 좀 달랐다. 트럼프는 피해여성을 조롱하는 듯한 발언을 해 비난을 받기는 했지만 의혹을 주장한 여성의 증언을 들어본 후 결정하겠다고 했다. 양측의 증언이 모두 끝난 후 한 상원의원이 연방수사국(FBI) 조사를 제안했을 때도 트럼프는 일주일간의 조사를 허용했다.

캐버노가 인준되기까지의 과정에서 ‘미투(Me Too)운동’, 백인 엘리트 남성들의 요직 독점, 1991년 클레런스 토머스 연방대법관 청문회 때 있었던 애니타 힐 교수의 성희롱 고발, 여성들의 정치 진출 부진, 그 시절의 술 문화 등 온갖 이슈들이 불려나왔다. 모두 착잡하고 복잡한 마음으로 이 과정을 지켜봤다. 미국 사회 전체가 몸살을 앓는 것처럼 보였다. 낙마 가능성까지 거론됐던 캐버노는 결국 인준을 받았다. 공화당 51석, 민주당 49석인 상원의 표결 결과는 찬성 50표, 반대 48표였다. 결국 그 어떤 이슈보다 중요한 건 민주·공화 양당의 힘겨루기였다. 이탈표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양당 모두 한 발짝도 물러설 수 없었던 것이다.

미 연방대법원은 이제 보수 성향 법관 5명과 진보 성향 4명으로 확실한 보수 우위 시대를 열었다. 미국에서 연방대법관 한 명 뽑는 일은 행정부 장관 뽑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크고 깊은 논의를 필요로 한다. 연방대법관은 종신직이다. 몇 년 하다가 물러나는 장관과는 다르다. 대통령은 재선돼도 임기가 최장 8년이지만, 연방대법관은 20년을 할지 30년을 할지 알 수 없다. 그러니 훨씬 더 까다롭게 들여다본다.

1789년 연방대법원이 설립된 이래 미국 역사에서 연방대법관은 캐버노를 포함해 114명뿐이다. 이들 중 108명이 백인 남성이다. 나머지 6명은 흑인 남성 2명, 백인 여성 3명, 히스패닉 여성 1명이다.

연방대법원은 가치의 문제를 다룬다. 낙태를 허용할 것인지, 동성결혼을 인정할 것인지, 모두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투표로는 승부가 나지 않았던 2000년 미국 대선은 결국 연방대법원이 개입해 결과적으로 부시 대통령의 손을 들어준 모양새가 됐다. 이토록 큰 영향력을 가진 자리이기에 여야 간 싸움은 지독하고 치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트럼프는 지난해 4월 고서치 대법관에 이어 최근 캐버노까지 두 명의 보수 성향 연방대법관을 연방대법원에 안착시키는 데 성공했다. 트럼프는 재선된다 해도 최대 8년이면 백악관을 떠나겠지만, 그가 지명한 대법관들은 앞으로 수십 년을 대법원에 있게 된다. 어쩌면 가장 오래 남을 트럼프의 유산일 수 있다.

강인선 조선일보 워싱턴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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