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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9호] 2018.10.22

언론인 토막살해? 태풍의 눈이 된 ‘카슈크지 사건’

노석조  조선일보 국제부 기자 

▲ 터키서 실종된 사우디아라비아의 언론인 자말 카슈크지. photo 뉴시스
삼류(三流) 영화에서도 보기 어려운 황당한 범죄 사건이 백주 대낮에, 그것도 터키 최대도시 이스탄불의 사우디아라비아 외교 공관에서 벌어졌다. 자말 카슈크지라는 나이 예순의 사우디 프리랜서 기자가 지난 10월 2일 오후 1시 이스탄불 사우디 영사관에 들어갔다가 돌연 실종된 것이다. 그는 이날 재혼 준비를 위해 전 아내와 이혼했다는 증빙서류를 받으려고 영사관을 찾았다. 사전에 문의했더니 영사관에서 “10월 2일에 오라”며 기일을 잡아 통보했다. 그의 약혼녀는 “카슈크지가 정부 비판 언론인이라는 이유로 변을 당한 것 같다”면서 진상 규명을 요구했다.
   
   실종 나흘 만인 지난 10월 6일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터키 당국이 “카슈크지는 영사관에서 토막살해된 것으로 보인다”는 1차 수사결과를 내놓은 것이다. 터키는 카슈크지가 영사관에 들어가는 CCTV 화면을 공개했다. 그러면서 “그가 나오는 CCTV 화면은 찾을 수 없었다”면서 사우디 측에 “카슈크지가 영사관을 무사히 나갔다면 증명해보라”고 했다.
   
   사우디 정부는 의혹을 전면 부인했지만, 암살 의혹을 뒷받침하는 정황은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워싱턴포스트(WP)는 지난 10월 11일 “미 정보 당국은 사우디 실세 왕세자 무함마드 빈살만이 공안 당국에 ‘카슈크지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으로 파악했다”고 보도했다. 터키 당국은 사건 당일 오전 시신 해부 전문가가 포함된 15명의 ‘사우디 암살단’이 입국했고, 그들이 사우디 영사관에서 카슈크지를 토막살해했으며, 이를 입증할 음성·영상까지 확보했다고 밝혔다.
   
   사우디와 우방인 이집트·아랍에미리트(UAE)는 이런 정황이 조작된 것이라 했지만, 국제사회의 여론은 사우디에 불리하게 흘러갔다. 특히 빈살만의 리더십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다. 여성 운전 허용 등으로 개혁가 이미지였던 그가 사실은 자기에 대한 비판엔 조금의 관용도 용납지 않는 역대 어느 사우디 국왕보다 난폭한 독재자가 아니냐는 물음표가 커진 것이다. 이에 그의 개혁 정책에 기대하며 거액을 투자하려던 글로벌 기업들이 하나둘 발을 뺄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사우디 증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연일 폭락했다. 언론인 암살 의혹 사건 하나로 세계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의 경제와 빈살만의 국가 개혁 프로젝트가 휘청대는 것이다. 카슈크지는 자신으로 인해 이 같은 일이 일어날 줄 예감은 했을까? 빈살만은 왜 그를 그리도 싫어했던 걸까?
   
   카슈크지는 사우디 왕실 속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언론인이었다. 그의 할아버지 무함마드 카슈크지는 사우디의 국부(國父)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 초대 국왕의 주치의였다. 그의 삼촌은 1970~1980년대 세계 무기 시장을 주름잡은 사우디의 전설적 무기거래상 아드난 카슈크지(일명 카쇼기)였다. 아드난 카슈크지는 록히드마틴 같은 미국 방산업체들과 사우디 정부를 연결해주는 로비스트였다. 웬만한 유력 왕자보다 재산이 많았다. 1980년대 초 그의 재산은 40억달러(약 4조5000억원)에 달했다. 절대왕정인 사우디에서 그 정도 부를 쌓을 수 있다는 건 정치력 또한 막대하다는 걸 의미한다. 이런 삼촌을 둔 카슈크지는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사우디 왕가와 친하게 지냈다.
   
   카슈크지는 스물여덟이던 1985년 사우디 일간 오카즈 기자로 입사했다. 알샤르크알아우사트·알마잘라 등 여러 매체를 옮겨다닌 그는 일간 알메디나에서 1991~1999년 중동 특파원으로 이름을 날렸다. 아프가니스탄·알제리·쿠웨이트·수단을 돌며 각국 고위 외교관·정보요원과 인맥을 쌓았다. 그는 이 과정에서 훗날 9·11테러를 일으킨 알카에다의 창립자 오사마 빈라덴과 친구가 됐다. 당시 빈라덴은 9·11테러를 일으키기 전으로 아프간에서 소련군에 맞서 싸우는 무자히딘(이슬람 성전 전사)이었다. 이슬람권의 전사 영웅인 빈라덴을 카슈크지는 수차례 단독 인터뷰해 스타 기자가 됐다. 하지만 그는 9·11테러 이후 빈라덴과 친분을 끊었다.
   
   
▲ 지난 3월 트럼프 대통령이 왕위계승 확정 후 미국을 방문한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 왕세자와 회담을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왕실 속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기자
   
   카슈크지는 특파원 시절 그의 사촌 도디 알 파예드 덕에 영·미 정부 관계자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파예드는 영국 런던 번화가 헤로즈백화점을 소유한 거부 무함마드 알 파예드의 장남이다. 도디 파예드는 다이애나 전 영국 왕세자빈과 밀애를 나누는 사이였으며, 1997년 다이애나와 함께 교통사고로 사망한 인물이다. 사우디 유력 가문 출신 기자라는 배경에 영국 유명 인사 도디 파예드를 사촌으로 둔 카슈크지는 어디를 가나 주목을 받았다. 그는 해외 특파원 근무를 마친 1999년 사우디 유력 영어신문 아랍뉴스의 부국장이 됐다.
   
   그는 정부에 호락호락한 언론인이 아니었다. 2003년 일간 알와탄의 편집국장직을 맡았는데, 13~14세기 이슬람학자 이븐 타이미야를 비판하는 칼럼을 신문에 실었다가 공안 당국에 불려갔다. 그 일로 그는 단 두 달 만에 편집국장 자리를 내놔야 했다. 이븐 타이미야의 코란(이슬람 경전) 해설집은 사우디 건국이념인 ‘와합주의(또는 와하비즘)’의 근간이 됐기 때문에, 이븐 타이미야에 대한 비판은 금기(禁忌) 중의 금기다. 이런 사정을 모를 리 없는 그가 이븐 타이미야 비판 칼럼을 실었다는 건 그가 상당히 진보적 성향을 지녔으며 배짱 또한 보통 수준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이 사건 이후 그는 런던으로 도피했다. 기자 일도 잠시 그만뒀다. 대신 그간 친하게 지냈던 투르키 빈파이살 왕자의 보좌관이 됐다. 빈파이살은 1964~1975년 재위한 파이살 국왕의 아들이다. 그는 1979년부터 2001년 9·11테러가 벌어지기 10일 전까지 약 23년간 사우디 중앙정보부를 지휘했다. 현대그룹 등 한국 기업과도 사이가 좋아 서울도 여러 차례 찾은 바 있다.
   
   빈파이살은 카슈크지가 정부에 찍힌 인물인 걸 잘 알았지만, 그간의 관계를 생각해 그를 자신의 보좌관으로 받아준 것이다. 빈파이살은 2005년 주미(駐美) 대사로 임명돼 2007년 미국에서 근무할 때도 카슈크지를 자신의 언론 담당 보좌관으로 옆에 두고 지냈다.
   
   카슈크지는 2007년 4월 알와탄 편집국장에 임명되며 화려하게 언론계에 복귀했다. 하지만 그는 3년 뒤인 2010년 사표를 써야 했다. 그해 그가 또다시 사우디의 경직되고 호전적인 이슬람주의 사상을 비판하는 내용의 칼럼을 신문에 실어 정부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후 아예 정부 눈치를 안 봐도 되는 독립 언론 매체를 세웠다. 그는 친구인 사우디 억만장자 알왈리드 빈탈랄 왕자의 투자를 받아 바레인에 알아랍이라는 위성방송 매체를 만들었다. 그는 또 영국 BBC, 카타르 알자지라 등 여러 방송 매체에 출연해 사우디 왕실의 내밀한 이야기를 전하는 언론인으로 활약했다. 절대왕정인 사우디에서 정부 눈치 보지 않고 자기 목소리를 내는 언론인은 그가 거의 유일했다.
   
   왕실은 매우 폐쇄적인 조직이다. 그 안에서 어떤 권력싸움이 벌어지고, 어느 왕자와 왕자 사이가 좋고 나쁜지 일반인들은 거의 알지도 알 수도 없다. 하지만 집안 대대로 왕실과 밀접한 관계였던 카슈크지는 왕실의 속사정을 훤히 꿰고 있었다. 여러 유력 왕자들과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카슈크지의 ‘펜’은 2017년 들어 더욱 날카로워졌다. 그해 그는 서른두 살 빈살만이 ‘궁중 쿠데타’로 사촌형 무함마드 빈나예프의 왕위 계승권을 빼앗자, 이를 강력 비판했다. 신변이 위험해진 걸 직감한 그는 사우디를 떠나 미국으로 갔다. 그곳에서 워싱턴포스트에 칼럼을 쓰며 빈살만에 대한 비판을 이어갔다.
   
   그는 빈살만의 예멘 전쟁 개입, 카타르에 대한 단교·봉쇄 조치로 사우디의 외교적 고립이 심화하는 상황을 지적했다. 특히 그는 빈살만이 왕실 주요 인사 300여명을 부패 명목으로 일거에 체포하자, ‘이런 폭정은 전례를 찾을 수 없다’며 맹비난했다. 유력 왕자 등 왕실 인사를 대거 체포한 빈살만의 의도는 표면적으론 ‘부패 척결’이지만, 사실은 ‘정적 숙청’이라는 해석이 주류다. 궁중 쿠데타를 통해 왕세자가 된 빈살만은 권력 강화를 위해 기득권층을 무너뜨릴 필요가 있었다. 빈탈랄 같은 왕자들이 빈살만의 ‘숙청 리스트’에 포함된 이유다. 카슈크지는 자기와 가까웠던 인사들이 빈살만이 휘두르는 숙청의 칼에 희생되자 더욱 날 선 비판을 했을 수 있다. 빈탈랄은 감금 83일 만에 풀려났으나, 고문을 당한 것이 의심될 정도로 극도로 수척해진 모습이었으며, 석방 대가로 수십억달러를 빈살만에게 헌납한 것으로 알려졌다.
   
   
   빈살만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
   
   빈살만의 숙청 작업, 그리고 여성 운전 허용 같은 개혁 정책은 겉으론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올 3~4월 약 4주간 사우디를 떠나 미국·유럽 순방을 할 정도로 자신감을 보였다. 사실 많은 걸프 아랍국가의 왕들이 나라를 떠나 해외 방문 중에 측근의 반란에 뒤통수를 맞고 권력을 빼앗겼다. 타밈 현 카타르 국왕의 아버지인 하마드 전 국왕은 1995년 6월 27일 자신의 아버지 칼리파 당시 국왕이 스위스를 방문 중일 때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를 차지했다. 이런 위험이 있는데도 빈살만은 장기간 외국을 돌았던 것이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빈살만의 개혁 정책은 살얼음판 위에 올려진 돌덩이처럼 아슬아슬하다. 보수·기득권의 반발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이슬람 종교계도 부글부글 끓고 있다. 빈살만이 전통을 깨고 이슬람 성직자·율법학자들에 대한 형사처벌을 강화하며, 이들의 권력을 약화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빈살만으로서는 개혁 정책을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해선 보수·기득권이란 산을 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수·기득권층과 밀접한 관계이면서 개혁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거의 유일의 언론인 카슈크지는 빈살만에게 눈엣가시였던 것이다. ‘이 녀석’만 없으면 보수층 여론을 잡는 데 유리할 거란 계산을 했을 것이다.
   
   이번 사건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우방인 사우디를 두둔하고 나서며 일단락되려는 분위기다. 적극적으로 수사하던 터키 정부도 갑자기 ‘카슈크지는 사우디 실무자의 과실치사로 숨졌고 빈살만은 잘못이 없다’는 쪽으로 태도를 바꾸고 있다. 화폐 가치 폭락 등으로 어려움에 부닥친 터키는 이렇게 사우디와 미국의 ‘편의’를 봐주고 경제적 이득을 챙길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1994년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 제목이자 싸구려 잡지소설을 말하는 ‘펄프픽션(pulp fiction)’ 같은 일이 21세기 세계 최강국 미국과, 중동의 두 패권국 사우디·터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다. 사우디판 ‘펄프픽션’의 결말은 어떻게 끝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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