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과 일본의 해군은 1894년 7월 25일 인천 앞바다 풍도에서 전쟁을 개시했다. 현재 중국 측이 ‘갑오(甲午)전쟁’, 일본이 ‘일청(日淸)전쟁’이라고 부르는 전쟁이었다. 전쟁은 1895년 2월 12일 일본 해군이 산둥(山東)반도 웨이하이(威海)에 주둔해 있던 청 북양함대의 본부기지를 급습, 대부분의 전력을 궤멸시킴으로써 종결됐다. 4월 17일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청 북양대신 리훙장(李鴻章)과 일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종전 조약에 서명했다. 조약의 제1조는 “청은 조선이 완전무결한 독립국임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2000년 이상 중국 왕조의 영향권 내에 있던 한반도를 처음으로 중국대륙으로부터 떼어낸 것이었다.

일본은 1931년과 1937년에 각각 만주사변과 일·중전쟁을 일으켰다. 일본과 중국의 전쟁 상태는 일본군이 미 하와이를 기습 공격하면서 시작된 태평양전쟁에서 1945년 8월 15일 패전을 선포함으로써 종결됐다. 이후 26년간 중국과 일본 사이에는 아무런 접촉이나 교류가 없었다.

1971년 7월 9일 베이징(北京) 인민대회당에서는 전 세계가 모르는 가운데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 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와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가 회담을 시작했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毛澤東)이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을 선포한 이래 26년간 미·중 간에 아무런 접촉이 없던 시대의 종결이었다. 미국과 중국은 8년간의 준비 기간을 거쳐 1979년 1월 1일 공식 외교 관계의 회복을 선포한다.

미국과 소련이 두 개의 축이 되어 유지되던 양극화 시대는 닉슨과 마오가 각각 상대방을 이용해서 소련을 제압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을 구사하는 판을 짬으로써 미·소·중 3극화 시대로 바뀌었다. 국제정치 질서가 근본적으로 변하는 것을 감지한 일본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총리는 미국을 앞질러 1972년 7월 25일 베이징을 방문해서 중국과 일본이 수교를 하기로 합의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한다. 1978년 10월 23일에는 일본을 방문한 덩샤오핑(鄧小平) 중국 부총리와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일본 총리가 ‘중화인민공화국과 일본국의 평화우호조약’에 서명한다.

중국과 일본은 중·일 공동성명 발표 40주년이 되는 2012년에는 아무런 기념행사를 하지 않았다. 2011년 10월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하와이에서 중국에 대한 견제 정책을 다시 시작하는 ‘미국의 21세기는 태평양 세기’라는 연설을 하면서 일본의 중국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한 탓이었다. 당시 일본은 미국의 정책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서 일본명 센카쿠(尖角)열도, 중국명 댜오위다오 분쟁을 앞세워 중국과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지난 10월 25일부터 이틀간 ‘일·중 평화협정 체결 40주년’을 기념한다는 명목으로 베이징을 방문해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리커창(李克强) 총리와 만나 정상회담을 했다. 회담 결과는 아무런 주목거리도 없는 내용이었다. 발표된 회담 결과는 “중국과 일본은 세계의 주요한 경제적 위치와 영향력을 가진 국가로서 두 나라 관계가 장기적으로 건강하고 안정된 발전을 하는 것이 두 나라 국민과 이 지역과 국제사회의 보편적 기대에 부합한다”라는 것이 전부였다. 말 그대로 만남 그 자체가 의미가 있다는 메시지였다.

지난 10월 26일 중국을 방문한 아베 일본 총리(왼쪽)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photo 뉴시스
지난 10월 26일 중국을 방문한 아베 일본 총리(왼쪽)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photo 뉴시스

일본의 변화에는 이유가 있다

그러나 근대사에서 일본의 행동을 되돌아보면 알 수 있듯이 일본의 변화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동안 중국에 대해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던 일본이 올해 중·일 평화우호조약 체결 40주년에는 왜 중국에 우호적으로 다가갔을까. 아베 총리가 베이징 방문길에 나선 데에는 현재 미국과 중국이 두 개의 축이 되어 유지되는 국제질서에 심각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판단이 배경으로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와 관련 중국 내 종이신문 가운데 최대의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참고소식(參考消息)’은 10월 31일 ‘일본은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를 계속 지지해야 하는가’라는 제목의 일본 방위연구소 고급연구원 사타케 도모히코(佐竹知彦)의 아베 방문 진단 글을 실었다.

“일·미 동맹이 아직도 일본 외교정책의 중심이기는 하지만 일본은 반드시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를 지지하는 이전의 태도를 넘어서야 하며, 이 지역에서 일본의 독립적 역할을 확보해야 한다.… 2차 대전 종전 이래 일본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질서를 지지함으로써 안전을 확보하고, 미국의 기술을 획득해서 경제적인 발전을 이룬다는 전략을 추진했는데 일본은 경제 기적을 이룩함으로써 그 전략이 옳았다는 판단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미 트럼프 대통령의 ‘아메리카 퍼스트’ 정책의 등장으로 국제질서라는 거함이 이미 누수(漏水)가 시작된 마당에 일본이 미국의 침몰에 동반할 필요는 없다는 판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일본은 이 지역에서 친구와 동반자에 대한 낡은 사고방식을 변화시켜야 할 것이다. 한국이 미군의 수중에 있는 전시작전통제권을 되찾아오려는 방향을 설정하는 한편, 중국과 양호한 관계를 유지하고 (북)조선과도 평화 담판을 진행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아베가 일본 총리로서 7년 만의 베이징 방문길에 나선 것이 앞으로 일본의 대외정책 변화를 시사하는 행동으로 보는 것은 좀 시기상조라는 것이 미국의 시각이다. 미국 내 일본 권위자인 조셉 나이 하버드대 교수는 프로젝트 신디케이트 칼럼을 통해 “일본 입장에서는 중국 쪽으로 이전보다는 좀 더 다가섬으로써 미·중 양국에 양다리를 걸치려 들 수 있다”고 진단했다. 나이 교수는 “그러나 아직은 아베 총리가 시 주석에 다가가는 데는 분명한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진단하고, “트럼프 대통령이 현재보다 더 나가지 않는 한 일본은 미국의 동맹국으로 남아 있는 게 최선일 것”이라고 권고했다.

결국 아베 일본 총리의 이번 베이징 방문은 현 단계에서 아베와 시진핑이 같은 침대에서 서로 다른 꿈을 꾸는 동상이몽(同床異夢), 또는 서로 다른 침대에서 자면서 같은 꿈을 꾸는 동몽이상(同夢異床)의 상황 이상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으로 판단된다.

박승준 아시아 리스크 모니터 중국전략분석가 전 조선일보 베이징·홍콩 특파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