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방문한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왼쪽)이 지난 11월 8일 시진핑 주석을 만나고 있다. ⓒphoto 뉴시스
중국을 방문한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왼쪽)이 지난 11월 8일 시진핑 주석을 만나고 있다. ⓒphoto 뉴시스

최근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와 서태평양 지역의 정세를 관통하는 최대 의문은 미·중 무역전쟁의 진실이다. 트럼프 미 대통령이 대중 무역전쟁을 통해 노리는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미·중 무역전쟁은 트럼프가 지난 8월 중국의 대미 주요 수출품들에 대한 고율의 관세 부과를 결정하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보복에 나서면서 발발했다. 그 후 트럼프의 목적에 대해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어왔다. 이들 주장을 살펴보면 두 개의 스쿨(school·학파)이 맞서고 있다. 20세기 초 영국의 외교 고위 관리였던 에어 크로와, 95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현장을 누비고 있는 미국 외교의 거장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의 이름을 각각 따서 붙인 ‘크로 스쿨’과 ‘키신저 스쿨’이 담론 시장에서 치열하게 붙고 있는 것이다.

크로 스쿨의 관점은 관여가 아니라 봉쇄다. 대중 무역전쟁을 통한 트럼프의 목표는 동아시아와 서태평양 지역에서 2차대전 이후 유지돼온 미국의 군사적 우위에 대한 중국의 도전을 차단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인식을 가진 스쿨이 크로 스쿨로 불리는 것은 키신저가 그의 책 ‘On China(중국론)’에서 그렇게 부르면서다. 키신저에 의하면 1907년 당시 영국 외무성의 고위 관리로 있던 크로는 유럽 최대의 육군력을 보유한 독일이 최대의 해군력 확보를 추진하는 것을 보고, 영국은 독일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무조건 대응하고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중국도 미국 패권에 도전할 수 있는 능력과 의도를 언젠가는 드러낼 것인 만큼 중국이 이미 그렇게 행동하는 것처럼 적극적 봉쇄 등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 크로 스쿨의 촉구다.

실제로 남중국해 상황은 중국이 ‘반접근과 지역거부(A2AD)’ 전략으로 미국의 기선을 제압한 형국이다. 미 해군은 중국이 주변국들의 도서에 대한 불법 점유와 인공섬을 건설하는 것에는 손도 못 대고 단지 순찰만 하고 있는 실정이다. 크로 스쿨이 미국의 대중 무역전쟁을 중국의 패권 도전에 대한 반격이라고 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글로벌 담론 시장에 확산되고 있는 ‘마침내 트럼프가 미·중 패권 경쟁에 본격 나섰다’는 분석은 크로 스쿨의 이 같은 인식과 궤를 같이한다.

크로 스쿨에 맞서고 있는 스쿨은 관여(engagement)의 패러다임을 바탕으로 미·중 무역전쟁을 관찰하고 있다. 미·중 무역전쟁은 양국 교역의 불균형을 바로잡으려는 미국의 의도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이 스쿨의 입장이다. 요컨대 중국 기업들이 미국 기업들의 지적재산권(IP)에 대한 불법적 침해 등을 통해 대미 교역에서 막대한 흑자를 거두는 현재의 잘못된 무역 구조를 개혁하는 데 트럼프의 목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관여냐 봉쇄냐

이 스쿨은 키신저 스쿨로 명명할 수 있다. 그 까닭은 대중 관여의 필요성을 중시하는 이 스쿨의 관점이 키신저의 패러다임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키신저는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의 대중 전략 목표는 중국과의 군사 패권 경쟁이 아니라 협력을 통한 역내 안보 질서의 안정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키신저는 평소에도 ‘중국의 힘을 인정해주고 거기에 걸맞은 역할을 하게끔 도와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표명해왔다. 트럼프가 그의 대중 전략에 키신저의 이 같은 견해를 반영하고 있을 가능성은 적지 않다. 트럼프는 지난해 아시아 순방을 떠나기 직전인 10월과 김정은과 정상회담을 갖기로 결정할 즈음인 올 2월 등 키신저를 두 차례 만나 의견을 들었다. 그가 북핵 해결 방안으로서 한반도에서의 중국의 영향력을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한 ‘미·중 빅딜론’을 제안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라고 해석할 수 있다. 트럼프는 지난 6월 12일 김정은과의 회담 직후 한·미 연합 군사훈련 중단 발표와 함께 주한미군의 철수를 희망한다는 생각을 감추지 않았다. 그의 이 같은 생각도 키신저의 미·중 빅딜론에서 비롯됐을 수 있다.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싶다는 그의 바람은 북한의 비핵화 이후 주한미군의 역할을 중국의 패권을 견제하는 것으로 조정해야 한다는 크로 스쿨의 주장과 배치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키신저 스쿨은 미·중 무역전쟁을 기화로 트럼프 행정부가 역내 군사적 지위를 둘러싸고 중국과의 군사적 패권 경쟁에 휘말려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 대신 외교를 통해 중국을 설득해 군사적 패권 도전을 그만두게끔 하는 것이 패권국인 미국의 역할이 되어야 한다는 시각을 갖고 있다. 키신저가 그의 책 ‘World Order(세계질서)’에서 펴고 있는 주된 논지도 외교의 목표는 전쟁 방지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크로 스쿨과 키신저 스쿨 중 어느 쪽의 관점이 맞느냐는 것이다. 이를 가리기 위해서는 먼저 중국이 지난 10월 24일 왕치산 국가부주석을 이스라엘로 보낸 목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겉으로 드러난 방문 목적은 양국 간 연례 협의 참석이었다. 하지만 올해의 경우 중국 대표단의 수석대표 지위에서 지난해와 큰 차이가 난다. 국무원 부총리가 맡았던 수석대표가 시진핑 정권의 실세로 한참 격상된 것이다. 이 때문에 홍콩 등지의 언론에서는 왕치산의 이스라엘 방문 목적이 미국 기업들로부터 기술 도입이 어려워진 상황을 타개하는 데 있을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왕치산은 왜 이스라엘을 방문했나

하지만 왕치산의 이스라엘 방문은 미·중 무역전쟁을 끝내기 위한 대미 전략 차원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더 높다. 이 같은 분석의 근거는 1989년 천안문사태 직후 당시 최고지도자였던 덩샤오핑이 미국의 제재를 풀기 위한 조치로서 전격적으로 이스라엘과 수교를 한 데서 찾을 수 있다. 당시 조지 H. W. 부시 미 행정부는 천안문사태로 수많은 지식인과 대학생을 희생시킨 중국에 대해 강력한 경제 제재와 함께 세계 시장 진입 자체를 막는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개방을 통해 경제 발전을 이뤄야만 중국이 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던 덩샤오핑은 미국에 제재 해제를 수차례 요구했으나 매번 거절당했다. 그러자 덩샤오핑은 이스라엘과의 수교를 특단의 카드로 꺼내들었다. 이 카드는 큰 효력을 발휘했다. 미국의 정치와 금융권력을 쥐고 있는 유대인 네트워크가 행정부에 압력을 행사해 얼마 지나지 않아 제재가 해제된 것이다. 왕치산의 이스라엘 방문 목적이 미국의 유대인 파워를 이용해 트럼프의 대중 무역전쟁을 중단시키는 데 있을 수 있다는 분석이 가능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 같은 전략이 통한 것인가. 왕치산이 이스라엘을 방문한 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11월 1일 트럼프와 시진핑 간에 전화통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6개월 만이다. 중국 외교부에 따르면 시진핑은 전화통화에서 미·중 간 무역 갈등을 원치 않는다는 뜻을 분명히 전달했다. 트럼프도 이날 트위터에 시진핑과의 통화와 관련해 “시 주석과 길고 좋은 대화를 나눴다”고 밝혔다. 두 사람 간의 이 같은 대화는 미·중이 조만간 무역전쟁을 끝내는 데 합의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을 시사한다. 왕치산의 방문을 통한 이스라엘과의 관계 강화가 미국 내 유대인 파워를 움직인 결과로 이날 두 사람의 전화통화가 이루어졌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두 사람의 전화통화 뉴스가 전해지면서 미국 증시가 반등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월스트리트 금융권력은 유대인들이 쥐고 있다.

왕치산의 이스라엘 방문에서 트럼프와 시진핑 간 전화통화로 이어지는 일련의 미·중 간 움직임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하다. 중국의 메시지는 ‘수입 증대와 함께 미국 기업들의 지적재산권에 대한 자국 기업들의 침해 근절 등을 약속할 테니 무역전쟁을 끝내달라’는 요청이다. 미국의 응답은 ‘시진핑과 길고 좋은 대화를 나눴다’는 트럼프의 트윗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동안 대미 교역에서 일방적으로 막대한 흑자를 거두어오는 데 큰 역할을 해온 불공정한 요인 제거에 시진핑이 적극 나서겠다는 의사를 보였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이다.

지난해 10월 10일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오른쪽)을 만나고 있는 키신저 전 국무장관. ⓒphoto 뉴시스
지난해 10월 10일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오른쪽)을 만나고 있는 키신저 전 국무장관. ⓒphoto 뉴시스

시진핑은 왜 유화적으로 바뀌었나

이 같은 상황 전개는 키신저 스쿨의 손을 들어준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시진핑이 트럼프의 요구 조건들을 수용할 뜻을 밝힘에 따라 트럼프가 무역전쟁을 중단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크로 스쿨의 주장이 틀렸음이 드러나고 있다. 트럼프가 대중 무역전쟁을 개시한 목적이 중국의 패권 도전에 대한 반격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그 후 크로 스쿨의 ‘전의’를 꺾는 두 건의 행사가 더 있었다. 지난 11월 5일 상하이 국제수입박람회에서 시진핑의 개막 연설과 11월 8일 방중한 키신저의 시진핑 면담이 그것이다.

무엇보다도 상하이 국제수입박람회는 미·중 무역전쟁의 본질이 미국이 중국으로부터 경제적 이익을 더 얻어내는 데 있다고 중국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됐다. 시진핑이 개막 연설에서 트럼프가 듣기를 원한 세 가지 약속을 국제사회를 상대로 공개적으로 표명하고 나선 것이다. 그는 수입관세 인하 등을 통한 개방 확대와 함께 2008년 기점으로 감소해온 수입도 향후 15년간 30조달러까지 증대시키겠다고 밝혔다. 그는 또 미국이 불공정 교역 행위로 지목한 중국 기업들의 지적재산권 침해와 관련해 적발되는 중국 기업들에 대해 ‘징벌하겠다’는 유례없이 강력한 표현을 사용하면서까지 확고한 근절 의지를 과시했다.

시진핑의 유화 제스처는 11월 8일 방중한 키신저와의 면담에서 상하이 연설 때보다 훨씬 정중하고 미래지향적인 표현을 담아 전달됐다. 시진핑은 “중국은 평화 발전의 길을 견지하며 여전히 충돌하지 않고 대항하지 않으며 상호 존중하고 협력 공영의 미·중 관계에 힘쓰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키신저에게 이 같이 말한 것은 이를 트럼프에게 전해달라는 의미로 풀이될 수 있다. 이는 시진핑이 키신저를 사실상의 미국 특사로 예우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로써 미·중 무역전쟁의 본질에 관한 경쟁은 키신저 스쿨의 승리로 끝났다고 평가할 수 있다. 키신저 시대가 부활한 셈이다.

사실 미·중 무역전쟁의 결말은 시작 때부터 정해져 있었다. 시진핑의 가장 큰 우려는 경제성장률이 현 6.3%에서 더 추락해 최대 3억명에 이르는 중산층의 가계가 타격을 받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경제 성장에 따른 소득 향상을 안겨줘 간신히 눌러온 이들 중산층의 정치적 자유에 대한 욕구가 언제 어떻게 폭발할지 알 수 없어진다는 데 시진핑과 공산당의 고민이 있는 것이다. 미국의 중국 전문가 아론 L. 프리드버그가 그의 책 ‘A Contest for Supremacy(패권을 향한 결전)’에서 밝힌 대로 중국이 오늘날 직면한 최대의 위기는 공산당

1당 지배 체제에 대한 내부 도전이다. 이 때문에 시진핑과 공산당은 미·중 무역전쟁이 길어져 중국 경제에 대한 타격이 깊어지면 그것이 중국 내 중산층의 소득 감소로 이어져 공산당 1당 지배 체제가 흔들릴 수 있다고 걱정해왔다.

트럼프의 입장에서도 대중 무역전쟁 시작 단계부터 이를 오래 끌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100%다. 대중 무역전쟁이 오래 지속될 경우 현재 호황인 세계 경제가 위축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미국 경제도 다시 침체하는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트럼프가 바라는 시나리오가 아니다. 왜냐하면 무역전쟁 자체가 중국과의 교역 불균형을 바로잡음으로써 미국 국내 경제를 일으켜 세우는 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계 경제가 위축됨에 따라 미국 경제가 타격을 받아 중하층의 삶이 다시금 어려워지게 되면 그것은 트럼프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트럼프 입장에서는 성장률을 간신히 올리고 실업률도 낮춰가며 구축한 재선의 발판이 흔들릴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하는 점이 있다. 키신저 스쿨이 크로 스쿨을 이겼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중국에 패권 도전 의지가 없다고 면죄부를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중국은 서태평양 지역의 군사적 우위를 사실상 차지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렇다면 트럼프는 중국의 군사 패권 추구에 대해서는 어떤 전략을 갖고 대응하고 있는 것인가. 이와 관련해 트럼프는 관여를 넘어서 아예 관심을 두지 않는 모습까지 보여왔다. 가장 극명한 사례는 지난해 11월 베트남 다낭에서 열린 APEC 회의를 계기로 열린 미국과 베트남 간 정상회담이었다. 이 자리에서 트럼프는 중국과의 영유권 분쟁을 중재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베트남은 필리핀 등과 함께 최근 몇 년간 중국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해왔다. 그런 베트남으로서는 트럼프의 제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어이없는 것이었을 수 있다.

중국의 군사 패권 추구에 대한 그의 무관심 또는 불관여는 미국 국민의 경제적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금융위기로 인해 실직하고 파산한 수백만의 근로자와 그들의 가족 등 미국 국민은 더 이상 그들의 행정부가 예산을 대외 문제 관여로 낭비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고 있다. 트럼프는 이들의 목소리를 바탕으로 정책을 만들어 제시한 결과 당선됐다. 그랬던 만큼 트럼프는 중국의 군사 패권 추구를 막기 위해서건 베트남과 필리핀의 영토적 이익을 위해서건 국민을 위해 써야 할 예산을 해외에서 낭비할 생각이 애초에 없는 것이다.

애타는 백악관 참모들

이와 관련해 최근 중요한 상황이 외국 언론에 의해 포착됐다. 지난해부터 미 백악관 국가안보실 참모들은 트럼프에게 중국의 패권 도전에 대한 견제 전략인 ‘인도-태평양 전략’을 각종 연설에서 언급해줄 것을 요청해왔다. 하지만 트럼프는 한 번도 그 전략을 입에 올린 적이 없다. 백악관 안보 참모들은 앞으로도 트럼프가 그렇게 할 가능성이 낮을 것이라고 보고 전전긍긍하고 있다고 영국의 이코노미스트가 지난 9월 15일자에서 워싱턴발로 보도했다. 이 같은 사실은 트럼프가 적어도 현재까지는 중국을 상대로 패권 경쟁에 나설 생각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찌됐든 미·중 무역전쟁은 중국의 양보로 머지않은 장래에 끝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물론 아직 미·중 양국은 무역 협상을 둘러싸고 치열한 기 싸움을 벌이고 있다. 결국 무역전쟁의 운명은 트럼프와 시진핑 간 담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중은 11월 9일 베이징에서 외교안보 고위급 회담을 갖고 북한의 비핵화와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등을 비롯한 역내 주요 안보 현안에 대한 논의를 했다. 여기서 양국은 대북 안보리 제재를 유지함으로써 북한의 비핵화를 달성하기 위해 협력할 것이라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이는 북한의 핵 보유가 동아시아와 서태평양 지역에서 핵 도미노로 이어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데 양국의 이해가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남중국해에서의 중국의 행동과 중국 내 종교 탄압에 대해서는 우려가 남아 있다고 지적했다. 마크 펜스 미 부통령이 지난 10월 4일 워싱턴 소재 허드슨연구소에서 행한 연설에서 중국 내 소수민족 문제와 종교 탄압 문제 등에 대해 강력한 톤으로 비판한 것이 미·중 외교안보 고위급 회담의 논의로 이어진 것이다. 이에 대해 크로 스쿨은 ‘거 봐라’ 할 것이다. 하지만 무는 개는 짖지 않는다. 대중 협상에서 기선을 잡기 위한 전략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트럼프와 역할 분담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펜스는 이미 ‘전력’이 있다. 그는 지난 2월 평창 동계올림픽 때도 서울행 비행기 안에서 북한에 대해 비판을 했다. 그는 심지어 북한 대표단에 대해서도 냉랭하게 대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때 트럼프는 김정은에게 극비리에 회담을 제의한 뒤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다.

키신저 스쿨은 트럼프가 대중 전략과 마찬가지로 대북 전략의 큰 방향을 관여로 잡아가는 데 보이지 않는 역할을 해왔다. 트럼프가 올 한 해 김정은과의 회담을 통해 직접 북한의 비핵화 문제 해결에 나선 것도 키신저의 조언에 따른 것이다. 미·중 외교안보 고위급 회담에서 양국 간에 최대한의 대북 제재를 유지하자는 데 합의가 이루어진 만큼 중국의 지원에 의존해온 김정은이 비핵화 약속 이행을 마냥 지연시키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시간은 트럼프 편인 것이다. 북한으로 하여금 핵 실험과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를 중단하게 만들었고 미군 유해도 송환받았다는 것은 트럼프로서는 적지 않은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아직 이행되지는 않았으나 김정은에게서 미사일 엔진 시험장 폐쇄도 약속받은 상태다. 이 약속만이라도 이행되면 미국 입장에서는 미 본토에 대한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 위협은 어느 정도 해소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다. 때문에 군사 공격을 가하거나 막대한 자금을 제공해서라도 북한으로 하여금 비핵화를 시키는 방안은 미국 국민의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트럼프는 잘 알고 있다. 이 때문에 그는 무리하지 않고 기다리는 전략을 펴고 있다.

중국 속국화 위기는 커진다

걱정스러운 것은 한국의 앞날이다. 트럼프가 중국의 패권 도전에 대한 견제보다는 대화를 통한 협력과 공존을 추구하는 만큼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이 날로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고생스러운 대중 관여보다 미국 국익 우선주의에만 집중할 가능성이 높다. 그럴 경우 시진핑은 트럼프가 요구하는 경제적 이익을 양보하고 그 대가로 동아시아와 서태평양 지역에서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군사적 우위를 확대해나갈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역내 질서는 미국과 동맹국들에 의한 자유주의 체제의 우위에서 중국과 러시아에 의한 비자유주의 체제의 우위로 이행해나갈 가능성이 있다. 중국과 러시아에 의한 한국 속국화 위협이 현실화할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 진보 진영은 김정은의 비핵화 코스프레에 넘어간 나머지 안보리 대북 제재를 흔드는 남북 경협에만 골몰하고 있다. 미·중이 대북 제재를 지속하자는 데 합의한 상황에서 한국이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이다. 언제 어떻게 미국이 떠나고 중국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사태가 발발할지 알 수 없다. 그런데도 보수 진영은 사태 파악을 하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다. 진보 진영이 역주행을 하고 있다면 보수 진영은 고속도로 한가운데 정차하고 있는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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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관 전략국가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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