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캐나다의 핼리팩스에서 열린 안보회의에 다녀왔다. 미국에 있다가 캐나다에 가면 차분한 기분이 된다. 덩치 큰 이 두 나라를 이렇게 단순 비교할 일은 아니지만 캐나다에 갈 때면 늘 그런 느낌을 받았다.

거대한 규모와 넘치는 에너지가 사람을 누르는 듯한 미국 분위기에서 벗어나 좀 단정하고 진정된 기분이 된다고 할까. 한 미국인 친구는 “미국에선 모든 게 야단법석인데 캐나다에선 똑같은 일이 팬케이크 위에 캐나다산 메이플시럽을 바르듯 매끄럽게 이뤄진다”고 했다.

올해 10년째 열리는 ‘핼리팩스 안보포럼’ 회의에선 당연히 트럼프 대통령에 관련된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대부분이 비판적인 이야기였다. 캐나다 사람들이 트럼프에 대해 느끼는 염증은 상상 이상이었다. 미국 사람들은 이제 그러려니 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 같은데 국경 너머에서 느끼는 비난은 더 신랄했다.

지리는 운명이다. 한 국가가 지구상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는 그 나라의 운명을 좌우한다. 지금은 마치 한 덩어리인 것처럼 보이는 서유럽은 수십 개국이 수백 년 동안 치열한 전쟁을 통해 피 흘리면서 만들어낸 질서 위에 서 있다.

캐나다가 누리는 운은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긴 국경을 미국과 평화롭게 맞대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캐나다는 미국과의 관계를 중시한다. 어느 나라인들 미국과의 관계가 중요하지 않을까마는 캐나다의 경우엔 더 자연스럽게, 지리라는 운명이 짝지워준 이웃과의 관계라는 점에서 더 중요하다.

미국에서 새 대통령이 취임하면 캐나다와 첫 정상회담을 하는 것이 관례처럼 돼 있었다. 그래서 2000년대 초반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취임했을 때 텍사스주 주지사 출신 대통령이 역시 미국의 중요한 이웃인 멕시코 대통령과 첫 정상회담을 계획하자 캐나다 총리가 당장 달려 내려왔다.

캐나다와 미국의 이런 특수한 관계를 감안할 때 캐나다 사람들이 트럼프 대통령을 견딜 수 없어 하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가장 친하고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나라인 미국 대통령이 캐나다 총리를 퉁명스럽게 대하고 캐나다와의 관계를 흔들고 있으니 감당하기 힘들 것이다.

트럼프는 취임 후부터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손보겠다고 했다. 지난 6월 캐나다에서 열린 G7회의에선 보호무역주의와 관세장벽을 배격한다는 공동성명에 트럼프가 강하게 반발했다. 저스틴 트뤼도 총리에게 “부정직하고 약해빠졌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트뤼도 총리는 지난 10월 한 인터뷰에서 “트럼프와의 관계가 쉽지는 않다”고 했다.

안정된 것을 흔들고 상식적인 생각을 거부하는 트럼프를 보면서 ‘안티프레질(antifragile)’을 떠올린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는 자신의 책 ‘안티프레질’에서 충격을 받으면 부서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강해지는 성질에 대해 말한다. ‘가변성·무작위성·무질서·스트레스에 노출될 때 번창하고 성장하며 모험과 리스크, 불확실성을 좋아하는 기질’을 말한다. 가끔은 트럼프 월드가 돌아가는 건 이런 힘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이런 움직임이 반드시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지진 않으리라는 게 문제지만.

강인선 조선일보 워싱턴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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