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2월 6일 연방정부 셧다운(일시 기능정지) 때문에 연기했던 국정연설을 했다. 트럼프가 좀 더 대통령다워졌다는 평이 꽤 많았다. 보는 사람들이 익숙해진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다음날인 7일 화제의 주인공은 트럼프보다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이었다. 정확하게는 펠로시가 트럼프를 향해 박수 칠 때 그 미묘한 자세와 표정이었다.

트럼프가 연설하는 동안 펠로시 의장은 펜스 부통령과 함께 대통령 뒤에, 그러나 조금 더 높은 위치에 서 있었다. 펠로시가 트럼프 뒤에 서서 박수 치는 모습은 보기에 따라 칭찬인 것 같기도 하고 야유인 것 같기도 했다. 아이를 어르고 달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제스처는 온갖 해석을 낳았다. 나도 몇 번이나 동영상을 돌려 보았다. 노회한 정치인이 국정연설 내내 나름의 몸짓으로 또 다른 연설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최근 워싱턴 정가의 화제 인물은 펠로시 의장이다. 그는 ‘협상의 달인’을 자처하는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멕시코 국경장벽 예산 문제 때문에 대치하던 여야가 3주 임시이긴 하지만 셧다운 해제에 합의했다. 트럼프는 양보한 게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패배는 패배였다. 사람들은 ‘트럼프가 드디어 임자를 만났다’고 시원해했다.

트럼프와 펠로시의 대결은 미국 권력서열 1위와 3위의 대결이었다. 72세의 막무가내 신인과 78세의 노회한 정치인의 대결이기도 했다. 트럼프가 사업과 TV 프로그램 진행을 하며 얻은 유명세로 뒤늦게 대선에 뛰어든 예외적인 정치인인 것처럼 펠로시도 특이했다. 자녀 다섯을 낳아 키우다 1987년 47세 때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이후 펠로시는 승승장구하며 미국 여성 정치인으로선 처음으로 2007년 하원의장이 됐다. 트럼프와 마찬가지로 갑부 출신이라 ‘아르마니를 입은 좌파’라는 별명도 있다. 올해 펠로시가 하원의장으로 복귀할 때 민주당에서조차 걱정이 많았다. 구(舊) 정치인의 재림처럼 느껴져서 트럼프의 맞수가 될 수 있을지 우려가 컸다. 하지만 펠로시가 예상외로 선전하면서 민주당에서 환호가 쏟아지고 있다.

의회에서 30년 넘게 정치력을 다진 펠로시는 영리하게 수를 뒀다. 연방 공무원을 인질로 삼아 정책 토론의 협상도구로 쓰는 선례를 남겨선 안 된다는 입장을 확실히 했다. 그리고 트럼프를 조금씩 몰아세웠다. 일단 지난 1월 말로 잡혀 있던 국정연설을 연기했다. 부드럽게,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가장 좋아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국민 앞에 서서 연설할 기회’를 빼앗았다. 트럼프는 타격을 입었다. 펠로시는 말썽쟁이 아이를 다루듯 능숙하게 트럼프를 다루는데, 적어도 지금까지는 상당히 효과적이다. 앞으로 트럼프가 어떻게 반격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트럼프의 좌충우돌에도 불구하고 미국 시스템이 버티는 건 의회와 사법부가 원칙을 지키며 견제의 기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워싱턴에 있다 보면 백악관이 세상의 중심인 것 같다. 하지만 좀 더 큰 그림으로 보면 저 언덕 위에서 의사당이 백악관을 굽어보고 있고 또 그 뒤에 대법원이 버티고 있다. 도시 구조가 마치 대통령 혼자 모든 것을 다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웅변하는 것 같다. 국정연설을 하는 트럼프 뒤에 서 있던 펠로시 의장 역시 온몸으로 그런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 같았다.

강인선 조선일보 워싱턴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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