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26일 열린 베트남 공산당 12차 중앙위 9차 전원회의 모습. 베트남 공산당은 국부 호찌민의 유훈에 따라 집단지도 체제를 채택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해 12월 26일 열린 베트남 공산당 12차 중앙위 9차 전원회의 모습. 베트남 공산당은 국부 호찌민의 유훈에 따라 집단지도 체제를 채택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내가 죽은 후 웅장한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무덤에는 비석도 동상도 세우지 말라. 소박하고 넓고 튼튼하고 통풍이 잘 되는 집을 세워 방문객들이 쉬어갔으면 좋겠다. 방문객마다 한두 그루씩 나무를 심게 하면 나무가 숲을 이룰 것이다.”

베트남 국부(國父)인 호찌민(胡志明·1890~1969)이 남긴 유언장의 일부이다. 호찌민은 베트남 공산당을 만들었고 1945년 출범한 베트남 민주공화국(북베트남·월맹)에서 총리(1946~1955)와 국가주석(1955~1969)을 지냈다. 베트남 국민들은 막강한 권력자였던 호 전 주석을 지금도 ‘박호(Bac Ho·호 아저씨란 뜻의 베트남어)’라고 부른다. 그가 평생 소탈하고 검소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호 아저씨의 유언장

프랑스·미국 등과의 전쟁을 이끌면서 베트남 통일의 기틀을 세운 호 전 주석은 지팡이 하나, 옷 두 벌, 몇 권의 책을 유품으로 남길 정도로 어떤 부귀영화도 누리지 않았다. 호 전 주석은 1954년 프랑스 총독의 관저로 썼던 주석궁에 거주한 지 3개월 만에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며 그 옆의 작은 집으로 옮겼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 배관공이 살던 집이라고 한다. 1958년 인근에 2층짜리 목조주택을 짓고 그곳으로 다시 옮겨 사망할 때까지 살았다. 전쟁 당시 정글에서 몸에 밴 검소한 생활은 주석 자리에 오른 뒤에도 여전했다. 늘 같은 옷에 폐타이어로 만든 고무샌들을 신었다. 독신으로 지낸 호 전 주석은 주석이 된 후 누이를 딱 한 번 만났을 뿐 죽을 때까지 인연을 끊고 지냈다. 장례식도 단 35분 만에 간소하게 치러졌다.

하지만 호 전 주석의 유언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당시 베트남 공산당 정권은 수도 하노이 바딘광장에 영묘(靈廟)를 세우고 소련을 건국한 블라디미르 레닌처럼 호 전 주석의 시신을 미라로 만들어 영구보존하기로 결정했다. 그 이유는 베트남 공산당 정권이 호 전 주석의 강력한 영향력을 통치에 이용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특히 레주언 서기장은 호 전 주석의 유언과는 달리 강력한 권력을 독점하면서 철권통치를 했다. 호 전 주석은 집단지도 체제를 통해 베트남 공산정권을 이끌어가야 한다고 유언했지만 레주언은 베트남을 적화통일을 했다는 공을 앞세워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레주언은 공산당 내에서도 강경파였다.

레주언은 무력으로 흡수통일한 남베트남(월남)에 대해 대규모 숙청을 벌이는 등 철저하게 체제를 강화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남베트남 출신 군인과 관리 등 수백만 명을 집단농장에 강제수용시키고 공산주의에 순응하도록 사상개조 교육을 시켰다. 이 과정에서 최대 200만명이 희생됐다. 레주언은 또 시장경제 체제를 완전히 부정했고, 모든 농경지를 국가 소유인 집단농장으로 만드는 등 공산주의 경제 체제만을 추진했다. 이 때문에 베트남은 통일 이후 10년간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하기도 했다. 레주언은 또 1979년 캄보디아를 침공해 베트남을 동남아는 물론 국제사회에서 고립시키는 위기를 자초했다. 베트남 경제는 각국의 제재조치 때문에 더욱 악화됐다.

도이머이 주역은 호찌민의 아이들

레주언이 1986년 7월 사망하자마자 베트남 공산당은 같은 해 12월 제6차 당대회에서 도이머이 정책을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회의에서 쯔엉찐·팜반동·레둑토 등 ‘트로이카’로 불리던 당 강경 원로들이 동반퇴진했고, ‘베트남의 고르바초프’라는 평가를 받아온 응우옌반록 서기장이 새로운 지도자로 떠올랐다. 그는 공산주의의 기본 골격은 유지하되 시장경제 체제를 추진할 것을 선언했다. 도이머이는 베트남 말로 ‘바꾼다’는 ‘도이(Doi)’와 ‘새로운’이라는 ‘머이(Moi)’를 합친 말로, ‘새롭게 한다’ 또는 ‘쇄신(刷新)’을 뜻한다.

응우옌반록 서기장은 베트남 통일 이후 호찌민(옛 사이공)시 당서기로 있으면서 각종 개혁 정책을 추진하다 강경파의 반발로 실각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호 전 주석의 추종자였다. 싱가포르의 베트남 전문가 리홍립은 “레주언이 죽고 난 후 단 한 명의 정치인도 예전과 같은 권력을 가질 수 없었다”면서 “베트남은 이때부터 공산당 정치국 중심의 집단지도 체제가 중요한 의사결정을 했다”고 분석했다. 말 그대로 도이머이 정책이 나온 것은 호 전 주석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호 전 주석은 인민을 배불리 먹이는 것을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강조해왔다. 베트남 공산당 정권이 체제붕괴의 위험을 감수하고 도이머이 정책을 폈던 것도 호 전 주석의 이런 유훈(遺訓) 때문이었다.

호 전 주석 시절 상무부 장관, 건설부 장관, 부총리를 지낸 도므어이 전 서기장이 총리(1988~1991)로서 응우옌반록 서기장과 함께 도이머이 정책을 내실 있게 추진했던 것도 베트남 발전의 토대가 됐다. 도므어이는 1991년 6월 총서기에 올라 1997년 12월 퇴임 때까지 중국(1991)·한국(1992)·미국(1995) 등과 수교를 맺었다. 도므어이는 미국과 수교하기 위해 당시 최대 걸림돌이었던 캄보디아 주둔 베트남군 철수, 국영기업 민영화, 외국인투자법 강화 등을 주도하기도 했다. 지난해 10월 사망한 도므어이 전 서기장 역시 호 전 주석이 발탁한 인물이었다.

특히 도이머이 정책은 각 분야에 포진한 ‘호찌민 유학생들’ 때문에 순풍을 달게 됐다. 호 전 주석은 베트남전쟁 와중에서도 5000여명에 달하는 젊은 인재들을 소련·동유럽·중국·쿠바 등에 유학을 보내 공부하도록 했다. 당시 호 전 주석은 “너희들은 공부하는 것이 전투다”라면서 전쟁 이후 베트남 재건에 힘쓰라고 격려했다. 호 전 주석의 염원대로 이들은 베트남 재건의 ‘동량(棟梁)’이 됐다. 이들은 각 분야 지도자의 위치에서 베트남의 개혁개방 정책을 이끌었다. ‘호찌민 유학생들’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은 농둑만 서기장을 들 수 있다. 그는 베트남전쟁이 본격화하던 1966년 소련 유학생으로 뽑혀 레닌그라드 임업연구소에서 5년 가까이 공부했다. 귀국 후 주로 임업 분야에서 일하다 제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 후보로 선출되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91년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권력의 핵심에 진입한 그는 2001년 최고 실권자인 서기장에 선출됐으며 2011년까지 재임했다. 그의 리더십 아래 당시 베트남은 연 평균 7~9%대의 고(高)성장률을 기록했다. 그는 한때 호 전 주석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날 정도로 호 전 주석을 존경해왔다.

김일성이 1958년 베트남을 방문해 하노이 시민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photo 베트남 공산당
김일성이 1958년 베트남을 방문해 하노이 시민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photo 베트남 공산당

집단지도 체제도 호찌민의 유훈

도이머이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한 1986년 이후 베트남의 지도자 교체는 서방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처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지금까지 공산당 서기장은 다섯 차례, 총리는 일곱 차례 바뀌었다. 호 전 주석이 유훈(遺訓)으로 남긴 집단지도 체제가 베트남 경제발전에 밑거름이 된 셈이다. 베트남을 통치하는 유일한 세력은 공산당이다. 공산당은 헌법상 국가와 사회를 영도하며 정부, 국회의 활동을 지도하는 최고의 권력기관이다. 그런데 베트남 공산당은 집단지도 체제의 만장일치 원칙에 따라 정책을 결정한다. 최고 통치기구인 공산당 정치국의 경우 18명으로 구성된 정치국 위원들이 모든 정책을 논의한다. 또 공산당 서기장, 국가주석, 총리가 권력을 분점하고 있다. 서기장이 최고 실권자이지만, 국가주석은 군사와 외교를 담당하고, 총리는 정치와 경제 전반을 관장한다. 게다가 서기장은 당 중앙위원들이 참여하는 경선으로 선출한다. 베트남에도 당 간부와 관료들의 부패가 심각하고 일부 반체제 세력이 있지만, 공산당 정권이 지금까지 통치해온 것은 당내의 민주주의 원리에 따른 정통성과 권력분점 및 쇄신능력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호 전 주석과 관련해서 우리가 주목할 만한 일화도 있다. 북한 정권에서 제2인자였던 박헌영 부수상 겸 외무상과 교분을 맺었다는 사실이다. 박헌영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공산당 창립에 참가했고 광복 후 결성된 남조선노동당의 당수로 활동해온 공산주의자이다. 1948년 9월 남조선노동당 당수의 자격으로 월북한 박헌영은 1950년 4월 남·북 노동당이 합쳐 조선노동당을 출범시키자 부위원장으로서 위원장인 김일성에 이어 북한 정권에서 두 번째 지도자가 됐다. 호 전 주석과 박헌영이 만난 것은 1929년 코민테른이 제3세계 사회주의혁명운동가들을 위해 모스크바에 세운 국제레닌학교를 다닐 때였다. 제3인터내셔널로도 불리는 코민테른은 레닌의 발기에 의해 창설된 마르크스-레닌주의당의 국제적 조직체였다. 당시 호 전 주석은 박헌영, 김단야, 주세죽(박헌영의 부인) 등과 함께 공부했다. 두 사람은 제국주의의 침탈에 신음하고 있는 자신들의 식민지 조국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누었고 우의를 다졌다.

코민테른의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의 학생들. 맨 아래 왼쪽 세 번째가 박헌영, 맨 위 오른쪽 첫 번째가 호찌민이다.
코민테른의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의 학생들. 맨 아래 왼쪽 세 번째가 박헌영, 맨 위 오른쪽 첫 번째가 호찌민이다.

박헌영과 함께 유학한 호찌민

이런 인연 덕분에 북한은 소련·중국에 이어 베트남과 세 번째 국교를 수립한 국가가 됐다. 호 전 주석은 1950년 1월 14일 북한과 외교관계 수립을 원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은 당시 리주연 중국 주재 북한대사를 통해 박헌영 외무상에게 전달됐다. 북한은 같은해 1월 31일 외교관계를 수립한다는 내각의 결정을 베트남에 통보함으로써 두 나라는 정식으로 수교했다. 북한은 그해 8월 베트남의 반프랑스 투쟁을 지지했고, 베트남은 1952년 7월 ‘조선전쟁 기념대회’를 열어 한반도에서 외국 군대의 철수를 결의했다. 호 전 주석은 박헌영이 1955년 12월 미국의 간첩이라는 이유로 처형됐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랐다고 한다. 당시 김일성은 6·25전쟁 패배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박헌영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박헌영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북한과 베트남의 우호관계는 호 전 주석의 1957년 7월과 1961년 6월 평양 방문, 김일성의 1958년 11월과 1964년 10월 하노이 방문으로 더욱 강화됐다. 특히 북한 정권은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4년부터 1969년까지 북베트남에 무기 10만정과 군복 100만벌을 제공하고, ‘지원군’이란 이름으로 전투 병력인 공군 조종사와 정비사 200여명, 공병부대 등을 파견했다. 북한 공군이 베트남전에서 치른 전투로서는 1967년 5월 20일 하노이에서 펼쳐진 공중전이 유명하다. 당시 미군 전투기 32대가 하노이 상공으로 날아오자 북한 공군은 전투기 8대를 출격시켰다. 북한 공군은 이 공중전에서 미군 전투기 12대를 격추하는 전과를 올렸다고 한다. 지난해 9월 9일 북한 정권 수립 70주년 기념 열병식에서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던 공군 부대가 사상 처음으로 김일성광장을 행진하기도 했다. 베트남에 파병된 북한 조종사들은 황해도 황주 주둔 203비행연대 소속이었다. 당시 김일성은 “하노이 상공을 평양 하늘처럼 사수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이처럼 피로 맺어진 북한과 베트남 관계는 1978년 12월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으로 소원해졌다. 북한은 “무력침공은 국제법 위반임과 동시에 사회주의에 대한 배신”이라고 비난했다. 김일성은 베트남군에 의해 쫓겨난 노로돔 시아누크 캄보디아 국왕을 평양으로 데려와 1991년 귀국할 때까지 돌봤다. 1979년 2월 중국이 베트남을 침공했을 때에도 북한은 중국 편에 섰다. 특히 베트남이 1992년 한국과 수교하자 북한은 베트남을 ‘배신자’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이후 농둑만 서기장이 2007년 10월 16일 평양을 공식 방문해 김정일과 정상회담을 가지면서 북한과 베트남의 관계는 어느 정도 복원됐다.

베트남 모델은 북 세습 체제에 독약 될 수도

김정은의 베트남 방문은 물론 제2차 미·북 정상회담 때문이지만 할아버지인 김일성 때의 ‘혈맹’ 관계를 복원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특히 김정은이 ‘베트남 모델’이라고 불리는 도이머이 정책을 통한 경제발전 상황을 직접 확인한다는 점에서 주목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북한 정권이 베트남 모델을 추진할 수 있을까. 체제유지와 경제발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김정은으로선 공산당이 개혁개방을 주도하는 베트남 모델을 선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베트남 모델의 핵심은 호 전 주석의 유훈을 철저하게 이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김정은이 추진할 가능성은 낮다. 미국 외교 전문지 포린폴리시는 “전혀 불가능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북한 정권의 베트남 모델 도입은 수령 유일주의라는 김정은 체제의 사망을 불러올 수 있는 주술(呪術)이 될 수도 있다”고 진단했다. 북한 정권은 지금까지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대 세습독재 체제로 유지돼왔다. 북한 정권은 전제주의 왕조라고 말할 수 있는 1인 독재 체제를 절대로 포기할 수가 없다. 게다가 김정은이 전임자인 김일성과 김정일을 비판하면서 개혁을 추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김정은의 정통성은 오로지 김일성과 김정일을 승계한 데에서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호 전 주석의 유훈은 북한 정권에 절대로 통할 수가 없다. 도이머이 정책은 북한의 3대 세습독재 체제를 붕괴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호 전 주석과는 달리 김씨 3대 독재자들은 그동안 북한 주민들의 고혈(膏血)을 짜내면서 각종 우상화와 사치 등을 통해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고 호의호식(好衣好食)해왔다. 김정은은 자신의 고모부인 장성택을 처형했고 이복형인 김정남을 독살하는 등 수많은 당·정·군 간부들을 숙청해왔다. 북한 정권은 지금도 체제유지를 위해 정치범수용소에 20만여명을 감금하고 있다. 이들은 목숨만 유지한 채 가혹한 고문과 노동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다. 북한 정권은 그동안 핵개발을 위해 주민 수백만 명이 기아로 숨져가는 것을 외면해왔다. 아무튼 김정은은 이제 김일성 ‘흉내 내기’는 그만하고 핵무기를 과감하게 포기, 호 전 주석의 유훈을 조금이라도 배워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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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훈 국제문제애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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