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울진의 신한울원전 3·4호기 건설 예정지. 신한울 1·2호기는 올해와 내년 말 완공 예정이다. ⓒphoto 이진한 조선일보 기자
경북 울진의 신한울원전 3·4호기 건설 예정지. 신한울 1·2호기는 올해와 내년 말 완공 예정이다. ⓒphoto 이진한 조선일보 기자

자유한국당이 최근 강원도 고성·속초·강릉 지역에 발생한 대형 산불의 원인으로 ‘탈원전 정책’을 지목하면서 정부·여당과 충돌했다. 지난 4월 8일 나경원 한국당 원내대표는 “개폐기가 잘못됐다든지 실외기 연결선이 단선됐다든지 여러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한국전력공사의 관리 소홀 문제가 당연히 제기될 수 있다”면서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인해 실질적으로 한전의 어려움이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은 즉각 반발했다. 민주당은 논평을 내 “한전 적자는 탈원전 때문이 아니라 국제연료가격 급등 때문이고 작년 한전의 배전 설비 교체 투자액이 줄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2015년부터 3년간 집중 투자해서 교체를 마쳤기 때문이지 탈원전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반박했다. 정부도 발맞춰 해명을 내놓았다. 산업통상자원부는 4월 9일 아침에만 4건의 해명자료를 쏟아내면서 논란을 적극 수습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언뜻 보기에 산불의 원인을 탈원전 정책 탓으로 돌리는 한국당의 주장은 황당해 보인다. “산불까지 탈원전 탓이냐” “기-승-전-탈원전”이라는 반박이 힘을 얻는다. 반면 “한전 적자는 탈원전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답한 민주당의 반론도 핵심을 찌르는 것은 아니다. 이 공방에서 과연 무엇이 핵심일까.

중요한 건 이번 대형 산불이 탈원전 정책 때문에 일어났냐 아니냐가 아니다. 여야가 왜 사사건건 탈원전을 둘러싸고 강대강으로 충돌하느냐가 어찌 보면 더 중요할 수 있다. 상당수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문재인 정부의 가장 약한 고리로 꼽히는 정책이 탈원전”이라는 지적을 한다. 다시 말해 탈원전은 정부·여당도 야당도 물러날 수가 없는 전장(戰場)이고, 여기서 밀리느냐 여부가 앞으로의 국정동력을 좌우한다는 설명이다.

“정부 여당의 가장 약한 고리가 탈원전이다”

탈원전은 최저임금, 탄력근로제 등 여러 분야에서 파열음을 내고 있는 문재인 정부의 정책 중에서도 특히 강한 저항을 받아온 정책이다. 야당은 왜 탈원전 정책을 겨냥할까. 이에 대한 실마리는 반대로 여권의 핵심 인물인 김경수 경남도지사의 발언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도지사 당선 전인 2017년 8월 문재인 정부 출범 100일을 맞아 행한 ‘시사인’과의 인터뷰에서 ‘가장 어려웠던 정책’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원전 문제’를 꼽으며 “기존 기득권 세력-보수정치 세력-보수언론 이렇게 연합이 형성될 때 저항이 가장 세다”고 말했다.

김 지사는 봉하마을로 내려온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마지막까지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인사이자 문재인 대통령이 야인이었을 때부터 지근거리에서 수행한 복심(腹心)이다. 문 대통령의 취임 100일 때의 인터뷰였고,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가장 잘 이해하는 이가 말한 내용이라는 점에서 정부·여당이 탈원전 정책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간접적으로나마 읽을 수 있다. 반대로 말하면 한국당 입장에서는 정부·여당의 가장 ‘약한 고리’가 탈원전 정책이라는 설명이 힘을 얻는다.

탈원전 정책은 이미 문재인 정부 초반에 위기를 겪은 적이 있다. 2017년 7월 정부는 건설 중이던 신고리 5·6호기 공사를 중단시킨 후 재개와 중단 여부를 공론화위원회의 결정에 맡겼다. 석 달간의 토론 끝에 공론화위는 건설 재개를 권고했고, 정부는 권고안을 받아들여 공사를 재개했다. 당시 정부는 “공론화위가 신고리 5·6호기에 대해서는 건설 재개를 권고했지만 점진적으로 원전을 줄이자는 권고안을 함께 냈다”며 탈원전 정책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이제 탈원전 정책을 단순한 전력 정책으로 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 탈원전 정책은 매년 국정감사 때마다 단골 소재로 등장하지만 청와대는 탈원전 정책에서 한 치도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지난 4월 8일 문재인 대통령은 성윤모 산업부 장관에게 직접 “미세먼지 발생 등 논란에 대해 산업부가 적극 해명하라”며 소셜미디어 등 뉴미디어를 통한 홍보를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미세먼지 발생이 탈원전으로 인한 화력발전 증가 때문이라는 세간의 비판에 적극 대응하라는 취지로 읽혔다.

지금 청와대의 주축을 이루는 문 대통령의 조직은 캠프 시절부터 소셜미디어와 뉴미디어 소통에 특히 강점을 보여왔다. 지난해 황수경 전 통계청장이 급작스럽게 경질됐을 때 청와대가 “통계 왜곡 주장에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았다”는 것을 경질 사유로 든 만큼 대통령의 소셜미디어를 통한 ‘가짜뉴스’ 대응 강화 지시는 성 장관에게도 무겁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익명을 요구한 에너지 분야의 한 교수는 “신한울 3·4호기 건설 재개 주장을 대하는 청와대의 기조는 전례 없이 완강하다”며 “여기서 밀리면 탈원전 정책 자체가 밀린다고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반면 야당은 원자력 분야 전문가들과 함께 공세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공세의 핵심에 자리 잡은 이슈가 신한울 3·4호기 건설 재개 여부다. 지난 1월 말 신한울 3·4호기 건설 재개를 요청하는 국민 청원 숫자가 33만명에 도달해 ‘탈원전 반대와 신한울 3·4호기 건설 재개를 요구하는 범국민 서명운동 본부’가 청와대에 청원 서한을 전달하기도 했다. 탈원전 정책 반대 범국민 서명운동 공동추진위원장을 맡은 최연혜 한국당 의원실에 따르면, 이 청원에 대한 응답으로 청와대는 “3월 임시국회시 소관상임위 등을 통해서 충분히 답변드릴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되며 향후 에너지 전환 정책과 관련된 사항은 소관부처인 산업부로 문의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내왔다고 한다.

탈원전은 현 정부 최대 실정으로 꼽히는 민생·경제와도 맞물려 있다. 원전이 대부분 경상도에 있다는 점은 이 지역 표심에 큰 영향을 미친다. 탈원전은 여야가 박빙이었던 4·3재보선 창원·성산 지역구에서 특히 화두였다. 실제로 한국당 강기윤 후보에 약 500표 차로 신승한 여영국 정의당 의원은 에너지전환(탈원전) 정책에 찬성하는 중앙당의 기조와 달리 “두산중공업의 어려움에 따른 협력업체 위기, 지역 조선산업, 한국지엠의 창원 투자 축소 움직임 등 여러 면에서 성산구가 산업위기대응 특별지역으로 지정될 조건이 된다고 본다”며 “정부에 강력하게 지정을 건의하겠다”고 했다.

앞서 국내 유일 원전 주 기기(원자로·증기발생기·터빈발전기) 생산업체인 두산중공업 직원들은 지난 3월 말 4·3 재보선을 앞두고 상경해 집회를 열기도 했다. 두산중공업은 탈원전 정책이 시작된 2017년부터 직원 수백 명을 줄이거나 다른 계열사로 보내고 과장급 이상 전원을 대상으로 유급휴직을 시행하는 등 구조조정을 해왔다. 경남에 있는 280여개 중소 원전 협력업체도 일감부족으로 고사 위기에 처해 있다.

균열 징후 보이는 ‘탈원전 스크럼’

2015년 건설이 확정된 신한울 3·4호기는 2017년 말 제8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 빠지면서 건설이 중단됐다. 당시 영덕의 천지 1·2호기, 삼척의 대진 1·2호기 등 신한울 3·4호기보다 추진이 늦었던 원전들은 건설 계획이 아예 백지화됐다.

신한울 3·4호기는 정부의 실시계획 승인 심사만 중단됐을 뿐 백지화되지 않은 상태여서 소생 가능성이 아직 제로가 아니다. 두산중공업과 한수원이 주장하는 사업 종결 보상액의 규모가 1700억원가량 차이가 나고, 최대 8000억원으로 추정되는 매몰 비용을 모두 국민 세금으로 메워야 하기 때문에 정부로서도 백지화에 따른 부담이 크다. 현재 신한울 3·4호기의 공정률은 10% 내외다. 최근까지 한수원 노조 한울본부전위원장을 맡은 남건호 위원장은 “신한울 3·4호기가 들어설 부지의 토양 평탄화 작업이 끝났고 지질 조사를 마친 상태”라고 했다.

반면 “신한울 3·4호기 건설을 재개해선 안 된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3·4호기가 지어진다면 한울원자력본부에는 원자로 10기가 한곳에 몰린다. 양이원영 에너지전환포럼 사무처장은 지난 2월 김삼화 바른미래당 의원이 주최한 토론회에서 “신한울 3·4호기 공론화 거론은 기업의 도덕적 해이를 옹호하는 것에 불과하다”며 “두산중공업이 수출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한국의 기간산업으로서 세계적인 시장 변화에 더디게 대응한 것이 문제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일견 견고한 듯 보이는 청와대와 여권의 ‘탈원전 스크럼’은 올해 들어 균열 징후를 보이고 있다. 민주당 송영길 의원은 지난 1월 원자력계 신년인사회에서 “오래된 원자력과 화력을 중단하고, 대신 신한울 3·4호기와 스와프(교환)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 아이디어를 즉시 일축했지만, 송 의원은 이후에도 비슷한 발언을 이어갔다.

같은 달 국책연구기관인 에너지경제연구원의 조용성 원장도 기자간담회에서 “에너지 전환은 기본적으로 가야 하는 길이지만 원전 건설 여부는 톱다운 방식으로 갈 게 아니라 전문가들이 터놓고 이야기해야 하며 정책이 급진적으로 갈지 점진적으로 갈지도 시장이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원전 수출도 변수로 꼽힌다. 현재 미국은 총 16기의 원전을 조성할 예정인 중동 최대 규모의 사우디 원전 사업에 참가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1970년대 스리마일섬(TMI) 원전 사고 이후 원전 서플라이 체인이 망가지면서 단독으로 원전 수출을 수주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경쟁자가 중국과 러시아인 만큼, 미국이 원자로 수출 동맹을 맺을 상대는 한국이 유일하다는 관측이 나온다. 원전 수출업계의 한 관계자는 “사우디 원전에 미국이 들어가면서 한국에 함께 들어가자고 요청한다면 거절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명분만 있다면 신한울 3·4호기 건설은 재개될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아직까지 탈원전 정책을 바라보는 청와대와 정부의 태도는 완강하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국정지지도 40% 선을 아직 지키고 있고, 임기도 갓 2년을 넘은 만큼 국정동력이 심각하게 분산될 탈원전 정책의 전면 수정을 고려할 여지가 별로 없어 보인다. 하지만 앞으로는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가장 큰 변수는 내년 총선이다.

특히 원전들이 밀집해 있는 PK(부산·경남)에서 탈원전에 반대하는 시민단체들을 중심으로 탈원전 정책 중단 서명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4·3 재보궐선거에서 한 석도 얻지 못한 민주당으로서는 총선 최대 격전지로 꼽히는 PK지역의 표심을 잡기 위해서라도 탈원전 정책의 지속성 여부를 심각하게 따져봐야 할 상황이다. 원자력 업계 한 관계자는 전화통화에서 “정부도 3년 차에 접어들었고 앞으로 레임덕이 심해지면 민주당 의원들의 탈원전 정책 이탈이 심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배용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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