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4월 15일 청와대 여민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4월 15일 청와대 여민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 2월 27일 베트남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이 결렬된 직후 열린 국가안전보장(NSC)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조명균 통일부 장관에게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사업의 재개 방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조 장관은 지난해 11월 미국 뉴욕의 동포 간담회에서 “지금 상황에서 남북경협은 불가능하다”고 발언한 바 있다. 결국 조명균은 남북경협 추진의지로 충만한 김연철로 교체되었고, 문 대통령은 여론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김연철 임명을 강행한 후 워싱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4월 11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지금은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재개의 적기가 아니라고 못을 박았다.

도대체 이 정권은 왜 이리도 남북경협에 집착하는 것일까. 통일부의 설명처럼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이 비핵화에 기여한다고 믿기 때문일까.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대북정책을 둘러싼 논쟁은 비핵화와 남북경협을 연계시킬 것인가 아니면 별도로 진행할 것인가 하는 연계론과 병행론의 대립이었다. 이 논쟁에 마침표를 찍은 것은 북한 정권이었다. 연이은 핵·미사일 실험으로 유엔 제재가 강화되자 병행론은 자취를 감추었다. 문재인 정권은 이처럼 연계론이 당연시되는 환경에서 출범하였다. 그러나 잠복해 있던 병행론 유전자는 기회만 되면 튀어나오려 한다.

병행론자들이 철석같이 믿는 금과옥조(金科玉條)가 있다. 남북경협은 북한의 개혁개방을 촉진한다는 것이다. 이 명제에 대해서는 보수 쪽에서도 별다른 시비를 걸지 않는다. 비핵화의 진전 정도에 따라 남북경협이 추진되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아두는 정도다. 정말 그런 것일까. 안타깝게도 이제까지 확인된 것은 그 반대다. 남북경협은 북한의 개혁개방을 오히려 방해한다.

주지하듯이 북한은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추구한다. 이 메커니즘은 계획생산에서 시작하여 식량배급제와 국영상점 생필품 공급이라는 분배를 통해 완결된다. 그런데 1990년대 초 소련의 해체와 중국의 시장경제 전환으로 ‘사회주의 우호무역’이 소멸하자 북한 경제는 커다란 시련에 직면하였다. 일정 기간이 지난 후 수출입의 차액만을 지급하는 청산결제 방식은 북한 경제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많은 경우 지불유예와 채무 탕감이 이루어져 무역거래는 사실상의 원조로 귀결되었다. 그러던 것이 건건이 경화(hard currency) 결제를 하는 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결과는 재앙적 수준의 식량 및 에너지 부족으로 인한 경제파탄이었다. 1990년대 중반의 고난의행군 캠페인은 이런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난의행군 캠페인은 한마디로 자력갱생 캠페인이었다. 1998년 1월 전국자력갱생모범일꾼대회가 최초로 열려 23명의 참가자에게 ‘로력영웅 칭호’와 함께 금메달과 훈장이 수여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모범 사례로 소개된 공장들의 실적이었다. 고원양말공장은 양말 생산뿐만 아니라 중소형 발전소 건설, 석탄 생산, 고기잡이 기관선 운영, 미네랄워터 생산, 염소 사육, 옥수수·감자·콩 재배 등을 하였고, 평양정미공장은 본업 이외에 버섯 재배, 양어장 운영, 돼지 사육, 비누·신발·고무망·피대 생산에서 성과를 내었다고 소개했다. 한마디로 먹고사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알아서 해결하라는 것이 자력갱생 캠페인의 요체였다. 물자부족으로 원자재 공급이 불가능하게 되자 산업연관과 분업구조가 붕괴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장마당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확산된 것은 이 같은 경제 현실이 빚어낸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중국과 베트남의 경우 당국이 개혁개방에 대한 뚜렷한 비전과 의지를 가지고 현실을 선도해간 반면, 북한 당국은 계획경제의 붕괴로 장마당이 급속히 확산되어 가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묵인하였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남북경협은 바로 이러한 정세에서 실행되었다. 그렇다면 남북경협은 햇볕론자들의 의도대로 북한의 개혁개방을 촉진시켰을까. 이와 관련 북한 상업관리소장 출신 문대현씨가 TV조선의 탈북자 토크쇼 ‘모란봉클럽’ 177회(지난 3월 3일 방영)에서 한 발언은 ‘불편한 진실’을 보여준다. 상업관리소는 국영상점에 물품을 공급하고 관리하는 기관인데, 햇볕정책이 시행되던 시절에는 물자가 풍부했다는 것이다. 요컨대 남북경협은 중단된 식량배급제를 재가동시키고 국영상점 운영을 정상화해 마비되었던 계획경제를 복원시킨 것이다. 또한 장마당에 대한 단속을 강화해 시장화의 진전에 제동을 거는 데도 일조하였다. 노무현 정권 시절 NSC 정보관리실장을 역임한 김정봉 교수도 ‘TV조선 뉴스현장’(지난 3월 16일 방영)에서 같은 취지의 발언을 하였다.

지난 4월 10일 열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김정은은 자력갱생을 무려 25차례나 언급하며 생명선이라고 강조하였다. 12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는 “장기간의 핵 위협을 핵으로 종식시킨 것처럼 적대세력들의 제재 돌풍은 자립·자력의 열풍으로 쓸어버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는 제2차 고난의행군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하노이 담판에서 기대했던 제재 완화가 어렵게 되자 나온 고육지책이다. 박봉주를 대신하여 내각총리에 강계 출신의 김재룡 자강도 당위원회 위원장을 기용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김정일은 고난의행군 과정에서 가장 모범을 보인 지역으로 강계를 꼽았고, 선전매체를 통해 강계정신을 강조했다, 노동신문은 지난 3월 21일 물과 공기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다는 강인한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제2차 고난의행군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 자명하다. 결국 장마당을 중심으로 한 시장기능은 더욱 확산될 것이고, 이 과정에서 제1차 고난의행군의 산물인 ‘돈주’들의 영향력은 더욱 커질 것이다. 돈주들은 권력층과 특수관계를 맺는다. 당이나 군의 간부들이 돈주들의 뒷배를 봐주고, 돈주들은 이익의 일부를 상납하는 북한판 정경유착이다. 북한 정권은 부족한 재원을 벌충하기 위한 수단으로 종종 돈주들의 자금력을 동원하기도 한다. 평양의 대형 워터파크인 문수물놀이장 건설에 돈주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데 권력과 돈주들의 관계가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권력에 미운털이 박힌 돈주는 한 방에 훅 간다. 권력은 이런 식으로 시장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한다. 제2차 고난의행군은 권력과 돈주 간의 강도 높은 긴장 및 갈등을 예고한다. 부족한 재원을 벌충하기 위하여 돈주들을 더욱 쥐어짤 것이기 때문이다. 돈주들의 불만은 다양한 형태로 표출될 것이다. 향후 북한 정세는 노동당과 장마당, 두 당 간의 대립갈등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에 크게 영향받을 것이다.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은 북한 정권의 소중한 외화 획득원이다. 두 사업이 재개되면 개성공단 근로자 임금 110달러와 금강산 입장료 59.5달러는 고스란히 김정은의 금고로 들어간다. 이 돈은 식량배급과 국영상점을 정상화하는 데 쓰일 수 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남북경협인가.

신지호 평론가·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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