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육군 7사단에서 경계근무를 서고 있는 현역 복무 시절의 조양호 회장. ⓒphoto 한진그룹
1970년대 육군 7사단에서 경계근무를 서고 있는 현역 복무 시절의 조양호 회장. ⓒphoto 한진그룹

“한국 방위산업은 이대로 가면 망합니다!”

2010년 10월 고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을 처음으로 인터뷰했을 때 그는 목소리를 높여 이렇게 말했다. 당시 조 회장의 방산 실태에 대한 심각한 우려와 강도 높은 방산정책 비판에 당황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조 회장은 방위산업진흥회장(방진회장) 자격으로 언론과의 첫 인터뷰를 필자와 했다. 그는 국내 방산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물량 부족’을 꼽았다. 조 회장은 “정부가 최소한 생산라인을 유지할 정도의 물량은 줘야 하는데 이게 안 되기 때문에 업체 입장에서는 생산원가가 올라가는 문제가 있다”며 “방산업체들에 대한 정부 지원을 특혜로 봐서는 곤란하다”고 했다.

조 회장과는 그 뒤 2012년 8월, 지난해 3월 등 두 차례 더 인터뷰할 기회를 가졌다. 언론 인터뷰를 꺼려온 조 회장으로선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한진그룹 관계자는 “회장님을 세 번 공식 인터뷰한 언론인은 유 기자가 유일하다”고 전했다.

조 회장의 측근들은 그가 매니아 수준으로 항공·무기 분야에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졌던 것이 이례적인 인터뷰에 영향을 끼친 것 같다고 전했다. 2010년 첫 인터뷰 때 조 회장은 “유 기자 웹사이트(유용원의 군사세계)를 잘 보고 있다”며 사이트에서 활동하고 있는 매니아 고수회원의 필명까지 언급했다. 실제 사이트를 지속적으로 들여다보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얘기였다. 지난해 3월 마지막 인터뷰 때 조 회장은 마주 앉자마자 “유 기자가 출연하는 ‘본게임’을 잘 보고 있다”고 했다. 본게임은 국방TV에서 하고 있는 프로그램이어서 무기·군사 매니아가 아니면 잘 보지 않는다. 조 회장은 직접 이 방송을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언급을 했다.

세 차례의 인터뷰 도중 조 회장의 항공·무기에 대한 매니아적 수준의 열정에 놀란 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 미국 유명 테크노스릴러 작가인 톰 클랜시의 ‘붉은 10월’ 등 무기와 신기술을 다룬 책들을 방위산업진흥회(방진회)에서 번역해낸 것도 조 회장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조 회장은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위원장 등 대외 활동을 많이 했지만 방진회장으로 방산 육성에 기여해온 것에 큰 자부심과 보람을 느꼈었다고 한다. 지난해 3월 인터뷰도 방진회장에서 물러나기 직전에 한 것이었다. 그는 2004년부터 14년간 방진회장을 맡았다. 그가 방진회장을 맡는 동안 한국 방산은 크게 성장했다. 2004년 4조6440억원이던 국내 방산 매출액은 2016년 14조8163억원으로 3배 넘게 늘었다. 같은 기간 방산 수출액은 4억달러에서 32억달러로 8배 증가했다. 171개이던 회원사 수는 2017년 643개사가 됐다.

당시 인터뷰에서 조 회장은 “지난 14년간 방위산업으로 나라에 이바지한다는 ‘방산보국(防産報國)’의 가치를 내외부에 알리는 데 주력했다”며 “방산기업들이 국가에 기여한다는 자부심을 갖도록 노력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이를 위해 방산업체가 생존할 수 있는 환경, 즉 생산물량이 지속적으로 보장될 수 있도록 정부 정책을 개선하는 데 힘을 쏟았다”며 “방위산업을 둘러싼 환경이 급변하는 지금 새로운 인물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물러나기로 마음먹었다”고 퇴임의 변을 밝혔다.

당시 인터뷰 때도 조 회장은 우리 방산의 문제점을 강도 높게 지적하며 개선 방향을 제시했다. 그는 “우리 군에선 무기의 요구수준(ROC)을 너무 높게 잡는데 이는 어린이에게 자동차 운전을 요구하는 격”이라고 지적했다. 세계 최강 무기를 만드는 미국도 M-1전차 등 기존 무기체계를 계속 개량하는 ‘진화적 개발’ 방식을 적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 회장은 “국산화도 중요하지만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고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며 “미국 보잉사 여객기도 엔진 등은 다른 회사가 만든 것을 사용하듯 체계통합 능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가 언급한 ‘진화적 개발’의 도입 필요성은 군 안팎에서 공감대가 형성돼 현재 방위사업청 등에서도 정책으로 추진하고 있다.

생전 역점사업이었던 500MD헬기를 개량한 ‘리틀 버드’ 앞에서 포즈를 취한 조양호 회장. ⓒphoto 한진그룹
생전 역점사업이었던 500MD헬기를 개량한 ‘리틀 버드’ 앞에서 포즈를 취한 조양호 회장. ⓒphoto 한진그룹

조 회장은 방산비리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드러난 방산비리는 대부분 해외 무기 중개상의 비리였다”며 “개발 과정에서 흔히 생길 수 있는 하자나 시행착오도 비리로 매도된 경우가 많아 안타깝다”고 했다.

조 회장은 미래 항공무기의 주류가 유인기가 아니라 무인기가 될 것으로 보고 대한항공 방산부문에 다양한 무인기 개발을 독려하기도 했다. 사단급 무인기, 수직이착륙이 가능한 틸트로터형 무인기, 중고도 무인기, 500MD 무인헬기 등이 그가 관심을 쏟았던 무인기들이다. 특히 육군에서 운용 중인 기존 500MD 헬기를 무인화한 500MD 무인헬기 개발을 적극 추진했다.

그는 자주국방도 중요하지만 무조건적인 무기 국산화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도 강조하곤 했다. 2010년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일부에서는 ‘자주국방’ 이야기들을 하는데, 이때까지 전 세계에서 독자적으로 비용이라는 개념 없이 방산물품을 생산한 게 한국과 이스라엘, 스웨덴,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도밖에 안 된다. 우리는 박정희 대통령 때부터 자주국방을 외쳤고, 이스라엘은 정치적 목적으로, 스웨덴은 중립국가라는 특수성 때문에 독자 개발을 했다. 남아공은 인종차별로 인한 국제적 고립 때문에 독자개발을 하게 됐다. 하지만 스웨덴이나 남아공은 냉전이 끝나고 인종분쟁이 잦아들면서 이 개념이 약화됐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가 모든 걸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이게 문제다. 공동 개발, 공동 생산, 공동 판매 체제로 가야 한다.”

KAI(한국항공우주산업) 인수는 조 회장의 오랜 숙원사업이었지만 이루지 못한 일 중의 하나로 꼽힌다. 그는 2012년 인터뷰에서 “비행기를 직접 만들어본 경험이 있는 KAI의 엔지니어와 기능 인력에 강한 매력을 느낀다”고 하는 등 여러 차례 인수의사를 밝혔었다.

조 회장은 1970년대 초반 최전방 지역과 베트남에서 36개월간 현역 복무를 한 데 대해서도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1970년 미국 유학 중 귀국해 군에 입대한 뒤 수많은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는 강원도 화천 육군 7사단 수색중대에서 복무했다.

베트남에도 파병돼 11개월 동안 퀴논에서 근무한 뒤 다시 수색중대로 돌아가 1973년 7월까지 총 36개월간 복무 후 육군 병장으로 전역했다. 조 회장은 “당시 겨울에 엄청나게 쌓인 눈을 치우는 게 너무 힘들었던 기억이 생생해 눈 치우는 기계(7대)를 전방부대에 기증했다”고 했다.

그는 수년 전부터 6·25전쟁을 다룬 책을 읽는 데에도 푹 빠져 있었다고 한다. 뉴욕타임스 기자가 쓴 ‘가장 추운 겨울(The Coldest Winter)’을 읽은 뒤 6·25전쟁 격전장의 하나였던 지평리전투 기념관을 방문했다가 시설이 낡은 것을 보고 리모델링을 위한 모금사업도 벌였다.

방진회의 한 전직 간부는 “조 회장님이 방진회장으로 재임한 14년간 우리 방산업계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여줬다”며 “이는 눈앞의 이익이 아니라 회장님의 국가 전체의 안보를 위한 사명감이 깔려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유용원 조선일보 논설위원·군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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