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정부의 대통령 외교안보수석과 주중 한국대사를 지낸 정종욱(79) 전 서울대 교수가 회고록을 냈다. 제목은 ‘정종욱 외교비록’. 본인은 서문에서 “기록의 기본 자료는 핵 문제에 관해서는 내가 청와대를 떠나면서 가지고 나온 여러 권의 노트”라고 밝혔다.

“내가 북한이 NPT 탈퇴를 발표했다는 메시지를 받은 시점은 대통령이 (옥포조선소에서 있었던 최초의 국산 잠수함 최무선호의) 진수식을 마치고 조선소 구내의 오찬장으로 걸어가던 도중이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1993년 3월 12일 북한이 NPT(핵확산금지조약) 탈퇴를 발표할 당시 청와대 상황실장이 보낸 메모를 본 후 대통령 옆으로 다가가서 “북한이 NPT를 탈퇴했습니다”라고 알렸다. 그때 대통령 옆얼굴을 쳐다봤는데 “표정이 굳어지면서 긴장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대통령은 잠시 생각한 뒤 국무회의와 국가안전보장회의 소집을 지시했고, 수행 중인 국방장관에게 “군 비상경계령 발동을 검토하라”는 지시도 내렸다.

그렇게 시작한 북한 핵 문제는 1년 남짓 흐른 1994년 5월 18일 윌리엄 페리(Perry) 미 국방장관이 펜타곤(국방부)에서 미국의 거의 모든 4성급 지휘관들이 참여하는 주요 지휘관 회의를 개최하는 상황으로 발전한다. 미 합참의장과 한·미 연합군 사령관을 포함, 한국에서 전쟁이 났을 경우 직간접으로 참여하게 될 거의 모든 4성급 미군 지휘관이 참석한 이 회의의 결론 중 하나가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면 90일 이내의 승리가 확실하지만, 미군 5만2000명, 한국군 49만명 정도의 사상자가 나올 것이며, 전쟁 비용은 619억달러 정도가 소요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 결론을 갖고 다음 날인 5월 19일 페리 장관과 합참의장, 한·미 연합군 사령관이 빌 클린턴(Clinton) 대통령을 만났다.

그러나 또 다른 상황 전개가 있었다. 1990년과 1991년, 1992년 3년 동안 김일성이 제40대 미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 있던 지미 카터(Carter) 전 대통령에게 북한 방문 초청장을 보낸 것이다. 북한에 대한 군사적 공격이 성공하더라도 쌍방에서 엄청난 피해가 발생할 것이 불 보듯 뻔한 전쟁을 피해야 한다는 의견이 미국 내에서 제기됐고, 그런 생각은 1994년 당시 제임스 레이니(Laney) 주한 미국대사가 5월 초 애틀랜타의 카터를 방문하는 것으로 현실화됐다. 카터 전 대통령은 레이니 대사의 부탁을 받아들여 6월 14일 한국에 도착해서 김영삼 대통령과 만났다. 당시 김 대통령은 카터 전 대통령의 김일성 면담 계획에 동의를 표했고 북한 핵 문제는 1년3개월 만에 카터 전 대통령의 중재로 김영삼·김일성 남북 정상 간의 회담을 앞두는 급박한 상황 변화로 연결됐다. 하지만 역사는 1994년 7월 25~27일로 예정됐던 남북 정상회담을 보름 앞둔 7월 9일 82세의 김일성이 묘향산에서 돌연 사망함으로써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당시 김정은 현 북한 국무위원장은 불과 11세의 어린이였다.

이 과정에서 중국의 최고권력자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대화와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하며 인내심을 발휘할 것”을 촉구했다. 정종욱 교수의 회고에 따르면 중국 측은 “유암화명(柳暗花明)”이라는 말도 했다. “입구가 버드나무 그늘로 가려진 동굴 속으로 들어가면 처음에는 어둡지만 한참 들어가면 복사꽃이 피어 있는 환한 세상을 보게 될 것”이라는 의미였다. 북한 핵 문제에 대한 중국의 진심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 알기 힘든 중국 특유의 입장 표명이었다.

그런 중국의 진심을 알게 해준 것은 정종욱 외교안보수석이 1996년 1월 주중 한국대사로 자리를 바꾸어 베이징(北京) 현지에 도착한 1년 후인 1997년 2월이었다. 바로 조선노동당 국제부장 황장엽의 베이징 주재 한국대사관 영사부 망명이라는 대사건이 벌어진 때였다.

황장엽의 망명은 중국에는 한마디로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건’이었다. 정종욱 대사는 황 비서가 한국 영사부에 진입한 직후부터 중국 외교부에 “황 비서의 자의 타의 여부를 확인할 면담 편의를 제공할 테니 교섭을 시작하자”고 했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고 한다. 망명 사흘 후인 2월 14일 싱가포르에서 있었던 한·중 외교장관 회담에서도 당시 유종하 장관이 첸치천(錢其琛) 외교부장에게 “황장엽 망명에 대한 외교 교섭을 시작하자”고 제의했지만 “시간을 두고 신중하게 대처하자”는 말뿐이었다.

황장엽 망명 5일 만인 2월 17일 평양방송이 “배신자여, 갈 테면 가라”는 방송을 하고, 이 방송을 하기 전에 북한 외교부가 김정일의 그런 뜻을 중국 외교부에 전했지만, 중국 외교부는 무려 1개월을 더 끌다가 3월 17일에야 황장엽이 제3국인 필리핀을 거쳐 서울로 가는 데 동의했다. 정종욱 비록에 따르면, 중국은 황장엽 비서를 중국에 장기체류시킨 후 사건이 잊힐 때 쯤 조용히 처리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황장엽 망명 당시 중국의 태도

당시 주중 한국대사관이 있던 베이징의 구어마오(國貿)빌딩 5층 엘리베이터 앞 복도는 실탄을 장전한 기관총을 거총한 30~40명의 인민해방군 병사들이 전투태세로 에워싸고 있었고, 황 비서가 있던 한국 영사부 건물은 기관총을 장착한 장갑차들이 경비했다. 정종욱 비록에 따르면 당시 중국 정부는 한국 영사부 인근 한 아프리카 국가 대사관에 “한국 영사부 부근에 저격병들을 배치해서 한국 영사부로 잘못 넘어가면 사살하도록 해놓았으니 주의하라”는 통보까지 해놓았다고 한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2017년 12월 문재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는 자리에서 북한 핵 문제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한반도는 중국이라는 집의 입구(家門口)에 해당한다. 집의 입구에 화재가 나면 집안 연못의 물고기에 재앙이 미친다. 한반도에서는 어떤 전쟁도 어떤 난리도 일어나서는 안 된다.” 결국 관심사는 중국 자신들의 안전뿐이며, 중국의 안전을 해치는 어떤 일도 한반도에서 일어나면 안 된다는 것이 중국의 입장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힌 것이었다. 중국은 2003년 클린턴 미 행정부가 북핵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을 만들어 중국에 의장국을 맡기는 결정까지 했으나 이후 16년이 흐르도록 아무런 결단도 내리지 않은 바 있다. 북한이 김정일에서 김정은으로 바통을 이어가며 핵실험을 하고 사실상 핵무기 보유국이 되도록 방치하는 무책임의 극단을 보여준 것이다.

1차 핵위기를 관리했던 정종욱 전 주중대사는 ‘정종욱 외교비록’의 ‘성찰과 교훈’에서 이런 결론을 내렸다. “1차 위기 때와는 달리 이제 북한은 핵보유국이 되었다. 사실상 전략적 핵보유국가로 등장한 셈이다. 북한이 비핵화를 실천할 것이라는 기대는 1차 핵위기에서 얻은 교훈과 배치되는 희망적 사고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의 우리 정부나,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정부는 이런 생각을 북핵 해결을 위한 전략 선택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박승준 아시아 리스크 모니터 중국전략분석가 전 조선일보 베이징·홍콩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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