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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치
[2568호] 2019.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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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사무라이 협상술 4가지 전략

도쿄= 유민호  퍼시픽21 소장·’일본 내면풍경’ ‘일본 직설’ 저자 Silkroad100@gmail.com

▲ 아베 총리가 지난 5월 일본을 국빈방문한 트럼프 대통령과 도쿄 롯폰기에 있는 로바다야키 카운터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전쟁’ ‘침략’이란 말이 마침내 등장했다. 지난 7월 17일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에서 ‘일본경제침략특위’를 만들었다. 원래 있던 ‘일본경제보복대책특별위원회’란 긴 명칭을 업그레이드한 것이다. 일본의 수출규제를 경제전쟁으로 인식하면서 앞으로 가속화될 일본의 침략에 대해 ‘쫄지 말고’ 적극적으로 대처한다는 것이 특위 설립 취지다.
   
   결연한 중앙의 의지에 발맞춰 지방에서도 항일 결전 채비에 들어가는 듯하다. 부산시가 일본과의 교류를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신문, 방송에서는 5000만명이 죽을 각오로 일본과 싸우자는 식의 칼럼도 볼 수 있다. 대세는 반일 항전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이순신 장군의 12척 배를 강조했고, 이후 지지율도 올라갔다.
   
   글로벌 시대의 상식이지만 세상 모든 것이 상대적이다. 미국조차도 혼자만의 주장을 펴기 어려워진 시대다. ‘세계의 중심이 나’라고 믿고 싶지만 안전하고 확실한 미래를 원한다면 공존과 협치의 자세를 갖추는 것이 좋다. 2019년 한·일 갈등은 그 같은 대세에 반한다. 가장 가까운 나라인 한국과 일본이 서로를 겨누며 비난하고 있다. ‘토착왜구’라 비난할지 모르겠지만 누가 정의의 수호자인지에 대한 논쟁은 잠시 접자. 굳이 필자가 나서지 않는다고 해도 ‘한국=정의, 일본=불의’라 믿거나 믿고 싶은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필자는 다른 말을 하고 싶다. 즉 상대방 일본을 냉철하게 깊게 보자는 것이다. ‘극우 아베의 선거용 퍼포먼스’가 지금 일본이 벌이는 도발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이 배수진 결의를 다지는 동안, 일본은 어떤 준비를 하고 있을까? 어떤 식의 의사결정을 하며, 어떤 타협점을 내다보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까? 선거도 끝난 상태에서 전쟁 가능 헌법 개정의 수단으로서 한국을 더 심하게 공격해올까?
   
   당연하지만 지금과 같은 갈등 상황에서는 ‘누가 얼마나 옳으냐’가 전부는 아니다. ‘대법원 판결에 대한 복수’로서의 수출규제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도 핵심 밖이다. 일본의 복수라 한들 달라질 것도 없다. 우리가 국제기구에 가서 유리한 판결을 받고 일본의 행동을 제약하기까지는 수많은 산을 넘어야 한다. 그나마 결과를 받아드는 것도 지금부터 최소 2년 뒤다. 일단 상황이 벌어진 이상 핵심은 ‘어떻게 목적한 바를 최종적으로 관철할 것인가’로 모아질 수밖에 없다. ‘정의는 우리 편’이란 ‘죽창가’ 차원을 넘어서는 지일(知日)의 전략이 필요하며, 상대방을 제대로 아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얘기다.
   
   한국발 뉴스를 보면 지금 한·일 모두 ‘강대강’ 대응에 나선 듯하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좀 다르다. 단순화시키자면 열혈청년(한국)과 산전수전 다 겪은 60대 CEO(일본)와의 게임이라고나 할까? 너무 비관적으로 본다고 비난할지 모르겠지만 역사에서는 노회한 백전노장을 꺾은 열혈청년의 대역전극도 적지 않다.
   
   
   열혈청년 vs 노회한 CEO의 게임?
   
   ‘한국=열혈청년’이라 규정한 데 비해 ‘일본=산전수전 CEO’에 비유한 근거는 일본이 그동안 구축한 다양한 협상 경험과 경륜 때문이다. 근현대사를 통틀어 외국과의 숱한 갈등을 일본만큼 몸으로 직접 겪은 나라도 드물다. 일본 스스로가 밖으로 나서려고 하다가 숱하게 적들과 부딪혔다. 제2차 세계대전만이 아니다. 멀리는 청일전쟁에서부터 시작해 조선식민지, 제1차 세계대전, 태평양전쟁 이후의 미·일 경제마찰, 최근의 중·일 국경분쟁에 이르기까지 갈등과 전쟁이 일본 근현대사의 궤적이다. 근대화를 늦게 시작해 급속히 선진국에 오르는 과정에서 맞이한 파란만장한 역사였다고 볼 수 있다. 황새 따라간 뱁새의 비극이라고나 할까? 일본의 그 같은 ‘다채로운’ 경험에 비춰볼 때 한국의 근현대사는 아직 순수 열혈청년 수준이라는 얘기다. 한국의 경우, 안에서의 싸움과 투쟁이 숱하게 있었지만 국제적 차원의 담판이나 결전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양의 축적은 결국 질적 변화로 이어진다. 백전노장답게 경험에 따른 교훈을 착실히 쌓아간 나라가 일본이다. 일방적 무용담이 아니라 나와 상대방의 입장을 전부 고려한 입체적 분석이 일본의 장기다. 미국과의 갈등과 불화 끝에 진주만까지 기습 공격했지만 원자폭탄 한 발로 하루 만에 30만명이 사라진 아픔을 겪은 나라가 일본이다. 어제의 비극을 교훈으로 삼아 극단적인 갈등은 피해가면서도 실리를 챙기는 것이 지금의 일본이다. 일본이 자랑하는 ‘사무라이 협상술’은 뼈아픈 교훈 속에서 탄생했다.
   
   한국 입장에서 보면 근현대 일본이 겪은 수난사 가운데 우리가 참고할 만한 것들이 ‘결코’ 적지 않다. 한국을 대하는 아베의 방식을 거꾸로 일본의 산전수전 과거사를 통해 분석 전망해 역대응하는 전략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범위를 확 좁혀 전후 20세기 후반 일본이 겪었던 무역협상으로 한정할 경우 우리가 참고할 만한 두 가지 사례가 눈에 들어온다.
   
   우선은 1970년대 초 벌어졌던 미·일 직물협상이다.
   
   1968년 미국 대통령선거에 나선 공화당 후보 리처드 닉슨은 아시아에 관한 갖가지 공약들을 제시한다. 그 중심에는 베트남 미군철수가 있었고 경제적으로는 일본산 직물수입 제한을 강조했다. 언뜻 보면 21세기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 정책과 비슷하다. 그 덕분인지 닉슨은 대통령에 당선된다. 당시 닉슨의 선거공약을 자세히 이해했다면 1972년 2월 세계를 놀라게 한 ‘베이징 공항에서의 닉슨·저우언라이(周恩來) 악수 장면’도 예상할 수 있었을 듯하다.
   
   당시 미국의 일본산 직물수입 제한은 현재 벌어지는 중국에 대한 무역제재와 비슷하다. 실제 닉슨 당선 후 미국으로부터 전방위 공격이 일본에 가해지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통산성(현재 경제산업성)이 미국의 공세를 막아낼 담당부서였다. 1970년대 미국 신문·방송에 하루도 빠짐없이 등장했던 그 유명한 MITI(통산성의 영어 이니셜)다.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 조치에서 보듯, 총리관저가 아니라 그때도 현장 실무부서가 직접 전선에 나섰다. 당시 통산성 장관은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栄). 나중에 총리에 오른 ‘컴퓨터가 달린 불도저’란 별명의 정치인이다.
   
   
▲ 아베 시대를 맞아 재조명되고 있는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 일대기를 다룬 서적. 그는 1971년 닉슨 대통령 취임 이후 미국이 꺼내든 일본산 직물수출 제한 통상 압력을 당시 통산성 장관으로 성공리에 방어해냈다.

   ‘두 얼굴’의 다나카 협상술
   
   1960년대 직물은 일본의 대미수출 주력 품목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미국인은 ‘일본=1달러 블라우스의 나라’로 이해했다. 저임금에 기초한 싸구려 섬유산업이 일본의 얼굴이었다. 21세기 중국과 비슷한 듯하지만 두 가지 큰 차이가 있었다. 값에 비해 품질이 엄청 뛰어났고, 애프터서비스도 확실했다. 1970년대 접어들면서 일제 자동차와 전자제품이 ‘한순간’ 미국으로 밀려들었는데 1달러 블라우스를 통한 신뢰구축이 ‘메이드 인 재팬’ 열기의 배경에 있을 정도였다.
   
   미국이 직물수출 제재에 나서자 당시 일본도 방어 카드를 꺼내들었는데 결론적으로 2019년의 중국과 달리 일본은 미국의 관세폭탄을 피해가면서 협상을 맺는 데 성공했다. 협상 후 다나카 장관이 보여준 ‘두 얼굴’이 돋보였다는 평가가 나왔다. 자국 기자들 앞에서는 ‘결사반대’ 호언으로 일관했지만 회담장에 들어서는 순간 수출량 자주(自主) 규제안을 미국 측에 제시했다. 미국 측 의향에 맞춰 수출 물량을 알아서 줄일 테니 극단을 피해달라는 양보안이었다. 닉슨의 체면을 세워주고 공격의 날을 피하는 측면 방어전술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나카의 협상술은 지금도 언급된다. 트럼프는 2016년 대통령 당선 직후 중국을 향해 “3500억달러에 달하는 무역흑자에 대한 해결방안을 ‘스스로’ 만들어오라”고 요구했는데 이를 두고 워싱턴에선 ‘반세기 전 일본 모델에 기초한 압력’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중국은 미국 농산물 수입 제재로 맞대응하는 등 일본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어쨌든 일본은 1971년 10월 다나카의 양보에 기초해 미국과 ‘직물수출 제한협정’을 맺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대미 섬유수출이 줄어들면서 일본 업자들의 피해가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다나카가 통산성 관리를 직접 불러 피해자 구제책을 부탁한다. 자기 명함 뒤에다 “(특별구제 예산) 2000억엔을 부탁해요”라는 글을 써서 돌린 것은 유명한 일화다.
   
   당시 직물 협상에서 국내의 피해를 감수하면서도 일본 스스로 ‘알아서 기겠다’며 백기를 흔든 이유는 무엇일까?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미국의 파워가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1970년은 태평양전쟁 당시의 기억이 일본인 머릿속에 남아 있을 때였다. 결국은 미국 의도대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대세였다. 그러나 그 같은 비관적인 상황에서도 ‘국익의 극대화’에 매달린 것이 당시 일본의 정치가들이었다.
   
   일본이 미국과 직물수출 제한협정 타결에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본 정치가들의 기발한 협상전략이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오키나와(沖縄) 반환 문제였다. 닉슨은 대통령선거 당시 베트남 미군철수와 더불어 후방지원을 담당한 오키나와 반환 문제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일본을 위해서가 아니라 필요 없어졌기에 오키나와를 일본에 되돌려준다는 논리였다. 베트남에서 군대를 빼가는 마당에 오키나와에 대한 군사비도 줄이겠다는 것이 진의였다. 그러나 대통령에 당선되면서부터는 입을 다문다. 오키나와의 중요성이 베트남만이 아니라 한국, 러시아 전부에 미친다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닉슨의 침묵을 교묘히 뚫고 들어간다. 결과적으로 직물수출 문제와 오키나와 반환을 맞교환하는 식의 협상에 들어간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은 비밀리에 막후에서 이뤄졌다. 결국 직물수출 자주규제와 1972년 5월 15일 오키나와 반환 문제 타결이 거의 동시에 이뤄졌다.
   
   두 협상의 결과를 보면 경제 면에서는 일본 마이너스, 미국 플러스였지만 안보 면에서는 일본 플러스, 미국 마이너스였다. 결국 승자도 패자도 없는 무승부였다. 미국 입장에서 볼 때 일본산 직물과 오키나와 문제는 닉슨의 공약 실천이란 정치적 측면이 강했다. 이를 간파한 일본은 두 문제 모두 기본적으로 닉슨의 손을 들어주는 식으로 대응했다. 1972년 11월 7일 대통령선거에서 닉슨이 재선될 것이란 가정하에 협상에 임해 일종의 선거용 선물을 준비했다. 표면적으로는 직물수출도 제한하고, 오키나와도 도로 가져갔다.
   
   그러나 직물수출 제한은 문서상의 표현일 뿐 실제로는 이후 매년 늘어나게 된다. 잠시 수출세가 주춤했지만 일본제 저가 섬유제품 확산을 미국이 막아낼 수 없었다. 오키나와 반환의 경우 1945년 8월 이후 미국 식민지로 전락한 섬을 되돌려 받았다는 점에서 일본의 성공이었지만 닉슨도 결코 패자가 아니었다. 재선 캠페인에 뛰어든 닉슨은 원래 공약을 실천했다고 모두에게 자랑했다. 주목할 부분은 오키나와 반환의 ‘진짜’ 의미다. 섬에 대한 국권회복은 이뤄졌지만 섬 내 미군기지에 대한 주권은 미국에 그대로 남겨뒀다. 오키나와 반환은 이뤄졌지만 오키나와 미군기지는 지금도 일본 주권 밖이다.
   
   두 번째 우리가 참고해야 할 모델은 1981년 미·일 자동차협상이다.
   
   일본의 대미 직물수출 자주규제가 시행되던 1970년대 초, 또 다른 미·일 간 무역 불화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바로 자동차다. 일본의 자동차 성장세가 수직상승하면서 자국산업 보호를 위한 미국 측 반격이 시작됐는데 그 유명한 미·일 자동차협상의 막이 열린 것이다. 당시 일본의 대미수출 자동차는 저가의 소형승용차에서 시작됐다. 1960년대 중반부터 수출이 시작됐지만 본격적인 수출은 1970년대부터였다. 워낙 성장세가 빠르다 보니, 1975년 소형승용차의 미국 내 수요의 절반 정도가 일제 자동차로 대체됐다. 제1·2차 석유위기와 더불어 에너지 절감형 일제 자동차에 대한 수요가 중형차, 대형차로도 이어졌다. 노동조합의 위세와 공장 생산성 하락으로 추락세에 접어든 미국 자동차산업과는 대조적으로 일본 자동차산업은 파죽지세의 성장세를 보였다. 마침내 1980년대 일본의 자동차 총 생산대수는 미국보다 더 많은 1000만대 시대에 돌입한다.
   
   
▲ 미국 성조기와 일본의 욱일승천기를 합성해서 만든 깃발이 지난해 5월 일본 자위대와 미 해병대가 함께 쓰고 있는 이와쿠니 기지에서 열린 미·일 우호의 날 행사장에서 펄럭이고 있다. photo 미 해병대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 일본 차의 탄생
   
   당초 미국은 통상법 301조를 통해 일제 자동차를 규제하려 했다. 기억에도 새로운 통상법 301조란, 간단히 말해 미국의 이익에 반하는 상품에 대한 강제적 수입제한조치를 담은 법이다. 당시 일본은 미국의 강력한 대응에 맞서 크게 두 가지 타협점을 제시한다. 스스로 수출규제에 나서고 미국에 자동차공장을 설립하겠다는 약속이다. 당연하지만 수출 자주규제는 백악관과 연방정부가, 미국 노동자의 일자리를 늘려주는 자동차공장 설립안은 미국 지방 정치인과 현지인이 반긴 타협안이었다. ‘메이드 인 재팬’ 자동차의 짝퉁 격인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 일제 자동차가 미국에서 처음 탄생한 것이다. 현재 한국에 수입되는 일제 자동차의 상당수는 미국 공장에서 들여온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 제품으로, 어찌보면 1981년 미·일 자동차협상의 결과물인 셈이다. 미국 곳곳에 산재한 미국 내 한국 자동차공장도 1981년 일본 사례를 본뜬 것들이다.
   
   약 40년 전 고안된 미국 내 자동차공장 설립 아이디어는 당시로서는 일본의 운명을 건 대도박이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의 강성 노동조합도 문제지만, 비싼 임금에다 일본에서나 통하던 생산시스템이 과연 미국에서 가능할지에 대한 불신과 불안이 팽배했었다. 미국 입장에서는 밑져야 본전인 상황이었다. 결론은 미·일 모두 윈윈이었다.
   
   위의 두 가지 미·일 협상 역사를 살펴보면 일본식 협상의 특성과 장점을 엿볼 수 있는데 간단히 4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전부 혹은 전무(All or Nothing)’가 아닌 ‘조금 더 혹은 덜(Much or Less)’이 기본이다.
   
   대(大)승리를 위한 협상이 아니다. 물론 패배도 아니다. 말장난 같지만 ‘지지 않는 결과’를 만들어내자는 것이 협상에 임하는 일본의 기본자세다. 완전히 이길 경우 언젠가 다시 보복을 당하게 된다는 교훈이 작용한 원칙이다. 역으로 크게 질 경우 국내의 정치적 기반을 잃게 된다. 승리도 패배도 아닌 묘한 회색지대, 즉 지지 않는 협상이 핵심이다. 현재 진행 중인, 승자와 패자로 확실히 나눠질 수밖에 없는 미·중 무역협상과는 전혀 다른 태도다.
   
   둘째, 공개협상과 막후협상이란 투 트랙 대화를 이어간다는 것이다.
   
   공개로 협상을 진행할 경우 명분과 구체적 수치로 나타난 ‘승자승’ 결과에 집착하게 된다. 뻔히 알면서도 강성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1970년대 초 직물협상 당시, 다나카 장관은 마치 대미항전 사무라이쯤으로 통했다. 그러나 이후 각종 문서를 통해 밝혀지지만, 대국민용 메시지와 미국에 대한 자세는 180도 달랐다. 대미항전을 밝히면서 뒤로 돌아서는 즉시, 고개를 숙이며 타협안을 제시하는 식이었다. 자동차협상도 마찬가지였다. ‘내 것’을 주장하기에 앞서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대응하는 식이다. 미국 내 자동차 공장 건설계획은 그 같은 미국인의 심리를 읽은 결과물이었다. ‘사무라이 협상술’에서는 공식회의도 중요하지만 회의 전후 식사와 파티 속에서 막후협상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 한층 더 중요하다.
   
   세 번째는 적과의 동거다.
   
   크게 보면 ‘조금 더나 덜’의 영역이지만 자신의 경쟁자와 이익을 나누는 식의 협상안이다. 일제 자동차 수입이 급증하던 1980년대, 도요타 자동차가 실행에 옮긴 미국과의 합작이 좋은 예다. 1980년 포드 자동차와의 공동생산, 1983년 제너럴 모터스와의 기술제휴가 본보기다. 당시 미국 입장에서 보면 ‘잘나가는’ 경쟁자를 통해 자신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일본 입장에서 보면 불만투성이 열등생을 내 편으로 끌어들여 더 큰 화를 면할 수 있다는 전망이 가능해진다. 적이나 경쟁자가 가진 단점을 집중공략하기보다 거꾸로 보듬으면서 함께 나아가는 식의 협상이다.
   
   넷째, 정면승부는 절대 피한다는 원칙도 중요하다.
   
   일본만이 아니라 모든 문명국의 기본이지만 ‘배수진’ ‘임전무퇴’ ‘벼랑 끝 작전’ 같은 극단은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일본에 가미카제(神風) 육탄돌격, 1억 옥쇄는 2차대전 말기 태평양 전선의 악몽이었다. 지금은 단순한 수식어로도 피하는 금기어다. 칼을 찔러 100% 항복을 받아내는 식의 논의는 애초부터 없다. 그 어디에도 서로의 이해관계를 충족시켜줄 공통분모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한다.
   
   뭔가 막힐 때 등장하는 일본어로 ‘결국은 말로 통하게 돼 있다(話せばわかる)’라는 관용구가 있다. 아무리 생각이 달라도 대화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의미다. 협상은 최후의 마지막 순간까지 가능하다는 자세다. 설령 한순간 이긴다고 해도 조금 지나고 보면 승패 여부가 뒤집힐 수도 있다. 마지막까지 대화에 매달리는 일본을 ‘약자’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강하다고 적당히 하고, 약하다고 매달리는 세계관에 익숙한 속좁은 생각일 뿐이다. 1981년 미·일 자동차협상의 경우 단기적 승자는 미국이었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일본이 승자였다. 일단 정면공격은 피한 뒤 숨을 돌려 상대의 얘기를 들으며 타협점을 찾아가면서 장기적으로는 승기를 잡은 셈이다.
   
   ‘말 끊고 무례라면서 버럭’.
   
   지난 7월 19일 고노 다로(河野太郞) 일본 외무상이 남관표 주일 한국대사와 만난 자리에서 벌어진 험악한 상황에 대한 언론의 묘사다. 한국 내 반일감정이 극에 달할 만한 자극적인 자세로 보인다. 한국 측도 곧이어 청와대 성명으로 고노를 향해 ‘무례’라고 비난했다. 한·일 공방을 지켜보면서 사무라이 시대극에 자주 등장하는 ‘切捨御免(기리스데고멘)’이란 말이 떠올랐다. 일본인 모두가 알고 있는 말로, 사무라이가 칼로 상대를 죽여도 면죄가 되는 행위를 의미한다. 일명 ‘無礼討(부레이우치)’로 통하는 말이다. 사무라이에게 무례한 행위를 할 경우 곧바로 현장에서 처단할 수 있는 특권이 바로 ‘기리스데고멘’이다.
   
   이는 경고 수준이 아니다. 사무라이가 칼로 상대를 치기 직전에 행하는 마지막 통보가 바로 ‘부레이우치’다. 죽여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의미로, 책임은 전적으로 무례를 범한 상대방에게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통하는 무례라는 원어적 의미와 전혀 다른 어감의 살벌한 말이다. 필자의 감각이지만 외교적 수사로 자주 등장하는 ‘유감’이란 말에 비해 100배 정도 강도가 세다. 외교상 거의 사용하지 않는 극단적인 표현이지만 올 들어 지난 2월에도 이미 한국에 대해 사용한 적이 있다. 일왕(日王)을 전범 주범의 아들이라 규정하고, 위안부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는 문희상 국회의장의 발언에 대해 일본 정부는 즉각 ‘무례’라는 표현과 함께 반박성명을 냈다.
   
   칼로 찌르기 직전의 마지막 통보는 이미 곳곳에서 시작됐다. 한국에서 ‘전쟁’ ‘침략’이란 단어가 넘실대는 현 상황에서 마지막 남은 것은 ‘단교’ 정도다. 하지만 ‘결국은 말로 통하게 돼 있다’는 사무라이 협상 원칙은 한국에도 통할 수밖에 없다.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어찌 보면 이제 시작이다. 한·일 양국 모두 웃으며 어제의 기억으로 되돌릴 그날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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