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2일 청와대 본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참석하고 있는 이낙연 총리. ⓒphoto 뉴시스
지난 7월 2일 청와대 본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참석하고 있는 이낙연 총리. ⓒphoto 뉴시스

지난 7월 1일 기자가 이낙연 국무총리를 만났을 때 나눴던 대부분의 대화에는 다음 개각 때 총리직에서 물러날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이날 기자는 다른 7~8명의 기자들과 함께 총리 공관 만찬에 초청을 받았었다. 만찬에서는 노정(勞政)관계나 6월 30일 있었던 미·북 정상 간 판문점 회담 등 일부 국정현안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지만, 대부분 자신이 기자를 하던 시절의 에피소드나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의 인연 등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만찬이 있던 7월 초는 이 총리의 종로 출마설이 정치권에서 파다했을 때였다. 또한 차기 대선주자 지지율에서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를 제치고 1위에 오른 시점이기도 했다. 이를 의식한 듯 이 총리는 만찬 전 “어떤 질문을 해도 넘어가지 않을 테니 알아서 하라”고 농담을 던졌고, 실제로 기자들의 질문을 요리조리 피해갔다.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보여준 모습처럼 이 총리는 여유가 있었고 능수능란했다.

총리직 유임 기류 변화 배경은?

만찬에서 가장 화기애애했던 장면은 만찬 도중 한 기자가 건배사를 제의했을 때였다. 이 기자가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 다음 계획이 뭐냐’고 묻자 총리는 “무계획”이라고 답했다. 그리고 이 말을 받아 다른 기자가 영화 ‘기생충’의 한 대사를 언급하며 건배사를 제안했다. 영화 ‘기생충’에서 송강호가 역을 맡은 기택은 이런 말을 했다. “무계획이 가장 좋은 계획이야.” 건배사를 제안한 기자는 “총리의 무계획을 위하여”라고 건배사를 외쳤고, 이 말을 들은 이 총리도 활짝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

7월 초만 해도 이 총리는 총리직에서 물러나 다른 정치적 행보를 하는 것이 거의 확실해 보였다. 종로 출마설이 나오던 것도 이 무렵이다. 하지만 7월 중순을 전후해 문재인 대통령이 이 총리를 유임시키는 쪽으로 분위기가 갑작스럽게 바뀌었다. 이 시기 몇몇 일간지들의 보도를 종합해보면 문 대통령은 이 총리의 잔류를 통해 변화보다는 안정을 택하는 쪽으로 개각 폭을 조정할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여권 관계자들의 말에 따르면 문 대통령이 이런 결정을 내린 계기는 일본과의 관계가 급속도로 악화되면서부터다. 이때부터 외교를 이 총리와 분담해서 하겠다는 대통령의 언급이 나왔고, 이 총리의 일본특사설이 구체적으로 거론됐다. 문 대통령은 이런 의중을 이 총리와도 충분히 공감했다고 한다. 이 총리도 대통령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의미다.

‘정치인 이낙연’에게 올 하반기는 매우 중요한 시기다. 내년에 총선이 있고, 문재인 정부가 전반기에서 후반기로 넘어가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정치인이 내각에 있으면 운신의 폭은 좁다. 대선주자 지지율 순위에서 1~2위를 걷고 있는 정치인에게 선거는 기회이자 위기다. 대선주자가 나서서 선거를 승리로 이끌 경우 중량감은 배가된다.

그럼에도 총리가 현재 직을 유지하기로 했다면 이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고민의 끝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다. ‘대통령과 멀어져도 지금의 지지율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동아일보 기자를 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로 정치에 뛰어든 이낙연 국무총리는 호남이라는 지역에 정치기반을 두고 있다. 4선 의원에다 전남도지사를 지낸 이 총리는 중량감 있는 정치인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가 호남을 벗어나 대중적 인기를 얻은 적은 적어도 총리가 되기 전까지는 없었다. 이 총리가 지지율 1위의 대중 정치인으로 발돋움한 것은 그가 국무총리에 임명된 이후다. 공교롭게도 여권 유력주자였던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김경수 경남도지사, 이재명 경기도지사 등이 이런저런 이유로 낙마하거나 발목이 잡히면서 이 총리는 반사이익을 얻었다.

황교안을 의식한 이낙연의 말들

정치권 관계자들은 이 총리가 대선주자 지지율에서 1위를 달릴 수 있는 첫 번째 이유로 대통령 지지세력, 즉 친문세력의 지지를 꼽는다. 다음으로 안정감을 선호하는 중도층의 지지다. 친문계로 꼽히는 한 의원은 “현재 여권 대선주자로 이 총리와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 김경수 경남도지사, 이재명 경기도지사, 박원순 서울시장 등이 꼽히는데 이 중 이 지사나 박 시장에게 친문계 지지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하고 결국 총리, 유 이사장, 김 지사 등에게 지지가 분산됐다”고 말했다. 이 의원은 “김 지사는 드루킹 사건에 발목이 잡혀 있고, 유 이사장은 현실정치와 선을 긋고 있는 상황에서 ‘사이다 총리’라고 불릴 정도로 노련하게 야당의 공격을 막아내는 총리에게 박수를 보내는 지지자들이 많다”며 “하지만 총리직에서 물러나고 지지자들의 시선 안에서 벗어나기 시작할 때도 지금의 지지율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여권 안팎에서는 이 총리가 대통령의 총리직 유임 카드나 대일본 특사를 받아들인다면 사실상 이것을 다음 대권을 염두에 둔 행보로 봐야 한다는 분석이 많다. 변수가 많은 총선에 나가서 상처를 받는 것보다는 대통령 근처에 있으면서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차기 행보에 유리하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특히 ‘대일본 관계는 이 총리가 최적임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 총리가 일본 문제를 잘 풀어낼 수 있다면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훨씬 폭넓은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다.

이낙연 총리는 이미 자신을 대권주자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자가 이렇게 느낀 것은 7월 1일 있었던 만찬에서 이 총리가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를 두 번 언급했을 때였다.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여야 대선주자 1위를 다투고 있는 사람들이며 전·현직 총리라는 인연을 갖고 있다. 기자가 주목한 이 총리의 언급은 우선 황 대표가 총리 시절 헬스기구를 들여놨던 총리공관 2층 방을 자신은 아내의 화실로 내줬다는 것이 하나였다.

다른 하나는 총리 관저 내·외빈들을 모실 때 드는 비용에 대한 언급을 할 때였다. 이 총리는 “황 전 총리는 조찬이든 만찬이든 대부분 서울 특급호텔에서 케이터링 서비스를 불러다 손님을 대접했지만 나는 전속 요리사를 고용하면서 필요할 때만 외부 케이터링 서비스를 부른다”며 “오히려 전속 요리사를 고용하는 것이 비용이 훨씬 저렴하다”며 비교우위를 자랑했다.

우리 헌정사에서 총리 출신이 대통령이 된 적은 단 한 번뿐이다. 최규하 전 대통령이다. 하지만 ‘체육관 선거’로 뽑힌 간선 대통령인 데다 전두환 장군과 신군부가 실권을 쥐고 있던 시기라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다. 총리 출신 상당수가 대권주자로 거론됐지만 실제로 대통령이 된 사람은 없다고 봐야 한다. 그동안 총리 이력은 대통령의 그림자라는 애매한 위상에 그쳤던 것이 사실이다. 성공은 온전히 대통령의 몫이고 실패는 나눠 지는 게 우리나라 총리의 현실이다. 황교안 대표가 박근혜 정부 실정으로 인해 공격받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과연 이낙연 총리는 이런 딜레마를 극복할 수 있을까.

박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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