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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장] 죽창가의 배경무대 우금치 가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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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치
[2568호] 2019.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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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죽창가의 배경무대 우금치 가보니

▲ 충남 공주 우금치에 있는 ‘동학혁명군위령탑’
지난 7월 23일, 공주역에서 우금티터널을 넘어 우금치(牛禁峙)에 도착했다. 현지에서 우금치, 우금티, 우금고개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이 고개에는 과거 호랑이가 자주 출몰했다고 한다. 지금은 터널이 뚫려 호환(虎患) 걱정 없이 고개를 넘을 수 있지만, ‘소(牛)를 끌고 넘는 것을 금(禁)한다’는 뜻의 이름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우금치는 지금으로부터 125년 전인 1894년, 죽창(竹槍)을 든 동학군이 일본군이 지휘하는 관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몰살당한 현장이기도 하다. 우금티터널 옆 옛 국도 변에 있는 우금치전적지를 찾으니 ‘동학농민운동 때 당시의 최대 격전지로 동학농민군의 원혼(寃魂)이 서려 있는 곳’이란 설명이 붙어 있었다.
   
   125년 전 격렬했던 전투의 흔적을 지금 우금치에서 찾을 길은 없다. 다만 우금치고개에 서 있는 ‘동학혁명군위령탑’ 하나로 미루어 짐작해볼 뿐이다. 박정희 정부 때인 1973년 세운 위령탑인데, 탑 정면에는 ‘동학혁명군위령탑’이란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휘호가 남아 있다. 탑 앞뒤에는 각각 위령탑 건립기와 월북한 최덕신 천도교(동학 후신) 8대 교령(교주)의 감사문이 탑신에 붙어 있었다.
   
   하지만 건립기와 감사문 모두에서 ‘박정희’ ‘5·16혁명’ ‘시월유신’ 등의 글자는 누군가 정으로 쪼아낸듯 알아볼 수 없게 훼손돼 있었다. 위령탑을 중심으로 사방에는 우금치에서 몰살당한 영령들을 추모하는 돌탑 4기가 서 있었다.
   
   평일인 때문인지 기자가 찾았을 때 이곳을 찾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위령탑 앞에 몇 다발의 화환만 놓여 있었다. 위령탑 뒤에 있는 농민군의 상투인지 봉화대(烽火臺)인지 알 듯 말 듯한 조형물 안에는 치렁치렁한 거미줄만 무성했다. 우금치로 올리가는 산길에는 ‘인내천(人乃天)’ ‘우금티를 넘어 평화로’ 등의 깃발이 걸려 있었지만 외진 곳에 인적마저 드물어 올라가기가 꺼려졌다. 마침 이날은 호랑이 장가가는 날에 보인다는 맑은 하늘에 부슬비마저 떨어져, 고갯마루에서 그 옛날 호랑이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최근 동학혁명을 소재로 방영한 드라마 ‘녹두꽃’의 실제 무대인 터라 제법 많은 관광객들이 찾을 줄 알았던 기대는 어김없이 무너졌다.
   
   
▲ 공주 우금치 전적지 옆 우금티터널.

   정감록에 언급된 공주
   
   공주역이 있는 공주시 이인면에서 우금치로 향한 기자처럼 125년 전인 1894년 죽창을 든 동학군 역시 이 코스로 우금치로 진격했다. 앞서 조선 정부의 파병요청으로 청군(淸軍)이 아산만으로 상륙하자, 일본군은 톈진(天津)조약을 근거로 제물포(인천)로 상륙해 경복궁을 일시 점령하고 친일(親日) 내각을 구성했다.
   
   한때 전주성을 점령해 관군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전봉준은 이를 일본의 조선 침략으로 판단했다. 이에 삼례(전북 완주)에서 김개남, 손화중 등 동학 남접(호남지방) 지도자와 회합을 가진 뒤 거병을 결정했다. 이어 충남 논산에서 동학 북접(호서지방) 지도자 손병희와 병력을 합친 뒤 우금치고개 너머 공주를 공격하기에 이른다.
   
   당시 동학군의 죽창이 향한 곳은 충청도를 관할하는 공주 봉황산 아래 충청감영이었다. 지금은 공주 무령왕릉 인근의 국립공주박물관 옆에 충청감영의 본청인 선화당(宣化堂)과 동헌 등이 축소 복원돼 있지만, 당시 충청감영은 지금의 공주사대부고 자리에 있었다. 공주시청에서 멀지 않은 공주사대부고에 가보니 ‘충청도포정사(布政司)’라는 편액이 걸린 대문이 복원돼 있었다. 우금치에서 불과 2㎞ 남짓 거리에 불과했다.
   
   충청감영을 지키는 사람은 충청도 관찰사(감사)로 훗날 을사오적이 되는 박제순. 동학군으로서는 우금치를 돌파해 충청감영을 점령하면 호서의 요충지이자 호남의 관문인 공주를 손에 넣고 금강을 경계로 장기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동학군이 봉기하기 40여년 전인 1851년, 역시 종교집단을 배경으로 중국 남부를 휩쓴 태평천국 역시 난징(南京)을 수중에 넣은 후 장강(長江)을 전선으로 삼아 베이징의 중앙정부와 무려 14년간이나 대치했었다.
   
   주조선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역시 “공주는 충청도의 도부로서 한 도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곳”이라며 “만약 이곳이 적(동학군)의 수중에 떨어지면 한 도가 몽땅 무너질 것”이란 보고를 남기고 있다. 게다가 공주는 전봉준이 신봉했던 예언서 정감록(鄭鑑錄)에 언급된 ‘십승지지(十勝之地)’ 중 한 곳이었다. 공주는 동학의 창시자인 교조(최제우) 신원운동이 최초로 열리는 등 동학을 믿는 신도들이 제법 됐다고 한다.
   
   우금치의 동학혁명군위령탑에는 ‘20만의 대병력을 논산평야로 집결시키고, 전봉준과 손병희 두 통령의 작전지휘 아래 서울까지 진격하는 주요거점으로 공주성부터 공략하게 되었다’고 적혀 있었다. ‘서면 흰산이요, 앉으면 대나무산’이란 ‘입즉백산 좌즉죽산(立卽白山 座卽竹山)’이란 말이 빈말이 아니었다. 흰옷을 입고 죽창을 쥔 동학군의 군세(軍勢)를 뜻하는 말이다.
   
   이에 맞선 관군은 도순무사 신정희가 이끌고 서울에서 급파된 경군(京軍) 3200명과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 소좌가 이끈 일본군 200명 도합 3400명에 불과했다. 병력상으로 동학군은 일본군과 관군을 압도했다. 다만 학자들은 관련 자료를 근거로 당시 동학군의 군세를 대략 1만~2만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 지금의 공주사대부고 자리에 있었던 충청감영.

   1만명 중 9500명 몰살
   
   하지만 죽창으로 공주를 포위하며 한창 기세를 올렸던 동학군은 우금치에서 몰살됐다. 위령탑에 따르면 최대 20만명에 달했다는 동학군이 우금치에서 몇 명이나 전사했는지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다. 비(非)정규군인 농민군의 특성상 전황이 악화되면서 대탈주도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우금치전투 패배 후 체포당한 전봉준의 심문기록에 따르면, “공주에 이르렀을 때 군사는 몇 명이었나”라는 질문에 “만여 명”이라고 답하고, “2차 접전을 치르고 다시 점검해보니 나머지는 500명이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보수적으로 봐도 전봉준 휘하의 1만명 중 9500명이 우금치에서 죽거나 다쳤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아무리 병력이 많다 해도 죽창으로 신무기를 상대할 수는 없었다. 동학군의 주무기는 대나무 끝을 예리하게 잘라 만든 죽창과 대나무를 길게 자른 뒤 죽부인처럼 둥글게 만든 장태(죽롱)였다. 장태는 앞서 전주성을 점령할 때 관군을 벌벌 떨게 했다고 한다.
   
   총기라고는 심지에 불을 붙여서 발사하는 화승총 정도가 전부였다. 방어용 무기인 장태를 굴리면서 앞으로 전진해 죽창으로 찌르고 화승총을 쏘는 식이었다. 지수걸 공주대 교수에 따르면, “공주 전투가 한창이었던 1894년 10월 말부터 11월 초순까지 공주에는 부슬부슬 초겨울비가 자주 내렸다”고 한다. 그나마 몇 정 안 되는 화승총에 불이 제대로 붙을 리가 없었다.
   
   반면 우금치에서 마주한 일본군과 관군의 주무기는 영국제 스나이더소총과 모젤총, 미국제 개틀링 기관총 등이었다. 화승총과의 사거리 차이도 약 5배로 현격하지만, 특히 개틀링 기관총은 분당 600발을 쏠 수 있었다고 한다. 일본군 1명이 동학군 100명, 1000명을 맞상대할 수 있다는 일당백, 일당천이 빈말이 아니었다.
   
   이에 맞선 동학군은 ‘정감록’에 나온다는 ‘궁궁을을(弓弓乙乙)’이 적힌 부적을 태워 마시고, 총탄이 비켜간다는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이란 주문을 입으로 외며 우금치로 돌격했다. 하지만 일본군과 관군이 쏜 총탄은 부적과 주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동학군의 몸을 꿰뚫었다. 근대식 신무기에 허황된 미신(迷信)이 여지없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죽창으로 기관총에 맞선 참담한 결과는 공주 웅진동 충남 공주의료원 맞은편에 있는 용못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용못의 다른 이름은 ‘송장배미’다. 송장배미에는 ‘동학농민전쟁전적지’라고 적힌 큰 바윗돌이 놓여 있었는데, 공주포위전 당시 금강 고마나루(곰나루) 방면에서 충청감영 쪽으로 진군하다 몰살당한 동학군의 송장을 쌓아놓고 처리한 곳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 적혀 있었다. 섬뜩한 이름의 유래와 달리 지금은 화초로 뒤덮여 근린공원처럼 조성돼 있었다. 죽창 하나를 손에 쥔 채 부둥켜안고 쓰러진 남녀 동학군의 동상이 보였다.
   
   우금치전투의 패인(敗因)은 명백하다. 우금치에서 지휘권을 행사한 일본군은 이미 같은해 7월부터 풍도해전, 성환전투, 평양전투, 황해해전을 치러내며 동아시아 최강의 청군을 물리치며 절정의 전투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이 일대 지형지물과 기후에도 충분히 익숙해진 상태였다.
   
   고지대인 우금치는 일본군과 관군이 이미 선점해 동학군은 지형의 이점도 누릴 수 없었다. 화력이 막강한 적을 상대할 때는 전면전이 아닌 유격전을 택하는 것이 동서고금의 진리다. 하지만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군은 우금치에서 전면전을 택했다. 한때 조선 왕조의 본관인 전주성 점령으로 기세를 올렸던 동학군은 일본군까지 가세한 관군의 실력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했다.
   
   
▲ 공주 웅진동 송장배미에 있는 남녀 동학군 동상.

   적전분열과 대원군의 개입
   
   다음은 적전(敵前)분열이다. 동학군으로 통칭됐지만 우금치전투를 앞둔 남접과 북접은 심각한 노선갈등을 겪었다.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은 우금치전투 직전까지만 해도 무장투쟁에 집중하는 전봉준을 ‘역적(逆賊)이요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실제 전봉준 공초를 보면, 교주 최시형의 지위를 부정하는 듯한 발언이 많다. 무장투쟁에 소극적이던 북접 역시 사태가 커지자 마지못해 참전한 측면이 크다. 이에 ‘전봉준 평전’을 쓴 신복룡 건국대 석좌교수는 “동학을 가르친 바 없다”는 전봉준의 공초 기록을 근거로, “전봉준은 동학교도가 아니다”는 주장을 하기에 이른다. 남접 내부에서도 전봉준이 공주를 공략할 때, 김개남은 청주, 손화중은 광주에 있는 등 병력마저 분산됐다.
   
   정치권에 이용당한 측면도 있다. 전봉준은 임오군란으로 청국에 압송됐다가 귀국한 후 재집권을 노리던 흥선대원군의 운현궁을 드나들던 문객이었다. 전봉준은 전주성을 일시 점령하고 제시한 ‘폐정개혁안 13조’에서 “국태공(대원군)에게 정치를 맡겨 민심으로 하여금 소망하는 바가 있게 할 것”이란 조항을 넣는다.
   
   대원군 역시 1894년 9월 ‘효유문(曉諭文·전북 유형문화재 235호)’에서 동학에 동정적 입장을 보인다. 우금치전투 후 체포된 전봉준을 직접 심문한 일본 영사 우치다 사다츠지(內田定槌)가 집요하게 캐묻는 것도 “동학군 거병의 배후에 대원군이 있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전봉준과 대원군의 관계는 우금치전투의 성격을 규명하는 주요 열쇠다.
   
   
▲ 공주 이인면의 ‘유림의병정난사적비’

   죽창과 의병의 정면 충돌
   
   사실 역대 정권은 고금(古今)을 가리지 않고 동학을 입맛에 맞게 활용해왔다. 동학난이 동학혁명으로 최초 격상된 것은 박정희 정부 때다. 5·16만을 혁명(革命)으로 보고, 4·19마저 의거(義擧)로 격하했던 당시 ‘동학혁명군’이란 칭호는 실로 파격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친 박성빈은 경북 성주의 동학 접주(接主)로 활동했다. 전봉준을 장군으로 격상시키고 대대적으로 유적지 성역화 사업을 실시한 것은 같은 ‘전(全) 장군’인 전두환 정부 때다. 노무현 정부 때는 ‘동학농민혁명 특별법’이 제정됐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인 지난해에는 서울 종로 영풍문고 앞에 전봉준 장군의 동상이 들어섰고, 지난 2월에는 동학농민혁명기념일(5월 11일)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박정희 정부가 세운 우금치의 동학혁명군위령탑 바로 옆에는 문재인 정부 들어서 국가기념일로 격상된 동학농민혁명기념일을 경축하는 공주시와 공주시의회에서 내건 경축 현수막이 펄럭이고 있었다.
   
   한국 대법원의 징용공 배상판결로 촉발된 일본의 경제보복에 또다시 죽창이 회자되고 있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지난 7월 13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SBS 드라마 ‘녹두꽃’ 마지막회를 보는데 한참 잊고 있던 이 노래가 배경음악으로 나왔다”며 죽창가를 언급했다. 1980년 운동권 민중가요로 고(故) 김남주 시인이 쓰고 민중가수 안치환이 즐겨 부른 죽창가의 가사는 이렇다.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꽃이 되자 하네 꽃이/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진 녹두꽃이 되자 하네/(중략)/ 다시 한번 이 고을은 반란이 되자 하네/ 청송녹죽 가슴에 꽂히는 죽창이 되자 하네’. 녹두꽃과 파랑새, 죽창 등 전봉준과 동학혁명을 소재로 한 노래다.
   
   앞서 지난 7월 7일 최재성 더불어민주당 일본경체침략대책특별위원장은 “이 정도 경제침략 상황이면 의병을 일으켜야 할 일”이라고 했다. 정작 우금치 아래 공주시 이인면 초봉리에는 ‘유림의병정난사적비’라는 큰 비석이 서 있었다. 우금치전투 때 이 일대 유림들이 민병대인 ‘유회군(儒會軍)’을 조직해 패주하는 동학군을 토벌한 공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조국의 죽창과 최재성의 의병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지점이다.
   
   동학에 대한 역사적 판단이 어찌됐든 1만명이 몰살당한 우금치의 참상은 변치 않는다. 우금치전투 후 동학은 사실상 와해됐고, 심지어 일부는 일진회(一進會)가 돼 친일에 앞장섰다. 막강 화력을 갖춘 적에게 죽창을 들고 맞서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무책임한 일인지 우금치는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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