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민간인 희생자 문제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불행입니다. 아직도 책임 소재를 놓고 공방을 벌이고 있고, 사회적 갈등과 분열이 생기고 있습니다. 공동조사단이 발굴하는 유해들은 국가 정체성 확립, 인권신장, 화해와 상생을 위한 근본적인 재료로 사용될 것입니다.”
2014년부터 ‘6·25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하 공동조사단) 단장을 맡고 있는 박선주(72) 충북대 명예교수는 요즘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충남 아산시 유해발굴 현장을 자주 찾고 있다. 지난 8월 초 청주시 흥덕구 ‘인류진화연구소’에서 만난 박 교수는 “요즘 비가 연일 쏟아져 8월 말까지 발굴작업을 일시 중단했다”고 말했다.
박선주 교수는 지난해 2월 20일부터 4월 1일까지 충남 아산시 배방읍 설화산 폐금광 유해발굴 현장에서 6·25 당시 학살된 민간인으로 추정되는 뼛조각 3246점을 발굴했다. 그는 이 유해들이 1951년 1·4후퇴 당시 학살당한 민간인들로 “최소 209명”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부역 혐의를 받던 희생자들이 준군사조직인 치안대에 의해 설화산 폐금광 입구 웅덩이에서 처형됐습니다. 10대 후반에서 20대 후반까지로 파악된 여성의 유골도 발굴됐고요. 여성들이 지니고 있던 비녀만 해도 89개가 발견됐어요. 희생자 중 58명이 1살 남짓에서 12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아이들이었습니다. 젊은 엄마의 등에 업혔다가 희생당한 아이들인 듯해요.”
6·25전쟁 유해발굴의 개척자
박선주 교수는 국내 유해발굴 분야의 개척자이자 최고 전문가다. 국방부 6·25 전사자 유해발굴단장, 일제강점기 민간인 강제징용 유해발굴단장,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의 희생자 유해발굴단장,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 추진단장, 6·25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단 공동대표 등을 맡아왔다. 세월호 희생자 유해발굴과 감식도 그가 지도했었고 국민 방위군 유해발굴, 실미도사건 희생자 유해발굴 사업도 맡았었다. 지난 20여년 동안 그가 수습한 희생자 유해만 5000구 정도다.
특히 그는 2000년부터 2007년까지 국군유해발굴사업을 주도했다. 2000년 ‘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전사자 유해발굴 사업이 시작되면서 국방부 요청으로 8년간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을 이끌었다. 당시 박 교수는 군 관계자에게 유해발굴 방법, 감식 기법 등을 전수했다. 유해발굴감식단은 첫해 2000구의 국군 유해를 발굴했고, 이후 8년 동안 1만1000구를 찾았다. 2007년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출범한 이후 수습한 국군 전사자 유해 중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9000여구는 현재 서울 동작구 현충원 국선제(임시유해보관소)에서 10년 넘게 햇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들을 기리는 별도의 행사도 없다.
박선주 교수는 “적과 뒤엉킨 병사의 신원을 확인하기에는 애로가 많다”며 “미 국방부 산하 ‘전쟁포로·실종자 관리청(DPAA·Defense POW/MIA Accounting Agency)’은 1940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습 때 침몰한 애리조나호 장병들의 시신 일부를 인양해 보관하다가 최근에야 마린 타포노미(marine taphonomy·해양 화석생성이론) 기법으로 모든 뼈에 대한 유전자 검사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부러웠다”고 했다.
2007년 유해발굴 전문부대인 ‘국방부 유해발굴 감식단’이 창설된 것도 정부를 상대로 “국군유해발굴사업을 지속사업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그의 끈질긴 설득 덕분이었다. 감식단이 창설됨으로써 체질인류학을 전공한 박 교수의 제자들이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일터도 마련된 셈이다. 실제 그가 2008년 “발굴 전문인력이 필요하다”는 건의를 한 결과 국방부 내에 ‘유해발굴 감식’ 병과까지 생겼다.
한편 북한군 역시 6·25전쟁 기간 동안 군인, 경찰과 군경 가족, 우익인사, 지식인, 종교인 등 양민 13만명을 학살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우리 정부는 6·25전쟁 종료 직후부터 북한군에 학살당한 민간인 희생자들의 유해발굴을 추진해 대부분 관련 사업이 종료됐다. 우익 인사 1000여명이 학살당한 대전교도소 유해발굴 등이 대표적이다.
연세대 사학과 출신인 박 교수는 국내서 석사학위를 받은 후 1979년 미국 버클리대로 유학을 떠나 인류의 기원, 역사, 문화 따위를 밝히는 체질인류학(physical anthropology)을 공부했다. 1989년 귀국 후에는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로 일해왔다.
국군 전사자 유해발굴 사업을 하기 전인 1997년 박 교수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 홋카이도로 끌려갔다가 사망한 한국인 징용피해 노동자의 유해발굴을 주도했다. 박 교수가 발굴 책임을 맡은 이 사업은 KBS가 ‘70년 만의 귀향’으로 특집 방송을 했을 만큼 가슴 아픈 사연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일본에 징용돼 가혹한 노동으로 고통받다가 이국 땅에 묻힌 115위의 유골이 70년 만에 3000㎞를 달려 귀향하는 것은 한 편의 인간 드라마였다. 당초 박 교수는 홋카이도 북부 사루후쓰(猿拂) 아사지노(淺茅野) 일본육군비행장 터 등지에서 징용 희생자 유골 115위를 발굴했다. 이들 115위의 유해에 대해 “광복 70주년을 맞는 해 추석에 한국으로 모시자”는 의견이 나왔고, 실제 2015년 추석 때 일본 아사지노를 출발해 시모노세키를 거쳐 3000㎞가 넘는 10일간의 대장정이 펼쳐졌다. 희생자 유해는 2015년 9월 18일 꿈에 그리던 고국 품으로 돌아와 경기도 파주 서울시립묘지에 안장됐다. 박 교수는 “당시 일본의 한 장인(匠人)은 못을 쓰지 않은 오동나무 관을 20개 만들어 갖고 와 발굴단에 더 없는 감동을 전했다”며 “삿포로,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에서는 천태종 사찰 스님들이 엄숙하고 정성스러운 법요식(法要式)을 마련, 억울하게 희생된 조선인들의 넋을 위로해주었다”고 했다.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 불발 안타까워
박 교수는 자신이 주도한 다양한 유해발굴 사업 중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 사업을 가장 안타까워했다. 2006년 실시한 예비조사를 바탕으로 2008년 ‘한·중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사업단’을 이끌며 유력 매장지 추정 지역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했지만 아쉽게도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안 의사 묘소’로 알려진 곳에서 찍은 사진과 일치하는 장소를 확인해 안 의사 유해 매장지로 추정되는 장소를 찾은 것이 그나마 성과였다.
박 교수는 “현재 중국 외교부는 안 의사 유해발굴을 추가적으로 하려면 ‘새로운 증거를 대라’고 요구하고 있고, 동시에 남북한 공동으로 발굴하라고 말하고 있다”면서 “안 의사 서거 110주기가 지나는 이 시점에 문재인 정부도 안 의사 유해발굴 사업을 하나의 이벤트로 생각해선 안 된다”고 했다. “안 의사 순국 당시 뤼순감옥 소장의 딸인 이마이 후사코(今正房子)가 제시한 사진과 증언 등 지금까지 나온 증거들을 종합해 ICT(정보통신) 기술을 이용한 시뮬레이션을 만들어놓아야 한다”는 주문도 했다.
세월호 합동수습본부 고문과 선체조사위원으로 2017년 4월 21일부터 세월호 미수습자 유해를 찾는 작업을 지도·자문·감독한 것도 아쉬움이 많이 남는 일이었다고 한다. 당시 박 교수는 작업자들에게 수습 방식 등을 교육했고, 몸소 세월호 선내에 들어가 유해발굴 작업을 감독하기도 했다. 그는 “1만t에 달하는 진흙 속에서 미수습자 유해와 유류품 등을 찾기 위해 지름 3㎜ 구멍을 수천 개 뚫은 가로 1m, 세로 1m 크기의 체 10개를 특수 제작했다”며 “수도시설을 설치해 시신이 상하지 않도록 물을 뿌려가며 진흙을 걸러내도록 했다”고 했다. 박 교수는 “세월호 참사 미수습자 수습은 땅이 아닌 바닷속에 오랫동안 가라앉아 있는 유해를 찾는 작업”이라며 “바닷속에 36개월 가라앉은 유해는 작은 충격에도 손상되기 쉬워 조심스럽게 수습을 진행해야 했다”고 했다. 그는 “당시 총 20점의 뼛조각을 발견했으나 모두 동물뼈인 것으로 판명됐다”며 “선체 정리업체 코리아셀비지 직원들이 바지선 위에서 족발을 먹고 바다에 버렸던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