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9일 일본 오사카 G20 정상회의장에서 만난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 ⓒphoto 뉴시스
지난 6월 29일 일본 오사카 G20 정상회의장에서 만난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 ⓒphoto 뉴시스

1979년 1월 1일 미국과 중국이 수교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일등공신은 헨리 키신저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었다. 키신저 보좌관은 1971년 7월 9~11일 베이징을 비밀리에 방문해 저우언라이(周恩來) 당시 중국 총리와 만났다. 키신저 보좌관과 저우 총리는 1950년 6·25전쟁 이후 철천지 원수로 지냈던 양국의 화해 방안을 논의했다. 이를 계기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1972년 2월 21일부터 28일까지 중국을 방문해 마오쩌둥(毛澤東) 국가주석을 만나 양국의 적대관계 청산, 외교 관계 수립,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평화, 대만 문제 등을 논의하고 상하이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양국은 1978년 5월 연락사무소를 상호 개설하고 1979년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당시 미국이 중국과 손을 잡은 것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의 전략은 중국과 소련이 국경 분쟁 등으로 대립하자 중국과 협력해 소련을 압박하려는 의도였다. 이후 소련 붕괴와 냉전체제의 종식은 미·중 수교에서 비롯됐다는 평가까지 나왔다. 미국과 중국은 지난 40년간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협력 체제를 유지해왔다. 이를 두고 ‘키신저 질서(Kissinger Order)’라고 부른다. 미국이 주도하는 아·태 지역의 자본주의 분업체제의 틀 속에서 중국은 경제개발에 적극 나섰고, 중국은 그 대가로 이 지역에서 미국의 패권을 인정했다.

“키신저 체제가 종말을 고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과 중국의 관계에서 ‘키신저 질서’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미국이 그동안 중국을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편입시키려고 노력해왔지만 실패했기 때문이다. 프랭크 로즈 전 미국 국무부 군축·검증·이행 담당 차관보는 “지난 40년간 대화를 통해 중국을 자유민주주의 국제질서에 편입시키려 했던 키신저 체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밝혔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의 기드온 라크먼 외교전문 수석 칼럼니스트도 “미국의 아·태 정책의 틀이었던 키신저 체제가 종말을 고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중국의 급격한 부상과 패권 도전, 이에 맞선 미국의 전 방위적인 대응으로 양국 간의 갈등과 대립은 증폭되고 있다. 중국은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강국이 되겠다는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왔다. 특히 시진핑 국가주석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중국몽(中國夢)’을 기치로 내걸고 건국 100주년이 되는 2049년까지 초강대국이 되기 위해 군사력과 경제력 강화에 박차를 가한다는 원대한 청사진을 제시했다. 게다가 시 주석은 중국식 사상과 정치·경제 체제를 바탕으로 서구식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시 주석은 “서구 자유민주주의 제도를 배울 필요는 없다”면서 “새 시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통해 두려움을 모르는 자세로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목표를 위해 계속 힘차게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반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미국의 국익을 앞세운 미국 우선주의를 적극 추진해왔다.

양국의 본격적인 패권 다툼의 대표적인 사례는 지난해 7월부터 시작된 무역전쟁이다. 미국 정부는 중국 정부가 야심 차게 추진해온 ‘중국 제조 2025’ 프로젝트와 관련된 첨단제품에 대해 25%의 관세를 부과했다. 중국 제조 2025 프로젝트는 중국 정부가 자국을 제조업 강국으로 만들기 위해 5G 통신을 포함한 차세대 정보기술(IT) 등 10개 핵심 산업을 2025년까지 세계 1〜3위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청사진을 말한다. 중국 정부의 목표는 2049년까지 자국을 세계 제조업을 선도하는 국가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앞으로 첨단 기술 산업을 적극 육성함으로써 미국의 경제패권을 뛰어넘겠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의 대규모 흑자를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는 명분을 앞세워 중국산 첨단제품에 대해 고율의 관세 부과라는 카드를 꺼내든 것이었다.

키신저 미국 안보보좌관이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오른쪽)과 대화하고 있다. 뒤는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 ⓒphoto 위키피디아
키신저 미국 안보보좌관이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오른쪽)과 대화하고 있다. 뒤는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 ⓒphoto 위키피디아

무역전쟁 속 ‘신(新)대장정’ 선언한 시진핑

미국 정부는 중국이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이유가 미국과의 무역에서 대규모 흑자를 내왔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특히 미국 정부는 앞으로 중국이 첨단 기술 산업 분야에서 발전을 거듭할 경우 더 많은 흑자를 낼 것이 분명하고 자칫하면 세계 1위 경제대국에서 밀려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미·중 무역전쟁은 트럼프 대통령의 지나친 보호무역주의 때문에 촉발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첨단기술력이 급성장하면서 이를 제어하지 않으면 자칫 중국에 밀릴 수도 있겠다는 미국의 위기감이 반영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시 주석이 결사항전의 의지를 보이면서 ‘신(新)대장정’에 나서자 중국을 아예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는 것은 물론 중국산 제품 전체에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는 초강수 카드까지 내보였다. 시 주석은 지난 5월 20일 장시성 간저우시 위두현을 방문해 대장정 기념탑을 참배하고 헌화하면서 연설을 통해 “우리는 홍군이 여정을 처음 시작했던 시간을 기억하기 위해 대장정의 출발점에 와 있다”면서 “우리는 이에 새로운 대장정을 시작하고 있으며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시 주석의 이런 연설은 대장정이라는 혹독한 시련을 극복하고, 결국 승리해 중국공산당 정권을 수립하는 혁명에 성공했듯이 미국과의 무역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끝까지 투쟁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미국 정부는 또 중국 정부가 추진해온 일대일로(一帶一路·육상 및 해상 실크로드) 프로젝트를 저지하기 위해 인도·태평양 전략을 내놓았다. 일대일로 프로젝트는 육상과 해상의 교통과 물류망을 구축해 ‘범중화경제권’을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일대(一帶·One Belt)는 ‘육상 실크로드 경제지대’를 말하는 것으로 중국 서북지역에서 중앙아시아, 유라시아 대륙과 유럽을 관통하는 육상 무역통로를 연결하는 것이다. 일로(一路·One Road)는 ‘21세기 해상 실크로드’를 말하는 것으로 중국의 동남 연해지역에서 동남아, 인도양, 중동과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바닷길을 의미한다. 시 주석은 중국과 일대일로 참가국들을 ‘운명공동체’라는 틀로 묶어놓으려 하고 있다. 시 주석은 이를 통해 지역적 영향력을 확장함으로써 세계 유일 초강국인 미국에 도전할 수 있는 힘을 키울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특히 시 주석은 해상 실크로드의 출발점이자 지정학적 요충지인 남중국해를 자국의 바다로 만들려는 야심을 보여왔다. 중국 정부는 이를 위해 남중국해에 인공 섬들을 조성하고 군사기지로 만들었다.

‘항행의 자유’ 작전 벌여온 미국

미국 정부는 그동안 인공 섬들을 앞세워 남중국해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중국에 맞서 해군 함정 등을 동원해 ‘항행의 자유’ 작전을 벌여왔다. 그 이유는 인도양과 태평양, 남중국해 및 동중국해에 이르는 해상 루트를 중국이 장악할 경우 미국으로선 해양의 지배권을 상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 정부로선 항행의 자유 작전만으로는 중국 정부의 야심을 견제할 수 없다고 판단해 인도·태평양 전략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기존의 ‘아시아·태평양’을 ‘인도·태평양’이라는 명칭으로 바꿔 부르고, 태평양사령부도 인도·태평양사령부로 이름을 변경했다. 인도·태평양 전략의 핵심은 미국, 일본, 인도, 호주와의 동맹과 연대를 통해 중국의 해양 진출을 군사적으로 견제·봉쇄하는 것이다. 미국 정부는 이와 함께 베트남 등 아세안 회원국들과의 협력과 연대를 위해 군사는 물론 경제 지원까지 하고 있다.

키신저 질서가 붕괴함에 따라 미·중이 패권 다툼을 본격화하고 있는 가운데 한국은 앞으로 미국이냐 중국이냐를 선택해야만 하는 기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특히 북한 핵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할 한국으로선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국가의 명운이 좌우될 수 있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전략적인 지혜가 중요하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미국 정부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한·일 정보교류협정(GSOMIA·지소미아)을 파기함으로써 지금까지 숨겨온 반미(反美) 성향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지소미아의 파기는 문재인 정부가 한·미·일 안보협력 체제를 거부하는 것이며, 이는 미국과의 동맹 관계를 깨려는 의도까지 들어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아울러 인도·태평양 전략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이 생존과 번영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안보와 경제 분야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공유하고 있고 미국과 동맹관계를 맺어온 일본과 협력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한·일 양국은 그동안 중국의 패권을 견제하고 북한의 비핵화를 위해 안보협력 관계를 맺어왔다. 때문에 양국 관계의 악화는 서로에게 손해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정부는 그동안 일본이 과거사 문제에 제대로 사과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이용해 국민들의 반일감정을 자극하는 조치들을 취해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일본과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놓고 합의한 화해치유재단 해산과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 등을 들 수 있다. 일본 정부가 한국의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제조에 필수적인 3개 품목에 대한 수출 규제 강화와 한국을 수출 심사 우대국인 백색국가 명단(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보복 조치를 내리자 문재인 정부는 지소미아 파기라는 안보 카드를 꺼내들었다. 하지만 안보상의 국익을 따져볼 때 지소미아는 한·미·일 3국 안보협력의 상징으로,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은 물론 동북아 지역에서 중국의 군사적 팽창에 대해 공동 대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는 점에서 문재인 정부의 의도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문재인 정부가 과거사 문제를 내세워 반일정서를 선동하면서 지소미아를 파기했지만, 그 이면에는 반미·친중(親中) 노선이 숨어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아베 일본 총리, 모디 인도 총리가 서로 주먹을 맞대며 웃고 있다. ⓒphoto 모디 트위터
트럼프 미국 대통령, 아베 일본 총리, 모디 인도 총리가 서로 주먹을 맞대며 웃고 있다. ⓒphoto 모디 트위터

문 대통령 “한·중은 운명공동체”

중국 정부는 미국 정부가 2016년 7월 북한의 탄도미사일을 방어하기 위해 주한 미군에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를 배치하자 한국에 강력한 경제 보복조치를 가했다. 문재인 정부는 2017년 10월 중국에 전혀 항의하지 않고 오히려 ‘3불(不)’을 약속했다. 3불의 내용을 보면 사드를 추가 배치하지 않고, 미국의 미사일 방어체계(MD)에 가입하지 않으며, 한·미·일 군사동맹을 체결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후에도 중국 정부는 기회 있을 때마다 사드 배치를 문제 삼아왔다. 지난 6월 일본 오사카에서 개최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도 시 주석은 문 대통령에게 또다시 사드 문제를 거론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내정간섭 반대’를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항의하기는커녕 중국의 ‘입맛’에 맞는 발언만 해왔다.

실제로 문 대통령은 2017년 12월 한·중 정상회담에서 “한·중 양국은 서로에 도움이 되는 운명공동체의 관계”라고 강조했다. 중국 정부가 자국과 전략적 우호 관계를 맺는 국가에 사용해온 운명공동체는 일종의 ‘동맹’을 말한다. 중국 정부는 미국의 견제를 의식해 동맹 대신에 운명공동체라는 용어를 사용해왔다. 다시 말해 운명공동체는 중국의 패권을 인정하고 중국식 모델을 따르라는 의미다. 북·중 간의 네 차례 정상회담에서 운명공동체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도 이 때문이다.

문 대통령의 운명공동체 발언은 중국과 전략적 우호 관계를 맺겠다는 의사 표시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지소미아 파기는 문재인 정부가 중국에 약속한 3불 중에서 한·미·일 군사동맹을 체결하지 않겠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문재인 정부는 북한의 각종 탄도미사일은 물론 최근 이스칸데르급 단거리 탄도미사일 도발에 대한 대응 전략으로, 미국의 MD에 가입하는 것은 검토조차 하지 않고 있다. 데이비드 맥스웰 미국 민주주의수호재단 선임연구원은 “지소미아는 미국이 추진하는 통합 미사일 방어체계의 핵심”이라며 “지소미아 폐기는 북한과 중국에 도움만 줄 뿐”이라고 지적했다. 지소미아 파기를 문재인 정부가 스스로 ‘제2의 애치슨 라인’을 긋는 자해 행위로 보는 시각도 있다. 데니스 와일더 전 백악관 동아태 담당 선임보좌관이 “지금은 한·미 동맹이 탄광 속 카나리아가 됐다”고 지적한 것도 이 때문이다. 탄광 붕괴 조짐을 먼저 알려주는 카나리아처럼 지소미아 파기 이후 한·미 간 갈등과 대립이 동맹 파열의 경고 신호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문재인 정부는 그동안 중국의 일대일로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도 내비쳐왔다.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신경제 구상인 서울~평양~신의주~단둥 고속철도 연결 청사진은 중국의 일대일로와 협력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국이 중국의 일대일로에 적극 참여하게 되면, 미국에 등을 돌리고 중화경제권에 편입하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반면 문재인 정부는 미국 정부의 인도·태평양 전략 참여 요청은 거부해왔다. 문재인 정부는 또 미국 정부가 중거리핵전력(INF) 조약 탈퇴 이후 한국, 일본, 호주 등에 중거리 미사일 배치를 검토하자 노골적으로 거부 반응을 보였다.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은 “미국의 중거리 미사일은 논의한 적도, 검토한 적도, 앞으로 계획도 없다”면서 ‘신3불’을 주장했다. 미국의 중거리 미사일 배치는 북한의 비핵화를 견인하고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지렛대가 될 수 있는데도 이를 무조건 거부한다는 것은 친중 노선을 택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한·미 동맹은 피와 목숨으로 이어진 동맹일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법치라는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 반면 중국은 홍콩 시위사태에서 보듯이 민주주의와 인권 등을 외면해온 독재국가이다. 게다가 미국은 앞으로 군사와 경제 분야에서 초강대국 지위를 2049년 이후에도 유지할 것이 분명하다. 아무튼 선택의 순간은 조만간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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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훈 국제문제애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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