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 유승민 바른미래당 의원. (우) 안철수 바른미래당 전 의원. ⓒphoto 뉴시스
(좌) 유승민 바른미래당 의원. (우) 안철수 바른미래당 전 의원. ⓒphoto 뉴시스

지난 9월 16일 청와대 앞 분수대광장에서 열린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의 삭발식은 한국당 내부 결집을 다시 한번 다지는 계기가 된 듯했다. 이날 황 대표의 삭발식이 끝난 후 한국당 의원 50여명은 밤 12시까지 자리를 지키며 ‘謹弔(근조) 자유민주주의!’라고 적힌 현수막 앞에서 ‘촛불 연좌농성’을 벌였다. 황 대표는 농성을 함께하고 있는 의원들과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땅바닥에 둘러앉은 황 대표와 한국당 의원들은 발 앞에 촛불을 놓고 박근혜 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함께 일했던 추억부터 여당에서 야당 의원으로 바뀐 상황의 힘겨움까지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눴다. 검은 머리카락 덥수룩한 의원들 사이에서 두피가 하얗게 드러난 황 대표의 민머리는 대비됐다. 전례가 없는 ‘당 대표 삭발 투쟁’을 결행한 황 대표의 결기가 돋보이는 장면이었다.

황 대표의 이러한 결기는 ‘조국 사태’에도 불구하고 지지율이 오르지 않는 한국당의 절박한 상황과 맞닿아 있다. 청와대가 조국 장관 임명을 강행하고, 여당은 이를 비호하기 위해 비상식적 발언과 행동을 일삼으면서 민심 이탈 조짐이 가시화됐지만, 이탈한 민심이 한국당으로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있다. 여론조사업체 칸타코리아가 SBS 의뢰로 지난 9월 9~11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어느 정당도 지지하지 않는다’는 무당층은 38.5%로 한 달 사이 3.7%포인트가 증가한 반면 한국당 지지율은 18.8%로 사실상 제자리걸음이었다. 민주당에 등 돌린 여론이 한국당으로 흡수되지는 않은 것이다.

10명 중 4명이 무당층

‘10명 중 4명이 무당층’이라는 지금의 민심은 민주당도 싫고 한국당도 내키지 않는 유권자를 수용할 수 있는 새로운 ‘제3세력’의 결집을 예고하고 있다. 손학규 대표 퇴진을 둘러싸고 극심한 내홍(內訌)을 보이는 바른미래당이나 이미 두 동강이 난 민주평화당 등 식상한 3당이 아니라 중도 기반의 새로운 3당이 나오면 다시 승부수를 띄울 기반이 조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현 시점에서 제3신당의 출현 여부에 기대감이 이는 이유는 내년 4월 총선에 적용될 가능성이 높은 새 선거법 때문이다. 소수정당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평가받는 ‘준(準)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실제 시행된다면, 정당득표율에 따라 3당의 설 자리가 이전에 비해 훨씬 넓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에 올라탄 선거법 개정 법안은 이르면 올 연말 본회의 표결에 부쳐질 수 있다. 다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조국 사태’로 인해 무당층이 증가했다고 보는 것은 단편적 해석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 정당사에서 ‘여당도 싫고 야당도 싫은 유권자들은 꾸준히 존재해왔다’는 이유에서다. 기대감이 높았지만 큰 파괴력 없이 생명력을 마친 기존 3당의 운명이 또 되풀이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그럼에도 새로운 선거법이 실제 도입될 경우 전개될 정치 환경 변화는 만만치 않다는 분석이 높다. 제1 야당을 이끌고 있는 황교안 대표도 이를 의식한 듯 지난 9월 4일 당 중진의원들을 만난 자리에서 최대 현안인 보수통합 전략을 선거법 개정 여부에 따라 탄력적으로 판단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당 내부에서도 새 선거법을 염두에 두고 투쟁 전략을 새로 짜야 한다는 인식이 커진 것으로 풀이된다. 이 경우 한국당은 기존의 ‘흡수식’ 통합이 아닌 제3당 및 소수 정당들과의 폭넓은 ‘반문연대’를 모색해야 한다.

지난 9월 11일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는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 ⓒphoto 뉴시스
지난 9월 11일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는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 ⓒphoto 뉴시스

유승민계 손학규와 결별?

현재 새로운 제3당 출현 여부와 관련해 가장 주목받는 정치세력은 바른미래당의 유승민계다. 손학규 대표를 둘러싼 내홍이 절정을 향해 치닫는 상황에서 앞장서 손 대표와 결별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승민계로 분류되는 하태경 의원은 비당권파(유승민+안철수계)의 사퇴 요구를 거부하고 있는 손 대표를 향해 “나이가 들어 정신이 퇴락했다”고 비판했다가 지난 9월 18일 직무정지 6개월에 처해지기도 했다.

손 대표는 총선을 앞장서 이끌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손 대표는 지난 9월 18일 “조국 사태로 보수 연합을 꾀하는 것은 한국 정치를 왜곡하는 것”이라며 “당을 분열시키는 행위는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고 했다. 한국당이 주도하는 ‘반(反)조국연대’에 동참하지 않겠다고 선을 분명히 그은 것이다. 또 손 대표는 ‘무당층 40%’ 여론조사를 언급하면서 “중간지대가 크게 열리고 있다”며 “제3의 길에 바른미래당이 나서야 한다”고도 했다. 자신이 주도하는 제3의 길로 활로를 뚫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비당권파 의원들은 “그 일을 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 바로 손 대표가 물러나는 일”이라고 입을 모은다. ‘안철수계’로 분류되는 이태규 의원은 9월 18일 통화에서 “손 대표가 그대로 있는 한 바른미래당은 정당으로서 가치도 없고, 정계개편도 유의미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하태경 의원 역시 “현재 손 대표는 조국보다 더한 상태”라고 날을 세우며 “연대든 통합이든 당내 상황 마무리부터 먼저 집중한 후 논의해야 한다”고 했다.

어떤 형식과 조합이든 제3신당이 실제 출현할 경우 내년 총선에서 과연 얼마만큼의 성공을 거둘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정치권 안팎의 전망은 다소 엇갈린다. 먼저 제3신당의 출현이 유의미한 성공을 거두기 어려울 것이라고 보는 쪽의 근거는 부실한 지역 기반이다. 이는 과거 총선에서 확고한 지역 기반으로 나름의 성공을 거뒀던 자유민주연합(충청), 국민의당(호남)이 방증한다는 분석이다. 자민련은 15대 총선에서 50석, 국민의당은 20대 총선에서 38석을 얻었다. 하지만 앞으로 출현할 제3신당은 특정 지역을 기반으로 뭉칠 가능성이 적다. 결국 중도라는 ‘가치’와 ‘인물’을 내세워야 하는데 그것만으로는 승리를 담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제3신당은 내년 총선 전 나타날 이합집산에 대비해 입지를 미리 확보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얘기까지 나온다.

‘중도’만 내세워서는 다시 지리멸렬

제3신당의 탄생이 만약 ‘안철수+유승민’에 그친다면 파괴력은 오히려 더 반감될 것이라는 지적조차 나온다. 이미 한 번 이뤄졌던 통합의 ‘재방송’에 불과하다면 신선함이 떨어져 유권자들의 외면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조국 사태가 결정적인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한 현 상황에서는 내년 총선은 야권에 절대적으로 불리한 선거”라며 “과거 국민의당 같은 돌풍을 일으킬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고 했다. 신 교수는 또 “새 선거법이 적용된다고 가정해도 제3신당의 교섭단체 진입(20석)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반면 제3신당의 성공을 점치는 쪽에서는 ‘인물’에 초점을 맞춘다. 우선 ‘안철수’라는 정치인의 존재감이다. 지난 대선에서 3위를 기록한 안 전 대표의 힘이 아직 살아있다는 평가다. 우파와 좌파를 오가는 안 전 대표의 성향(자칭 ‘상식파’)이 중도 외연 확장에도 시너지 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는 분석이다. 최광웅 데이터정치경제연구원 원장은 “지난 대선에서 전국적으로 골고루 지지를 얻은 안 전 대표의 득표력을 무시할 수 없다”며 “설령 현행 선거법대로 총선을 치르더라도 지난 대선에서 안 전 대표를 뽑았던 21% 중에서 60~70%는 복원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난 대선 때 홍준표 후보는 최소 2.3%(전북), 최대 51.6%(경북)로 지역별 득표율에서 큰 낙차를 보인 반면, 안 전 대표는 최소 14%(경북), 최대 30%(광주)로 대체로 모든 지역에서 고르게 득표했다. 최 원장은 또 “정치인이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는 게 아니듯, 안철수라는 정치인의 존재감도 쉽사리 없어지지 않는다”며 “양당에 염증을 느끼는 유권자가 늘고 있는 구도가 안 전 대표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삭발한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지난 9월 19일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삭발한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지난 9월 19일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안철수’ 존재감 살아있다

안 전 대표는 지금까지 측근들을 통해 ‘현재로서는 정치에 복귀할 의사가 없다’는 뜻을 꾸준히 밝혀왔지만 일각에서는 “애초에 지금은 복귀하기 이른 타이밍”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2016년 1월 국민의당을 창당해 같은 해 4월 선거를 치러 성공한 기억을 가진 안 전 대표로서는 ‘3개월이면 충분하다’는 계산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선거법 개정안이 상정되는 연말 이후가 안 전 대표의 복귀 시점으로 점쳐지는 배경이다.

이에 대해 이태규 의원은 통화에서 “현재로서 제3신당 이야기는 대부분 언론이 추측성으로 만들어낸 것”이라면서도 “여권에 대한 부정 여론이 제1야당 지지로 이어지지 않는 한계가 나타나는 상황에서 안철수의 역할에 대한 요구들은 필연적으로 계속 커질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이 의원은 “기존의 영남·호남, 진보·보수를 벗어나 새로운 정치를 바라는 수요가 분명히 있다”면서 “과거 국민의당의 성공도 우리가 지역주의를 부추긴 것이 아니라 호남이 우리를 ‘선택’해준 것”이라고 했다. 기존 정치구도에 염증을 느낀 유권자들이 또 다른 제3세력의 확장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얘기다.

향후 안 전 대표가 제3세력 구축의 움직임을 본격화한다면, 황교안(한국당)과의 연대 여부가 제3세력의 파괴력을 가늠하는 분수령이 될 수밖에 없다. 현재 한국당은 ‘반문재인연대’ ‘반조국연대’를 명분으로 통합 또는 선거 연대를 모색하고 있다. 당장은 바른미래당 유승민계가 여기에 동참할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안 전 대표가 유 의원과 손을 잡는다면 친박 세력이 그대로 남아 있는 한 현재의 한국당과 연대할 개연성은 낮아진다. 황교안 대표가 ‘친박 청산’을 이뤄낼 수 있을지가 다시 주목될 수밖에 없다. ‘친박 청산’ 없는 중도 세력과의 연대 및 외연 확장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당 대표가 되는 과정에서 그가 친박계 의원들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황 대표 역시 박근혜 정부의 법무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지냈다는 점에서 ‘친박’이나 다름없다는 평가도 많다. 이런 평가를 듣는 황 대표로서는 지난 16대 총선 당시 이회창 총재의 ‘개혁 공천’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당시 이 총재는 유력 정치인이자 이전 대선에서 자신의 경선을 도왔던 김윤환 의원을 비롯해 이기택, 이수성, 박찬종, 조순 등 당내 중진 의원들을 공천에서 대거 탈락시켰다. 공천에서 탈락한 의원들은 한나라당을 탈당해 ‘민주국민당(민국당)을 창당했지만, 결국 총선에서 2석을 얻는 데 그쳤다.

황 대표의 리더십은 선거연합 측면에서도 요구될 수밖에 없다. 지역구별 후보단일화로 선거 연대가 이루어질 경우 ‘줄 곳은 주고, 받을 곳은 받아내는’ 당 대표의 장악력이 더욱 절실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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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승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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