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평양 보통강변의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에 전시돼 있는 푸에블로호. ⓒphoto AP·뉴시스
북한 평양 보통강변의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에 전시돼 있는 푸에블로호. ⓒphoto AP·뉴시스

푸에블로호 피랍 사건 당시 북한 내부 사정을 다룬 구(舊)소련 외교문서가 공개됐다. 푸에블로호 사건은 1968년 1월 23일, 미 해군 정보수집선인 푸에블로호가 북한 원산 앞바다 공해상에서 피랍된 사건을 가리킨다. 피랍 과정에서 미 해군 승조원 1명(듀엔 호지스)이 총에 맞아 사망하고, 푸에블로호의 초대 함장인 로이드 부커 중령 등 82명의 승조원이 북한 당국에 의해 구금됐다. 이들은 같은 해 12월 23일 석방되기까지 구타와 고문 등 11개월간 비인간적인 가혹행위를 당했다.

1968년 ‘1·21 청와대 습격사건’ 이틀 만에 발생한 푸에블로호 피랍 사건으로 미 해군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를 필두로 한 항모 3척이 원산 앞바다까지 출격했다. 주한미군과 주일미군을 비롯해 오키나와(일본에 반환 전)와 괌 등 미군기지에는 공격대기 명령이 내려졌다. 1950년 6·25전쟁 이후 무려 82명의 미군이 북한군에 인질로 생포된 것은 처음으로, 한반도에는 일촉즉발의 위기국면이 조성됐다.

주간조선이 입수한 구소련 외교문서는 푸에블로호 승조원의 석방과 본국 송환이 마무리된 직후인 1969년 3월, 푸에블로호가 나포됐던 원산을 방문한 주(駐)북한 소련대사관 외교관(영사국 비서관) 카푸스틴이 같은해 7월 본국에 타전한 ‘원산시 방문 기록 정보문’이란 제목의 비밀문건이다. 푸에블로호 피랍 사건 51년 만에 국내에 공개된 이 문건은 푸에블로호 피랍을 전후해 소련 외교관에 의해 목격된 북한 내부 사정과 원산 주민들의 생활상 및 심리 상태가 생생하게 드러난다. 이 문건이 국내에 공개된 것은 처음이다.

주북한 소련대사관 작성 기밀문건

소련 외교관에 의해 작성된 이 문건은 모두 4부가 만들어져 소련공산당 대외연락부 라흐마닌 제1부부장 등 간부 3명에게 보고됐고, 1부는 보관소 문서철로 들어갔다.

이 문건을 모스크바에 있는 러시아 국립현대사문서보관소에서 찾아낸 사람은 러시아 학자인 표도르 째르치즈스키(한국명 이휘성·국민대 선임연구원)박사다. 째르치즈스키 박사는 “문건 작성자인 카푸스틴씨가 생존해 있는 것을 확인했고 통화도 했다”며 “카푸스틴은 1967년부터 1970년까지 북한 주재 소련대사관에서 근무했다”고 말했다.

째르치즈스키 박사는 지난 6월부터 8월까지 러시아를 방문해 모스크바에 있는 러시아 국립현대사문서보관소를 약 2개월 동안 드나들면서 해당 문건을 찾아내 주간조선에 제공했다. 지난 9월 16일 주간조선과 만난 째르치즈스키 박사는 “크렘린궁 인근에 있는 러시아 국립현대사문서보관소는 옛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자료를 보관하는 곳”이라며 “소련 해체와 함께 소련공산당이 망하면서 자료 접근이 다른 기관에 비해 오히려 쉬워진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지난 2007년경 기밀해제된 이 문건은 소련 외교관 카푸스틴이 푸에블로호 승조원들의 하선 과정을 목격한 원산 거주 소련 국적의 고려인 여성 타티야나 리와 안나 송 등을 면담한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 문건을 작성한 카푸스틴은 “소련 국민 의료지원을 구실로 소련대사관 의무관 케키세프와 함께 원산을 방문했다”고 적고 있다.

째르치즈스키 박사는 “북한은 1967년부터 여행증명서 제도가 실시돼 외교관도 지방 여행을 자유롭게 할 수 없었다”며 “푸에블로호 사건이 터진 원산을 방문하기 위해 ‘의료지원을 구실로’라는 표현이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번 기밀문서 공개로 푸에블로호 나포가 북한의 단독행동이었다는 기존 연구에도 힘이 실리게 됐다. 푸에블로호 피랍 직후부터 풀리지 않는 의문은 당시 푸에블로호 나포를 북한이 독자적으로 주도했느냐는 것이다. 1968년 푸에블로호 피랍 당시 미국의 린든 존슨 행정부는 베트남전(戰)의 수렁에 빠져 있었다. 북한이 해군 함정 6척과 미그기 2대를 동원해 푸에블로호를 공해상에서 나포하자 미국에서 즉각적으로 터져나온 반응은 “소련의 사주를 받아 감행한 행동”이란 것이었다.

푸에블로호 나포 이틀 전, 남한을 상대로 감행한 ‘1·21 청와대 습격사건’과 달리 푸에블로호 나포는 미국의 직접적 반발을 초래할 것이 뻔했다. 북한으로서는 상당한 위험감수를 요하는 작전이었다. 이에 북한의 단독행동은 불가능하고 공산권 차원의 사전공모 내지 역할분담이 있었을 것이란 추측이었다. 실제로 푸에블로호 사태로 미국의 시선이 북한으로 돌려진 와중인 1968년 1월 30일 음력설(구정), 베트남에서는 월맹군이 대대적인 ‘구정공세’를 벌여 미국이 수세에 몰리는 전환점이 된다.

하지만 째르치즈스키 박사는 기밀해제된 외교문건의 생산일자와 푸에블로호를 언급하는 비중 등을 근거로 푸에블로호 나포가 북한의 단독행동이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째르치즈스키 박사는 “대사 이하 외교관들은 매일 정보 보고를 하는데, 푸에블로호가 피랍된 지 1년여 후에야 원산을 찾은 소련 외교관이 당시 사건을 주요 현안처럼 심각하게 보고한다는 것 자체가 사전공모가 없었음을 뜻하는 증거”라고 했다.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국민대 선임연구원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국민대 선임연구원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구타와 약탈 등 가혹행위 현지 목격

실제로 문건은 “원산에서 살고 있는 조선 사람도 소련 국민도 거의 모든 이야기에서 푸에블로호 사건을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억한다”는 언급으로 시작한다. 째르치즈스키 박사는 “푸에블로호 사건에 대해 언급한 구소련 외교문서는 아직까지 접해본 적이 없다”며 “북한과 우호관계에 있었던 소련 측 공식기록을 통해 푸에블로호에 관한 사실이 드러난 것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했다.

기밀해제된 구소련 외교문건을 통해 푸에블로호 승조원들에 대한 구타와 약탈 등 가혹행위 역시 재차 확인됐다. 푸에블로호 승조원들에 대한 구타와 약탈 등 가혹행위는 승조원들에 대한 사후 심문과 부커 함장이 1970년에 펴낸 수기(手記)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알려졌다. 소련 외교관 카푸스틴 역시 당시 푸에블로호 승조원 하선 과정을 실제 목격한 자국민과의 면담을 통해 승조원들에게 가해진 구타와 약탈 등 가혹행위를 본국에 생생하게 보고하고 있다.

문건에 따르면, 당시 푸에블로호 승조원들은 뒤로 손이 묶인 채 눈가리개를 쓰고 푸에블로호에서 하선했다. 문건은 “당시에 신문에 나온 사진은 조작에 불과하다”며 “함장(로이드 부커)이 부상을 당해 얼굴과 옷이 피투성이였다”는 소련 국적의 고려인 여성 타티야나 리의 말을 인용해 전한다. 타티야나 리씨는 “많은 사람에게 구타 자국이 있었고, 하선 과정에서 약탈을 당했다”며 “포로들이 차고 있던 시계를 떼내갔고, 주머니를 뒤졌고, 하선 과정에 항의한 일부 승조원을 무리의 눈앞에서 때렸다”고 증언한다.

증언자가 이 과정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은 푸에블로호 승조원 하선 과정이 현지 주민들에게 공개됐기 때문이다. 문건은 “무리(북한 주민) 대부분, 특히 북한 청년들은 호송병의 행위에 지지를 보였고, 주먹을 휘두르면서 분노를 표시했다”고 적고 있다. 부커 함장이 훗날 수기에서 밝힌 “이들은 우리가 대기하고 있는 버스로 이동하는 동안 온갖 욕설을 퍼붓고 침을 뱉었다”며 “사전 조직활동이 없었다면 주민들이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통지를 받고 저렇게 통제된 광적인 행동을 보일 수 있겠는가”란 하선 과정에 관한 언급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원산시 방문 기록 정보문’ ⓒphoto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원산시 방문 기록 정보문’ ⓒphoto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미군 머리에 담뱃불 비벼 끄자 주민 반발”

당시 푸에블로호 승조원에게 가해진 구타와 약탈은 일부 주민들의 반발과 불쾌감을 초래할 정도로 가혹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건에 따르면, 푸에블로호 승조원 하선 과정을 지켜보던 북한 노인은 포로 호송병 중 하나가 눈가리개가 씌워진 채 호송버스를 기다리는 미군 포로의 머리에 담뱃불을 비벼 끄자 크게 화를 냈다고 한다. 이에 북한 군인은 이 노인을 발길질로 차낸 다음에 출발했다고 한다. 타티야나 리씨는 “당시 사건을 본 많은 조선인들은 불쾌한 감정을 받았다”고 소련 외교관에게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

째르치즈스키 박사는 “타티야나 리가 비록 북한 남성과 결혼한 고려인이지만, 국적이 소련이란 사실이 중요하다”며 “북한 국적이었다면 감히 이런 말을 소련 외교관에게 전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푸에블로호 승조원 대부분은 나포된 그해 크리스마스 직전인 12월 23일, 판문점의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거쳐 본국으로 송환된 후에도 고문으로 인한 우울증 및 후유증에 시달렸다. 부커 함장 역시 고문후유증으로 지난 2004년 사망했다.

1968년 1월부터 같은 해 12월 승조원 석방에 이를 때까지 11개월간 푸에블로호가 나포돼 있던 원산시의 북한 주민들이 미군의 폭격 위협에 시달렸던 것도 추가로 밝혀졌다. 푸에블로호가 나포 직후 소련 접경인 나진항으로 잠시 옮겨지는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 문건은 안나 송이라는 소련 국적자의 말을 인용해 “가장 긴 공습경보는 1968년 11월 1일에 있었다”며 “이날은 도시 전체 인구가 도시에서 밖으로 나가고, 도시 근처에 있는 언덕 속에 숨으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전했다.

평양에 전시된 푸에블로호에 걸려 있는 미군 포로 사진. ⓒphoto AP·뉴시스
평양에 전시된 푸에블로호에 걸려 있는 미군 포로 사진. ⓒphoto AP·뉴시스

평양의 제너럴셔먼호와 푸에블로호

1968년 나포 직후 줄곧 원산항에 묶여 있던 푸에블로호는 피랍 30년 만인 1998년 말, 김정일의 지시로 평양으로 옮겨져 대동강변 쑥섬에서 북한 주민들을 비롯해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공개됐다. 대동강 쑥섬은 구한말인 1866년, 통상을 요구하며 대동강을 거슬러온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워 격침시킨 곳이라고 전해진다. 평양감사 박규수의 지휘로 일어난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신미양요’(1871)의 도화선이 된다.

북한은 이곳에 ‘미제 침략선 셔먼호 격침기념비’란 거대한 비석을 세워두고 제너럴셔먼호 격침이 “애국자인 김응우의 주도로 이뤄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평양 만경대에 살았다는 김응우는 김일성의 증조부이자 김정일의 고조부다. 같은 미국 국적 선박인 제너럴셔먼호와 푸에블로호를 사실상 동격에 놓고 김일성·김정일 일가 우상화와 체제 선전에 활용해온 셈이다.

김정은 집권 후인 2013년부터 푸에블로호는 대동강의 지류인 보통강가에 있는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야외전시장으로 옮겨져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평양의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은 서울의 용산 전쟁기념관과 유사한 곳으로, 미군과 한국군으로부터 노획한 무기들이 대거 전시돼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째르치즈스키 박사 역시 지난 2014년 1월, 관광객 신분으로 평양의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을 방문해 푸에블로호에 직접 승선했다.

째르치즈스키 박사는 이곳에서 푸에블로호 나포 작전에 참가했다는 박인호 북한 해군 대좌(한국군의 대령과 준장 사이에 해당하는 계급)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째르치즈스키 박사는 “관광객 안내를 맡았던 박인호 대좌는 자신이 푸에블로호 나포작전에 참가한 가장 어린 병사였으며 지금은 김정은의 지시로 푸에블로호 안내를 맡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고 말했다.

사실 북한이 애지중지하는 푸에블로호는 고물 화물선을 개조한 배에 불과하다. 냉전 시기 소련 및 공산권 국가를 상대로 한 정보수집 작전인 ‘방아벌레 작전’의 하나로, 퇴역 직전 화물선을 개조해 통신감청 및 정보분석 장치를 싣고 주로 공해상에서 활동했다. 대외적으로는 ‘환경조사선(GER)’으로 위장한 푸에블로호가 피랍 당시 제대로 된 저항이나 도주조차 못하고 나포된 까닭은 ‘공해상’이란 확신과 함께 빈약한 무장과 부실한 성능 탓이 컸다.

고물선인 푸에블로호는 지금도 북한이 미국을 상대로 쓸 수 있는 유력한 카드 중 하나다. 북한 김정은으로서도 푸에블로호의 상징성을 십분 활용해 미국 트럼프 행정부를 상대하는 지렛대로 쓸 가능성이 언제든 열려 있다. 재선을 준비 중인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도 언제든지 탐낼 만한 카드다. 최근 경질된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역시 지난 5월, “푸에블로호 송환을 논의할 적절한 시기”란 언급을 하기도 했다. 미 하원에도 지난 6월과 7월, 푸에블로호 송환을 촉구하는 2건의 결의안이 발의된 상태다.

1960년대 북·소 관계의 실상은?

北 “고려인은 소련 간첩” 가족까지 감시

나탈리아 마트베예바
나탈리아 마트베예바

기밀해제된 구소련 비밀문건 가운데는 1950년대 후반부터 극도로 악화된 북한과 소련 관계의 단면을 보여주는 문건도 상당수다. 스탈린 사후 소련공산당 서기장으로 취임한 니키타 흐루쇼프가 1956년 스탈린을 공개 비판하면서부터 북한과 소련 관계는 ‘수정주의’ 논쟁으로 서서히 악화된다. 같은 해 8월, ‘만주파’의 수장인 김일성을 타도하려 한 ‘8월 종파사건’으로 고려인 중심의 ‘소련파’가 ‘연안파’와 함께 일제히 숙청되면서 북·소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는다.

주간조선에 관련 문건을 제공한 나탈리아 마트베예바(영국 동양아프리카연구학원(SOAS) 박사과정·북한경제사 전공)씨는 “1957년부터 1962년까지 주(駐)북한 소련대사는 알렉산드르 푸자노프였는데 매우 무능한 외교관인 탓에 대사 재임 시 북한에 대한 소련의 통제가 사라졌다”며 “1961~1962년부터는 노골적으로 마오쩌둥을 지지하고 내부 자료에 흐루쇼프를 ‘수정주의자’라고 호칭하고 비난했다”고 밝혔다.

실제 이번에 비밀해제된 문건 중에는 1962년 11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김창만이 당간부들 앞에서 ‘국제정세’를 강의한 내용도 등장한다. 당시 강의에는 “흐루쇼프가 제국주의 앞에 무릎을 꿇고 구걸을 하였다”라는 거친 표현도 등장한다. 김창만은 연안파지만 ‘8월 종파사건’ 때 김일성에 대한 충성맹세로 숙청을 피한 바 있다.

북·소 관계 악화로 북한에 체류 중인 소련 국적 고려인들 역시 행동에 상당한 제약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주북한 소련대사관 1등 서기관 티타렌코는 노동당 정치국원이었던 남일의 부인 마리아 남과의 대화록을 남기면서 “(북한 당국은) 고려인을 ‘소련의 간첩’으로 본다”며 “남일마저 외국 사람과 접촉이 제한되고 공식 대접에 초대장을 받지 못하고 가족이 받는 감시는 강화됐다”라고 마리아 남의 말을 인용해 적었다. 소련 국적의 고려인 출신인 남일은 한국전쟁 당시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으로, 휴전협정 북측 수석대표를 지냈다.

티타렌코의 기록에 따르면, 남일의 부인 마리아 남은 “저희는 소련으로 출국만을 꿈꾼다. 다른 해결책은 없다”며 눈물을 글썽였다고 한다. 째르치즈스키 박사는 “대화 당시 마리아 남은 이미 남편 남일과 함께 북한으로 귀화한 상태였다”고 말했다. 비록 북한으로 귀화했다고 해도 소련 출신 고려인이란 신분 때문에 노동당 정치국원과 가족마저 감시대상이 된 셈이다. 남일 역시 1976년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째르치즈스키 박사는 “이 같은 문건을 보면 당시 북한과 소련의 관계가 푸에블로호 나포를 사전공모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틀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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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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