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20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김영삼 대통령 서거 3주기 추모식. ⓒphoto 뉴시스
지난해 11월 20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김영삼 대통령 서거 3주기 추모식. ⓒphoto 뉴시스

올 11월 22일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4주기 되는 날이다. YS는 1927년 12월 20일 출생하여 2015년 11월 22일 영면하였다. 그가 요즘따라 부쩍 그리워진다. 그가 남긴 개혁보수정치의 부활이 간절하기 때문이다.

YS는 DJ와 더불어 한국 정치 민주화의 양대 산맥이다. 그를 빼고 민주화를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1990년 1월의 3당 합당을 둘러싸고는 아직도 논란이 분분하다. 일각에서는 민주화에 대한 배신이라고 비난하나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3당 합당은 산업화 세력(민정당·공화당)이 민주화 세력(민주당)의 수혈을 받아 보수의 외연을 확장한 것으로 한국 보수에 두 개의 DNA가 존재할 수 있음을 입증한 사건이었다. 이질적 세력의 하나됨이라는 측면에서는 단순한 덧셈정치를 뛰어넘는 곱셈정치였다. 이 모험이 성공하여 탄생한 것이 김영삼 정부였다.

YS는 한국 보수의 민주주의 결핍을 완화, 극복시켜준 인물이었다. 그는 보수도 민주화 개혁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런 점에서 YS는 개혁보수의 원조다. 따라서 3당 합당은 재평가되어야 한다. 3당 합당은 정권 획득을 위한 야합이 아니라 보수 대연합을 통한 보수의 자기정화와 혁신이었다. 3당 합당은 또한 정국의 기본구도를 ‘민주 대 반(反)민주’라는 개발도상국형에서 ‘보수 대 진보’라는 선진국형으로 재편하였다. 지역주의에 기반한 4당 구도를 이념에 기초한 양당 구도로 바꾸어놓았다. 시대적 요구에 부합한 정계개편이었던 것이다.

김영삼 정부의 문민개혁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민주화와 탈권위주의라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 흐름 속에서 문민개혁은 보수가 단순한 생존을 넘어 개혁의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음을 보여준 쾌거였다. 김영삼은 취임 초 권위주의 시대의 적폐를 청산하는 작업을 전(全)방위적으로 실시했다. 취임 첫날 정오부터 통행금지 구역이던 청와대 앞길과 경복궁 후문을 개방하고 인왕산 출입을 허용하였다. 청와대 안에 있던 골프연습장과 공항의 대통령 전용시설도 철거했다. 청와대 식단을 간소화해 칼국수를 단골 메뉴로 삼은 것은 유명한 일화다. 1993년 3월 8일에는 김진영 육군참모총장 등을 전격 경질해 12·12사태의 중심에 있던 하나회 숙청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하나회 해체는 군의 정치개입을 차단해 불가역적 민주화의 기반을 조성한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YS는 또한 정치자금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또 자신과 가족의 재산을 자진해서 공개하는 등 공직사회의 부정부패 척결에 앞장섰다. 이후 공직자윤리법 개정으로 공직자의 재산등록 공개가 이어지며 부정부패 의혹이 짙은 공무원 3000여명이 구속·파면·징계되었고, 다수의 국회의원이 사퇴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공직자 재산공개는 금융실명제와 함께 한국 사회의 투명성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한강의 기적 속에서도 취약했던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을 획기적으로 확충하였다. 영장실질심사제를 도입해 검찰의 인권침해 여지를 줄인 것도 문민정부였다.

군사정권하에서 왜곡된 역사도 재평가했다. 4·19는 의거에서 혁명으로, 5·16은 혁명에서 군사정변으로 바뀌는 등 명칭이 제자리를 찾았다. 압권은 5·18 특별법 제정이었다. 검찰은 전두환을 비롯한 1980년 당시 신군부 측 핵심인사 11명을 군형법상 반란수괴죄를 적용, 구속기소하였다. 1997년 4월 17일 대법원 상고심에서 전두환은 무기징역, 노태우는 징역 17년의 형이 확정되었다. 대법원은 1979년 일어난 12·12는 군사반란으로, 이듬해 발생한 5·17 비상계엄 확대와 광주 유혈진압은 국헌문란 목적으로 진행한 신군부의 ‘연속된 폭동’으로 규정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헌법기관인 대통령, 국무위원들에 대해 강압이 가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에 항의하기 위해 일어난 광주 시민들의 시위는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였고, ‘헌정수호를 외친 광주 시민에 대한 진입작전 중의 무자비한 살상행위는 내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직접수단’이었으며, ‘헌법이 정한 민주적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폭력에 의해 정권을 장악하는 행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다’고 판시하였다. 대법원 확정판결 직후인 1997년 5월 9일 김영삼 정부는 5·18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했고, 이때부터 ‘임을 위한 행진곡’이 기념식에서 공식적으로 제창되었다.

혹자는 김영삼이 주도한 전두환·노태우에 대한 단죄가 자신의 당선을 도운 민정계에 대한 인간적 배신이라고 비판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전두환의 국헌파괴 행위는 사사로운 정리(情理)로 면죄될 수 없다. 보수는 이승만과 김구를 함께 품을 수 있지만, 김영삼과 전두환을 아우를 수는 없다. 김영삼과 전두환은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이다. 고로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 그 답은 대법원 판결문에 나와 있다. YS는 보수의 이름으로 보수의 흑역사를 단죄하는 결단을 내렸다.

최근 보수의 몰락은 이승만의 건국, 박정희의 산업화와 더불어 계승·발전시켜야 할 소중한 유산인 김영삼의 문민개혁으로부터 멀어진 결과다. 박근혜 정부 첫해인 2013년 6월 여야 국회의원 158명의 찬성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 5·18 기념곡 지정 촉구 결의안’이 본회의에서 통과됐지만, 박근혜 정부는 수용하지 않았다. 하태경 의원의 증언에 의하면,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은 가사 중의 ‘임’은 김일성이고 ‘새날’은 사회주의 혁명을 의미한다고 청와대에 보고해 제창을 막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블랙코미디였다. 김일성대를 졸업한 주성하 동아일보 기자는 2016년 5월 17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이 노래를 북한과 연결시키는 찌질한 짓거리는 그만해라. ‘임을 위한 행진곡’은 종북가요도 김일성 찬양가요도 아니다. 오히려 김정은의 압제에 신음하는 북한 인민이 따라 배워야 할 정신이다”라고 일갈하였다.

보수주의자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물질적·정신적 유산을 잘 지켜 후대에 물려주려는 신념을 갖는다. 그러나 근년 한국의 보수정치는 자신의 긍정적 유산도 계승 못 하고 오히려 걷어차버리는 뺄셈정치로 일관하고 있다. 열린 보수가 닫힌 보수로, 포용적 보수가 편협한 보수로, 민주적 보수가 권위적 보수로 퇴행하고 있다. 보수는 정체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고정불변의 공식에 얽매여서도 안 된다. 시대의 흐름에 맞게 유연하게 자신을 진화시켜나가야 한다. 이는 영국 역사를 통해서도 확인되는 교훈이다. 산업혁명과 근대민주주의 확립 과정에서 보수당은 자유당과 격렬하게 싸웠다. 그러나 사회주의 대두 및 노동당의 급성장 이후 보수주의는 자유주의와 동맹을 맺어 대처했다.

50년 전인 1969년 11월 8일, 41세의 김영삼 의원은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 출마를 선언하였다. 이른바 40대 기수론의 개막이었다. 지금 자유한국당에 필요한 것은 창조적 파괴를 실천하려는 이러한 용기다.

신지호 평론가·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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