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치슨라인’을 설정한 딘 애치슨 미 국무장관.
‘애치슨라인’을 설정한 딘 애치슨 미 국무장관.

지소미아(GSOMIA·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문제가 일단락됐다. 지소미아 종료의 ‘조건부 연기’(한국식 표현)든 ‘갱신(미국식 표현)’이든 결국 일본에 완패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국 외교 안보사의 큰 혼란으로 기록될 사건이지만, 정작 대통령은 안 보인다. 청와대와 여당의 ‘네 탓’만 메아리친다. 일본은 지소미아 타결 30분 뒤 아베 총리가 직접 나와 대국민 보고를 했다. 그리고 곧바로 12월 중국 베이징(北京) 한·중·일 3국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과의 회담이 열릴 예정이며, 화이트리스트 수출규제와 관련한 한·일 정부 간 국장급 회의도 열린다고 발표했다. 이런 발표들을 두고 일본이 ‘당장’ 규제를 풀 듯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누가 봐도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지소미아 사태 일단락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의 자세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자학적 무리수를 둔 것은 한국이다. 지소미아 반대와 찬성을 넘어 한·일 양국 간 문제를 유리하게 풀기 위한 전략전술이란 측면에서 너무나도 초라했다. 동맹인 미국을 자극하는 안보 문제를 느닷없이 꺼내든 결과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2019년 한·미·일 관계와 너무 비슷한 상황

2019년 말 한·미·일 관계를 분석할 때 주목해야 할 역사적 교훈이 하나 있다. 지소미아 문제가 왜 처음부터 자학적인 무리수였는지, 왜 일본은 타협에 나서지 않았는지, 미국은 한국의 입장과 문제제기를 왜 멀리했는지…. 이런 의문점들은 어제의 역사를 살펴보면 가닥을 잡을 수 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 2019년 한·미·일 3국간 정세는 1945년 8월 15일부터 1950년 1월 12일 애치슨라인이 선포될 때까지의 상황과 너무도 비슷하다. 그 당시 4년5개월 동안 한·미·일 역학관계를 지소미아 사태와 비교해보면 두 가지 공통분모가 떠오른다. 일본에서 팽배한 혐한 분위기와 미국의 일본 동조다.

2019년 달아오른 일본 내 혐한 정서의 역사적 뿌리이자, 전쟁 피해자인 한국보다 전범국인 일본을 친구로 받아들인 미국 대외정책의 출발점이 바로 70여년 전 상황에 있다. 광복 이후 들이닥친 분단 한반도, 미군정 점령군체제(GHQ)하의 패전국 일본, 소비에트란 새로운 공산독재 경쟁자를 만난 미국. 이들 3국 사이에서 벌어진 어제의 역사가, 2019년 아니 정확하게는 문재인 대통령 이후의 3국 간 현실에 대비된다. 패자가 되지 않으려면, 또 다시 실패를 하지 않으려면, 어제의 역사를 교훈으로 삼아 적극 활용해야 한다. 승자가 아닌, 패자를 위한 지침서가 역사의 진짜 의미일 듯하다. 광복 이후 애치슨라인이 그어지기까지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주 무대는 일본 도쿄(東京)다. 일본 역사가들은 패전 직후 1945년 8월부터 1950년 6월 6·25전쟁 발발까지를 ‘블랙홀 시대’로 규정한다. 천황, 국가, 민족, 윤리, 도덕이라는 기존의 일본적 가치가 한순간 블랙홀로 빨려들어간 시기라는 의미다. 쉽게 말해 ‘생존우선’이란 이름의 블랙홀이다. 육체적·물리적·형이하학적 차원의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모든 것을 지배하던 시기다. 이미 1940년대 초부터 부분적으로 나타났지만 전후 극단으로 치닫게 된다. 도쿄를 비롯한 대도시가 블랙홀의 최전선이다. 당시 일본 정부는 특단의 조치가 없을 경우 전후 1년 내 1000만명의 기아 사망자가 나올 것으로 전망했다. 거지로 돌변한 수백만 명의 일본군이 조선·중국·동남아시아에서 귀국하면서 사회적 혼란은 한층 더 극에 달했다. 일본인 모두가 박수를 치던 제국군대는 하루아침에 인간쓰레기 패잔병 취급을 받는다.

1950년 1월 12일 선포된 애치슨라인. 한국은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제외돼 있다.
1950년 1월 12일 선포된 애치슨라인. 한국은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제외돼 있다.

일본에 거주하던 56만 조선인

‘일본 내 비(非)일본인’은 이런 블랙홀에 빨려들어갈 때 터진 문제 중 하나다. 특히 8월 15일 항복 이전까지만 해도 황국신민으로 통하던 조선·대만·중국 출신자들과 연관된 문제다. 당시 이런저런 이유로 일본에 머문 비일본인들은 200만명에 이르렀다. 이 중 조선인은 가장 많은 56만명이었다. 한창 전쟁 때는 무려 200만명의 조선인이 일본에 머물렀다. 학생도 있지만 대부분은 징용군인들이다. 56만 조선인은 자신들을 위한 보호막으로 1945년 10월 ‘재일 조선인연맹’이란 조직을 결성한다. 곧바로 일본 전국에 약 300개의 지부를 설치한다. 500여개에 달하는 재일 조선인 학교도 급조된다. 이곳에서 금기시되던 조선어가 일본어를 대신한다.

종전 후 1년간은 일본 역사에서 ‘제로년(年)’으로 통한다. 기존의 질서가 180도 뒤바뀌면서 사회 전체가 카오스로 치달은 시기다. 악귀라 불리던 어제의 적에게 몸을 파는 여성들이 넘쳐났다. 대학 출신 여성들이라도 담배 한 갑, 통조림 하나를 위해 구적(舊敵)을 상대했다. 1억명 옥쇄를 부르짖던 남성들은 음식쓰레기를 찾아 미군 부대 주변으로 몰려갔다. 다리 밑이나 하수관 주변은 버려진 고아로 미어터졌다. ‘제로년’은 일본인 모두가 침묵하는, 일본 역사의 악몽이자 수치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56만 조선인은 어떤 식으로 위기를 극복했을까. 전국 300여개의 조선인연맹 지부가 유일한 보호막이었다. 당시 조선인 대부분은 일본어도 서툴고 일본 사정도 잘 모르는, 사실상 외국인이었다. 일본에서 공부를 한 ‘일본통’이 중심이 된 조선인연맹이 생존을 책임질 언덕으로 떠오른 배경이다. ‘일본통’ 대부분은 사회주의에 빠진 대학 출신 지식인들이었다. 전쟁 중 재일 조선 지식인의 주류는 스탈린에 동조하는 소비에트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사회주의야말로 독립, 남북통일, 번영으로 향하는 대안이라 확신했다. ‘일본통’ 사회주의자들은 1945년 10월 평양에 등장한 김일성을 영도자로 여기기까지 했다. 그러나 일본인 기아자도 속출하는 판에 장밋빛 이념만으로 살 수는 없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살아갈 수 없던 시기의 비정상, 즉 불법적 행위에 의한 생존을 도모할 수밖에 없었고 조선인연맹도 그 같은 시대 분위기에 편승했다.

초법적 존재의 조선인연맹

1945년 맥아더 장군과 함께 미 육군 4만5000명이 일본에 주둔한다. 이들의 주된 임무는 도쿄 황궁 주변 GHQ사령부 경비와 전범자 처리, 급조된 미군 부대 건설에 집중됐다. 일본군이 해체되면서 국내 치안의 대부분은 일본 경찰에 맡겨졌다. 그러나 조선인연맹은 일본 경찰을 완전히 무시했다. 재일 조선인을 괴롭힌 과거 경찰에 대한 울분과 고통을 생각하면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상황이다. 일본 경찰은 GHQ의 하수인에 불과했다.

일본 경찰은 미국식 민주주의란 대의명분 때문에 조선인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잘못 다뤘다가는 자신에게도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했다. 때린 놈은 다리를 못 뻗고 자도, 맞은 놈은 다리를 뻗고 잔다는 말이 있다. 고의 여부와 무관하게 전쟁 중 일본인의 모든 행동이 죄악시되던 시기였다. 자칫 전범자로 찍히면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다는 것이 당시 일본 사회의 분위기였다. 전승국 미국에 120% 순종해야만 하는 것이 패전국 일본의 운명이었다. 식민지 피해자인 조선인은 그 같은 어두운 공기와 무관했다.

반대로 어두운 공기를 생존수단으로 ‘적극’ 활용해나갔다. 승전국 GHQ와 패전국 일본 사이에서 생존의 길을 찾아나섰다. 식민지 당시 입은 피해의 보상심리 때문이겠지만 56만 조선인들은 생존을 위해서라면 불법활동도 ‘거침없이’ 행했다.

그러나 일부에서 도를 넘어서는 조선인연맹의 생존방식이 나타나게 된다. 마치 스스로가 전승국 국민인 것처럼 행세하면서 초법적 조직으로 변해가는 사례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일부 조선인연맹 조직이 스스로 치외법권 해방지구임을 자임한다. 사실 당시 일본인 중 일부는 조선을 전승국이라 오인하기도 했다. 전후 경제가 추락하면서 소위 ‘야미(闇)시장’이란 불법 공간이 일본 전역에 퍼져나가는데 이것이 특히 문제였다. 6·25전쟁 중 탄생한 미제 PX제품 거래시장과 비슷하다. 조선인연맹은 야미시장 이권의 상당 부분을 ‘폭력으로’ 접수했다. 승전국 점령군처럼 일본인 불법 노점상들을 관리·통제하면서 수익도 늘려갔다. 당시의 상황은 전후 1950년대 배경의 일본 흑백영화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인은 야미시장만이 아니라 기업에도 영향력을 키워나간다. 당연한 일이지만 곳곳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경찰과의 대립은 기본이다. 이어 토착 일본인 야쿠자(ヤクザ)와의 이권다툼도 벌어진다.

야마구치구미(山口組)는 21세기 일본을 대표하는 전국 단위 야쿠자 조직이다. 원래 고베에서 시작한 야쿠자지만, 총알이 오가는 ‘전쟁’ 끝에 조선인연맹을 제압한 공로로 도쿄에 진출한다. 불법·초법 조선인연맹을 타도한, ‘애국 야쿠자’란 브랜드를 통해 한순간 세를 불려나갔다. 무법천지 상황에서 벌어진 조선인연맹과의 ‘전쟁’은 전후 야쿠자 얘기의 주된 테마로 다뤄진다. 코미디처럼 느껴지지만, 범죄단체가 아닌 ‘국민영웅’으로서의 야쿠자다. 조선인연맹은 패전국 일본의 경찰이나 야쿠자만이 아니라 GHQ 영역까지 치고 들어간다. 노동쟁의를 통한 반미 데모에 조선인연맹이 앞장선다. 소비에트의 사주를 받은 일본 공산당은 조선인 사회주의자를 앞세운 반미운동에 적극 나선다.

1948년 8월 벌어진 한신 교육투쟁 당시 경찰과 맞서는 시위대들.
1948년 8월 벌어진 한신 교육투쟁 당시 경찰과 맞서는 시위대들.

GHQ 훈령 ‘조선인을 적으로 간주해도 된다’

조선인연맹의 활동이 과격해지면서 GHQ의 조선인 정책도 급변한다. 미국과 소비에트와의 경쟁이 시작되면서 사회주의자로 뒤덮인 조선인연맹은 적대시된다. ‘조선인이 해방된(Liberated) 국민이기는 하지만, 필요시에는 적(Enemy)으로 간주해도 된다’는 GHQ 훈령도 미군에 하달된다. 1947년 5월 3일, 평화헌법으로 불리는 일본헌법이 시행된다. 하루 앞선 5월 2일 외국인 등록령이 GHQ 명령으로 발동한다. 황국신민으로 불리던 56만 조선인이 ‘한순간’ 외국인으로 바뀌게 된 법이다. 조선인은 헌법 시행 이전까지만 해도 ‘법률상’ 일본인으로 취급됐다. 모두 일본의 요청에 근거했지만, 최종 결정자는 GHQ였다. 외국인 등록령은 56만 조선인이 일본만이 아니라 GHQ로 상징되는 미국으로부터도 배척됐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헌법 시행과 함께 500여 조선인 학교 처리 문제도 긴급현안으로 떠오른다. 일본 정부가 인정하지 않는 조선인 학교에서, 일본어가 아닌 조선어만 가르친다는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식민지 당시의 조선어를 둘러싼 핍박을 생각하면, 조선어를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일본 내 불법학교라 규정하면서 전면 폐지로 몰아간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연맹은 민족운동 차원의 교육투쟁에 나선다. 1만명 이상 모이는 데모가 빈발하면서 일본 경찰만이 아니라 GHQ도 사태에 휘말리게 된다.

1948년 4월 24일 고베에서 조선민주청년동맹 단원들이 현지 도지사 사무실에 난입해 감금 폭행하는 일이 벌어진다. 도지사가 관할 내 조선인 학교를 일방 폐지한 데 따른 데모였다. 조선인만이 아닌 일본 공산당도 데모에 함께 참가한다. 일본 경찰은 대규모 폭력 데모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GHQ는 깜짝 놀라 곧바로 계엄령을 발동한다. 일본 역사를 통틀어 ‘유일한’ 무력 동원 계엄령이다. GHQ는 데모가 발발할 경우 총으로 대응해도 좋다는 훈령을 전국에 발동한다.

계엄체제임에도 불구하고 1948년 4월 26일 그 유명한 한신(阪神) 교육투쟁이 오사카에서 터진다. 물론 조선인 학교 폐지 문제가 데모의 주된 이유였다. 일본 공산당도 역시 적극 참여했고, GHQ는 ‘조선인 데모=스탈린 지시를 받는 공산혁명운동’으로 이해했다. 교육 문제가 아닌, 일본열도 공산화를 위한 전초전으로 받아들였다는 의미다. 직전에 제주도에서 발발한 1948년 4·3사태는 교육투쟁의 의미를 공산주의 활동으로 연결시키는 계기가 됐다. 불행하게도 한신 교육투쟁 도중 16살 조선인 김태일(金太一)이 계엄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한다. 무려 1732명이 체포되고 136명이 기소된다. 이후 산발적으로 조선인 데모가 이어지지만, GHQ의 적극적인 무력대응으로 영향력은 급강하한다.

GHQ 보고서가 애치슨라인의 핵심 변수

1950년 1월 애치슨라인이 그어진 배경은 여러 각도에서 풀이될 수 있다. 소비에트 전문가 조지 케넌(George Kennan)의 대공산 봉쇄정책의 결과지만, 일본의 GHQ가 작성한 한반도에 대한 정보나 이미지도 결정적 원인이 됐다고 볼 수 있다. 이승만 체제하의 남한이나 북한을 통한 정보가 아니라 ‘일본발’ GHQ 보고서가 애치슨라인의 핵심변수였다는 의미다. 당시 일본에서 미군이 얻은 정보의 대부분은 일본인을 통해 수집된 결과물이다. 조선인연맹이 승전국 시민 행세를 하는 과정에서 일본 내 혐한 정서가 극에 달했다는 점을 감안해볼 때 일본인들이 GHQ에 제공한 정보가 어떠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지소미아 문제는 일본의 혐한 정서가 팽배한 상태에서 터져나왔다. 여러 정황을 통해 드러나지만, 지소미아 문제가 악화되는 동안 미국은 일본에 동조했다. 한국이 아닌 일본의 주장이 한·미·일 3국 관계에 더 강하게 영향을 미쳤다. 전후 혼란기에서처럼, 일본이 혐한으로 뭉칠 경우 미국은 한국이 아닌 일본을 선택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우리는 되새겨봐야 한다. ‘우리끼리’를 앞세우는 민족제일주의자들이 보면, 일본과 일본 편만 드는 미국과의 관계도 끊어야 한다는 명분이자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진짜 바보는 쓸데없이 상대를 자극해 극단으로 몰아가는 우물 안 개구리들이다. 아무 득도 없는 자학적 행위를 통해 ‘일본 내 혐한+미국의 일본 동조’를 부채질하는 행위가 문제의 발단이다.

지소미아 사태는 해결이 아니라 출발에 불과하다. 일본의 혐한 정서는 아직 식을 줄 모른다. 아니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더불어 미국의 일본 동조도 점점 더해갈 가능성이 크다. 반일에 근거한 한국 정부의 자학적 외교가 계속되는 한, 업그레이드된 미·일 일체화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아직 애치슨라인까지 가지는 않았다. 한물간 이념과 아집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변형된 애치슨라인 2.0은 언제라도 한반도에 밀려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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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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