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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86호] 2019.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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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호의 正眼世論]청와대 민정수석실을 폐(廢)하라

신지호  평론가·전 국회의원 jayho63@gmail.com

▲ 자유한국당은 백원우 전 청와대 민정비서관이 속한 민정특감반 사무실이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창성동 별관에서 따로 운영됐다고 주장했다. photo 뉴시스
조국 사태가 끝물로 접어드나 했더니 그의 민정수석 재직 시의 권력 오·남용 문제가 새롭게 도마에 올랐다. 백원우라는 정권 실세가 전면에 등장하면서 조국 개인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었으나, 청와대 민정수석실 자체가 전 국민적 관찰 대상으로 떠올랐다.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온 나라를 시끄럽게 만드는가.
   
   국회의원 시절 청와대 인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민정수석실의 힘은 다른 모든 수석실의 힘을 다 합쳐놓은 것보다 세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사정(司正)권력 때문이었다. 민정수석실은 검찰과 경찰, 국가정보원, 감사원, 국세청 등 5대 권력기관을 총괄한다. 대통령 친·인척 비리 및 고위공직자에 대한 감찰권도 민정수석실에 있다. 감찰반 6급 직원이 장관을 독대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민정수석실은 국가 사정권력의 정점에 위치한다.
   
   그런데 원래 민정이란 이런 게 아니다. ‘민정(民情)’은 민초들의 사정과 생활 형편을 뜻한다. 4서3경 중 제왕학의 교과서라 불리는 ‘대학(大學)’에 보면 군주가 필히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찰민정 변인재(察民情 辨人才)’가 나온다. 백성의 사정을 잘 살피고 인재를 잘 고르라는 것이다. 이처럼 민정의 본래 기능은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과 최고 권력기관인 청와대가 민심을 정확하게 읽고 이를 국정에 반영해 정책을 펼치도록 보좌하는 역할이다. 자칫 외딴섬이 될 수 있는 청와대, 즉 대통령과 국민을 잇는 연결고리이기도 하다. 대통령의 눈과 귀가 되어야 하는 곳이다.
   
   그렇다면 민정수석실의 역사는 어떻게 되나? 대한민국 정부 출범은 1948년 8월 15일이지만, 대통령 비서실이 생긴 것은 무려 12년 후인 1960년 8월 13일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에는 민정수석실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민정수석실은 박정희 정부 때인 1968년 3월에 신설되었다. 초대 민정수석은 정치인 출신인 유승원(1968년 3월 21일~1970년 12월 9일)이었다. 1970년 12월에는 민정수석실을 폐지하고 정보수석실과 민원수석비서관실을 신설하였다가, 1971년 7월 다시 민정수석실로 통합되었다. 제2대 민정수석 김시진(1971년 6월 12일~1974년 2월 5일)은 군인 출신이었고, 제3대 박승규 수석(1974년 2월 5일~1980년 1월 1일)은 대학교수 출신이었다. 박승규 민정수석은 최태민을 조사하기도 하였다.
   
   전두환 정부 들어서는 민정수석실과 사정수석실로 나뉘었는데, 초대 사정수석은 허문도·허화평과 함께 ‘3허(許)’로 불린 육사 출신 허삼수 전 보안사령부 인사처장(1980년 9월 9일~1982년 12월 20일)이 맡았다. 후임은 관료 출신인 정관용(1982년 12월 20일~1986년 1월 8일), 검사 출신인 김종건(1986년 1월 9일~1987년 5월 26일), 법조인으로 해군준장과 국회의원을 거친 이양우(1987년 5월 30일~1988년 2월 24일) 등이었다. 한편 민정수석은 이학봉(1980년 9월 9일~1986년 1월 8일), 김용갑(1986년 1월 14일~1988년 2월 24일) 등 군인 출신이었는데, 김용갑 민정수석은 전두환을 설득하여 이른바 ‘땡전뉴스’를 없애기도 하였다. 요컨대 전두환 청와대에 사정수석실이 생기면서 청와대가 공식적으로 사정권력의 정점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노태우 정부는 출범하면서 사정수석실을 민정수석실로 통합했는데, 초대 민정수석에는 대검 중수부 출신의 한영석 전 법무부 차관(1988년 3월 7일~1989년 3월 25일)이 자리했고 후임인 정구영(1989년 3월 25일~1990년 12월 6일)도 검찰 출신이었다. 1990년 12월에는 사정수석실을 다시 설치하였는데 김영일(1990년 12월 27일~1992년 2월 6일), 김유후(1992년 2월 6일~1993년 2월 24일) 모두 검찰 출신이었다.
   
   김영삼 정부 시절에는 사정수석을 민정수석으로 통합하면서 공안검사 출신으로 국정원 1차장을 지낸 김영수 민주자유당 의원이 초대 민정수석(1993년 2월 25일~1995년 12월 20일)으로 발탁됐다. 후임으로는 역시 검찰 출신의 문종수 수석(1995년 12월 20일~1998년 2월 24일)이 바통을 이었다.
   
   민정수석실의 역할과 힘이 지나치게 비대해지자 김대중 정부는 민정수석실을 폐지하고 민정비서관과 법무비서관을 비서실장 직속에 배치했다. 그러나 정권 2년 차인 1999년 6월 민정수석실은 다시 부활한다. 민의수렴이 원활하지 않다는 명분이었지만, 옷 로비 사건이 터지자 사정기관 장악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초대 김성재 수석만 교수 출신이었고 신광옥, 김학재, 이재신 등 후임 수석들은 모두 검찰 고위직 출신이었다.
   
   은밀하게 활동해 베일에 싸여 있던 민정수석의 권한이 쟁점으로 떠오른 것은 박근혜 청와대의 우병우 민정수석이 검찰 조사를 받게 되면서다. 우병우는 ‘국정농단 방조’ 관련 혐의와 민간인·공무원 불법사찰과 과학·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을 지시한 직권남용·강요·직무유기 등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 막대한 권한과 정보를 쥐고 있으면서 합법과 불법의 경계가 모호하고 직무 범위에 대한 명확한 구분이 없는 민정수석 업무의 문제점이 우병우 사건으로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민정수석의 업무에 대한 법적 판단은 우병우에 대한 대법원 확정판결에 따라 좀 더 분명해질 것이다.
   
   그런데 박근혜 국정농단에 대한 반(反)작용으로 출범한 문재인 청와대에서도 사정기능에 대한 잡음은 끊이지 않고 있다. 김태우 전 특별감찰반원의 민간인 사찰 폭로에 이어 현재 검찰 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에 대한 감찰무마 의혹이나 김기현 전 울산시장에 대한 기획·하명수사 의혹으로 민정수석실의 월권과 직권남용 여부가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다. 김기현 첩보 보고서 작성은 행정부 소속 고위공직자, 공공기관·단체 등의 장 및 임원, 대통령의 친족 및 대통령과 특수한 관계에 있는 사람에 대한 감찰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감찰반을 둔다는 대통령 비서실 직제 제7조 1항의 범위 밖 행위다. 조국과 백원우는 우병우에 이어 직권남용 등으로 사법처리될 가능성이 크다.
   
   사람만 바뀌었지 시스템이 그대로인 상태에서는 동일한 불행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민정수석에 비(非)검찰 출신 인사를 기용한다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최근 사태는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보다 근본적인 처방이 필요하다. 핵심은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사정 컨트롤타워로 기능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민정수석의 사정 기능은 제왕적 대통령제의 가장 강력한 제도적 기반이다. 그것은 정치와 사법의 분리라는 권력분립 원칙을 훼손하고 정치도구로서의 사정, 즉 사법의 정치화를 초래해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망가뜨린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광화문 대통령’을 약속했지만, 지키지 못했다. 그 허언(虛言)을 만회할 수 있는 길은 ‘민정’이라는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나 괴물이 되어버린 청와대 민정수석실을 폐(廢)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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