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12월 23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정상회담 전 악수를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문재인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12월 23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정상회담 전 악수를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경기 가평에는 조종암(朝宗巖)이 있다. 이 바위에는 조선 제14대 국왕인 선조(宣祖)가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내준 명나라에 감사하는 뜻으로 쓴 ‘만절필동(萬折必東) 재조번방(再造藩邦)’이라는 친필 글씨가 새겨져 있다. 만절필동은 황하의 물줄기가 수없이 꺾여도 결국은 동쪽으로 흐른다는 뜻으로 충신의 절개, 즉 천자를 향한 제후들의 충성을 말한다. 재조번방은 오랑캐 나라를 다시 세워주셨다는 뜻이다. 만절필동은 대표적인 사대주의자 송시열이 명나라 숙종과 의종을 모시기 위해 고향에 세운 만동묘(萬東廟)의 어원이기도 하다. 이처럼 만절필동은 조선의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의미하는 대표적인 사자성어로 자리매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영민 대통령 비서실장은 2017년 12월 5일 주중대사 신임장을 제정하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난 후 방명록에 ‘만절필동’이라는 문구를 쓰기도 했다. 당시 노 대사는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갈등 등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한·중 관계가 다시 잘 풀릴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주한미군 사드 배치에 따른 중국의 경제 보복조치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중국의 사드 해결 요구에 입 닫은 대통령

왕이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은 지난 12월 4~5일 한국을 방문해 사드 문제 해결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왕 부장은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해 강경화 외교부 장관 등을 만난 자리에서 사드 문제를 거론하면서 한국의 동맹인 미국을 비판했다. 왕 부장의 이런 오만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청와대와 외교부가 제대로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문 대통령이나 강 장관은 사드 배치의 진의를 설명하고 중국 정부의 보복 해제를 요구했어야 했지만, 이런 언급이 없었다. 게다가 문 대통령이나 강 장관은 동맹국인 미국을 비판한 것에 대해서도 당당히 반박했어야 했지만 침묵으로 일관했다.

중국은 이전에도 정상회담은 물론 외교·국방 장관 회담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해 기회가 될 때마다 사드 문제의 해결을 지속적으로 압박해왔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12월 23일 중국을 방문한 문 대통령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가진 정상회담에서 “사드 문제가 타당하게 해결되길 바란다”며 사실상 사드 철수를 요구했다. 이에 앞서 시 주석은 지난 6월 일본 오사카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에 참석한 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도 “사드 문제의 해결방안들이 검토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웨이펑허 중국 국방부장은 지난 11월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세안확대국방장관회의(ADMM-Plus)에 참석한 정경두 국방부 장관과의 양국 국방장관 회담에서 “사드 배치 문제를 적절히 처리해달라”고 주장했다. 문재인 정부는 2017년 10월 중국의 보복조치를 철회하는 대가로 이른바 ‘3불(不)’이라는 굴욕적인 양보조치를 약속했었다. 3불의 내용을 보면 추가 사드를 배치하지 않고, 미국의 미사일방어체계(MD)에 가입하지 않으며, 한·미·일 군사동맹을 체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지금까지 이에 대해 반대급부로 약속한 보복조치를 철회하지 않았다.

‘운명공동체’라는 말의 심각성

문재인 정부는 그동안 중국 정부에 사드 보복 등은 물론 전투기의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 무시, 화웨이의 통신장비, 역사왜곡, 미세먼지 등에 대해 ‘NO’라는 말을 제대로 한 적이 없다. 특히 문 대통령은 중국의 ‘입맛’에 맞는 발언만 해왔다. 문 대통령은 최근 정상회담에서도 시 주석에게 “한국과 중국은 오랫동안 교류하고 문화적 유대를 쌓아왔으며 양국은 운명공동체”라면서 “한국은 중국의 중대한 문제에 대한 입장을 이해하고 중국과 함께 지역 및 국제 문제에 대한 소통과 협력을 강화하길 원한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2017년 12월 14일 정상회담에서도 “한·중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운명공동체의 관계”라고 강조한 적이 있다. ‘운명공동체’라는 용어는 중국 정부가 자국과 전략적 우호관계를 맺는 국가에 사용해온 표현으로 일종의 ‘동맹관계’를 말한다. 중국 정부는 미국의 견제를 의식해 동맹 대신에 운명공동체라는 용어를 사용해왔다. 다시 말해 운명공동체는 중국의 패권을 인정하고 중국식 모델을 따른다는 의미다. 문 대통령의 운명공동체 발언은 조선시대의 만절필동과 마찬가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특히 중국 관영 언론들은 문 대통령이 시 주석에게 홍콩과 신장(新疆)위구르 문제는 모두 중국 내정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중국 정부는 지난 6월 9일부터 지금까지 홍콩에서 계속되어온 시민과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와 신장위구르자치구 지역에서 자행되고 있는 인권탄압 문제 등에 대해 국제사회에 ‘내정에 간섭하지 말 것’을 요구해왔다. 반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11월 27일 의회를 통과한 홍콩인권법에 서명해 이 법을 발효시켰다. 미국 하원은 또 12월 3일 신장위구르자치구에서 중국 정부의 위구르족 등 소수민족의 인권탄압을 규탄하면서 위구르족 구금시설 폐쇄를 촉구하고, 중국 정부의 인권탄압에 가담한 인사들을 제재하는 내용의 위구르인권법을 통과시켰다. 국제 인권단체들과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는 중국 정부가 전체 위구르족 주민들 중에서 최대 100만명을 재판 절차 없이 강제수용소에 비밀리에 구금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 언론들의 보도가 사실이라면 문 대통령은 중국 정부의 입장을 지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청와대는 “시 주석이 홍콩·신장위구르 문제는 중국의 내정 문제라고 설명했고, 이에 대해 문 대통령은 ‘시 주석의 언급을 잘 들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겅솽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해당 보도에 대한 기자들의 논평을 요청받자 ‘사실’이라는 취지로 답변했다. 문 대통령 발언의 진위 여부를 떠나 홍콩과 신장위구르 인권 문제는 국제사회가 가장 중요하게 간주해온 사안이다. 때문에 문 대통령은 시 주석의 발언에 맞장구를 칠 것이 아니라 인권변호사 출신으로서 당연히 중국 정부의 조치를 비판했어야 했다.

지난 12월 23일 쓰촨성 청두 수정회관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 환영 만찬에서 리커창 중국 국무원 총리가 건배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 12월 23일 쓰촨성 청두 수정회관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 환영 만찬에서 리커창 중국 국무원 총리가 건배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홍콩·위구르 사태가 중국 내정인가

시 주석은 또 문 대통령에게 “보호주의와 일방주의, 패권 행위가 글로벌 거버넌스를 교란하고 세계의 평화와 안정을 위협한다”며 미국을 겨냥해 강경하게 비판했다. 이에 대해 중국 관영 언론들은 “문 대통령이 중국의 입장을 이해하며 자유무역을 지지한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중국 관영 언론들의 보도가 맞는다면 문 대통령은 한국의 핵심 군사동맹국인 미국이 북한의 도발 등에 대비해 주한미군을 주둔시키는 것이 세계의 평화와 안정을 위협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문 대통령의 발언은 한국이 자유 및 다자 무역 체제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문 대통령이 동맹국인 미국을 비판하는 시 주석의 지나친 언사에 동조한다는 것은 내심 지금까지 숨겨온 반미주의를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문 대통령은 “시 주석과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구상과 한국의 신남방·신북방정책 간의 연계 협력을 모색하기로 합의한 이후 최근 구체적 협력방안을 담은 공동보고서가 채택됐다”면서 “이를 토대로 제3국에 공동 진출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다양한 협력사업들이 조속히 실행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일대일로는 시 주석이 강력하게 추진하는 중국 주도의 세계 패권 전략이다. 문 대통령의 발언은 시 주석과 중국 정부의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협력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입장 표명은 문 대통령이 지난 6월 30일 서울에서 가진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신남방정책과 인도·태평양 전략의 조화로운 협력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힌 대목과 어긋난다. 미국은 중국이 일대일로를 앞세워 급속하게 세력을 넓혀가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인도·태평양 전략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인도·태평양 전략의 핵심은 인도와 일본, 호주 등 태평양 지역 동맹국과 함께 중국의 해양 진출을 견제·봉쇄하겠다는 것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6월 평양을 방문, 김정은과 함께 북한군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photo 인민일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6월 평양을 방문, 김정은과 함께 북한군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photo 인민일보

양다리 전략의 속내

문 대통령의 발언을 볼 때 ‘양다리 전략’을 구사하겠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실제로 문 대통령의 속내는 인도·태평양 전략보다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선호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문 대통령은 지난 12월 3일 청두에서 가진 리커창 중국 총리와의 회담에서 한반도 평화지대 조성을 기반으로 추진해온 ‘동아시아 철도공동체’ 비전을 언급하면서 남북 철도 연결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철도공동체 구상은 한국과 북한을 비롯해 중국·일본·러시아·몽골 등 6개국이 우선 철도 연결을 중심으로 경제공동체를 조성한 뒤, 안보공동체로 넓혀 동아시아의 항구적 평화를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문 대통령은 리 총리에게 청두에서 유럽까지 1만여㎞에 이르는 고속철도를 언급하며 “끊어진 남과 북의 철도와 도로가 완전히 이어지고 한반도에서 중국, 유럽까지 그물망처럼 연결되는 유라시아 물류 혈맥의 완성은 다자평화안보체제로 발전하는 기반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리 총리에게 중국이 ‘동아시아 철도공동체’ 비전 실현의 동반자가 돼달라고 요청했고, 리 총리는 “중국도 함께 구상할 용의가 있다”고 화답했다. 중국 정부의 입장에선 한국이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참여하겠다는데 마다할 리가 없다. 결국 문 대통령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신남방정책의 협력 운운은 중국으로 기울지 않았다면서 미국을 달래려는 제스처인 셈이다.

문 대통령은 가장 중요한 북한 비핵화 문제에서도 중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일본 언론들은 문 대통령과 시 주석이 북한에 대한 입장이 같다는 것을 강조했으며 제재 완화에 대해 암묵적인 합의를 보였다고 보도했다. 요미우리신문은 “시 주석이 문 대통령에게 중국과 러시아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대북 제재를 일부 완화하는 결의안을 제시한 것에 동의를 구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이 신문은 “문 대통령이 동맹국인 미국이 대북 제재를 견지하고 있어 표면적으로는 중·러의 제재 완화에 찬성할 수 없다”면서도 “대북 제재 해제의 필요성에 대해 중국과 암묵적인 합의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고 강조했다. 특히 이 신문은 “문재인 정부는 남북 경제협력 사업과 금강산 관광 재개 등을 미국의 동의 없이 실시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면서 “제재 완화를 지지하는 한·중·러와 제재 유지를 주장하는 미·일의 ‘3 대 2’ 구도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청와대 핵심 관리는 “한·중 정상이 중국과 러시아의 대북 제재 완화 결의안을 논의했다”면서 “한반도 안보가 굉장히 엄중한 시점에 있는 상황에서 다양한 국제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중·러의 대북 제재 완화 결의안을 보면 해외 파견 북한 노동자 송환 제재 결의(2397호) 해제, 수산물·섬유를 북한의 수출 금지 품목으로 확대(2371호·2375호)한 제재 결의의 해제, 남북 철도·도로 협력 사업의 유엔 제재 대상에서 제외 등이 포함돼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의 인도주의적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주민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부분에서의 제재 해제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특히 남북 경의선·동해선 철도·도로의 연결 및 현대화는 남북 정상이 4·27 판문점 선언에서 합의한 사항이라는 점에서 볼 때 문재인 정부가 물밑에서 중국 및 러시아와 밀접하게 조율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문재인 정부는 북한의 도발을 막고 미국과의 비핵화 협상을 위해 중국의 중재에 의존하는 전략을 선택한 것이다. 이와 관련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시 주석이 중국과 한국은 한반도 문제에 대한 입장과 이익이 일치한다고 밝혔다”며 “시 주석이 대화를 통한 북핵 문제 해결 의지를 강조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이 ‘중국 역할론’ 카드를 꺼내든 것은 ‘오판’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김정은이 ‘새로운 길’을 주장하면서 미국에 강경하게 대응하는 것은 중국의 뒷배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과 북한의 정면충돌을 부추긴 주범은 중국이다. 시 주석은 지난 6월 20~21일 평양을 방문해 김정은에게 ‘리소넝지(力所能及·힘이 닿는 한)’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경제와 안보 문제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북한 정권이 국제사회의 강력한 제재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것은 중국 때문이다. 북한 정권은 6·25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현재도 중국의 지원이 없다면 생존이 불가능하다. 중국은 지금도 식량과 원유 등을 무상지원하고 있고 관광객들까지 대거 보내고 있다. 중국이 제대로 제재에 나서고 탈북자들을 대거 받아들이는 등 국경을 개방하는 조치를 취한다면 북한 정권은 붕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국은 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개발해온 북한을 미국을 견제하는 지렛대와 전략적 자산으로 활용해왔다. 중국은 또 북한을 고리로 한국까지 자국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시도해왔다.

문재인 정부의 친중 정책은 ‘소중화(小中華)’ 노선이나 마찬가지다. 중국의 속셈은 한국과 북한을 모두 ‘21세기판 조공체제’에 편입시키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모화사상(慕華思想·중국이나 중국의 문물을 섬기며 따르려는 것)’에서 벗어나 중국에 ‘NO’라고 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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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훈 국제문제애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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