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지난 1월 2일 오전 국회 본청 계단 앞에서 선거법 및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본회의 통과에 대한 사과의 의미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 ⓒphoto 뉴시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지난 1월 2일 오전 국회 본청 계단 앞에서 선거법 및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본회의 통과에 대한 사과의 의미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금도 친박계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2008년 18대 총선 하면 떠오르는 키워드로 ‘공천학살’을 꼽는다. 당시 친박계 인사 중 상당수가 친이계에 밀려 공천에서 탈락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친박계가 공천학살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18대 총선은 역설적으로 한나라당이 역대급 압승을 한 선거로 기록돼 있다. 당시 한나라당이 가져간 의석수만 153석. 친박연대와 친박무소속 의원, 자유선진당까지 포함하면 약 200석에 가까운 의석을 보수정당이 가져갔다. 최근 더불어민주당이 패스트트랙 법안들을 범여권과 ‘4+1협의체’란 이름으로 공조해 통과시킨 것에 비추어 보면 200석은 마음만 먹으면 개헌까지도 시도해볼 만한 의석이었다.

학살이냐 개혁이냐

물론 이 선거는 당시 여당이었던 한나라당, 그 안에서도 친이계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가운데서 치러졌다. 무엇보다 대통령이 취임하던 해에 치러진 총선이란 점에서 기본적으로 ‘국정안정론’의 프레임 속에서 선거가 진행됐다. 46.8%라는 낮은 투표율도 압승의 원인이 됐다. 당시 참여정부 지지자들이 정권을 빼앗긴 무력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것들만으로는 당시 압승의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당시 선거를 정확하게 분석하려면 보수정당이 영남과 충청 등 지방이 아닌 서울, 경기, 인천 등 수도권에서 압승한 이유를 찾아야 한다. 젊은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는 수도권에서의 압승은 단순 정치지형의 유불리만으로 해석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당시 중도 성향의 수도권 젊은층 유권자들의 표심을 얻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친박계 인사들은 당시 선거 공천과정을 ‘학살’로 표현하지만, 정치권에서는 개혁적 공천이었단 평가가 더 많다. 물론 ‘학살’이냐 ‘개혁’이냐는 시선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최근 몇 차례 치러진 총선에서는 예외 없이 현역 물갈이 비율이 높은 당이 승리를 거뒀다는 면에서 당시 대대적 물갈이는 압승의 밑거름이 됐다. 18대 총선에서는 한나라당 의원 중 초선 비율이 53.6%에 달했다. 자유한국당 전신인 새누리당의 2012년 19대 총선에서 초선 비율도 51.3%나 됐고 새누리당은 152석을 얻었다. 하지만 20대 총선의 초선 비율은 36.9%에 불과했다. 물론 18대 총선은 여의도 정치판에 세력이 많지 않았던 이명박 대통령이 자신의 우군을 만들려다 보니 초선 비율이 높아진 측면도 있지만, 공천 과정에서 핵심 친이 세력을 탈락시키면서 개혁적 면모를 부각시킨 전략이 통했다는 평가다. 당시 공천 과정에 깊이 개입했던 한 인사는 주간조선에 “보수는 계속 개혁하고 혁신할 때 중도층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기본적인 전략이 통했다”고 말했다.

18대 총선 한나라당 공천 과정에서 가장 회자되는 사건이 바로 5선의 박희태 의원이 공천에서 탈락한 일이다. 박 의원의 공천탈락은 공천심사위원장을 맡았던 안강민 전 서울지방검찰청장의 작품이었다. 당시 5선 의원이었던 박 의원은 공천만 받으면 6선이 확실시됐을 뿐만 아니라 국회의장도 거의 그의 몫이었다. 게다가 그는 이명박 대통령이 박근혜 후보와 피 튀기는 대선후보 경선을 치를 때 캠프의 선거대책위원장이었다. 이명박, 이상득, 최시중, 김덕룡, 이재오와 함께 이른바 ‘6인 회의’의 멤버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공천에서 탈락하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박 의원은 자신의 공천이 어려울 것 같다는 공심위 쪽 분위기를 전해 듣고는 서울 강남에 있는 안 전 지검장의 집까지 찾아갔다. 안 전 지검장은 사법시험 기준으로 박희태 의원보다 11기수나 아래였다. 하지만 안 전 지검장은 이명박 전 대통령을 설득해 그를 공천에서 내쳤을 뿐 아니라 그를 선거대책위원장에 앉혔다. 친이계 핵심으로 분류됐던 박 의원이 자의와 다르게 공천에서 탈락하다 보니 그 여파는 작지 않았다. 공천에 불만을 가졌던 재선 이상 의원들이 할 말을 잃었다. 한나라당 텃밭인 강남권에서도 친이계가 대거 탈락한 것이 수도권 표심을 좌우했다는 평가가 많았다.

당시 강남 쪽 현역의원은 이종구(강남갑), 공성진(강남을), 이혜훈(서초갑), 김덕룡(서초을), 맹형규(송파갑), 박계동(송파을) 의원 등이었는데 이 중 절반(김덕룡, 맹형규, 박계동)이 공천에서 떨어졌다. 강남권에서 탈락한 현역 의원은 모두 친이계였다. 공천에 불만을 가진 친박계 의원들이 탈당해 친박연대 내지 친박무소속 간판을 달고 출마했지만, 친박 핵심의원들 다수를 공천에서 생존시킴으로써 계파갈등에서 오는 충격을 그나마 최소화할 수 있었다. 특히 이혜훈 의원이 서초갑에서 공천을 받은 것이 컸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박영아 명지대 교수를 서초갑에 공천을 주려고 했으나, 안강민 전 지검장이 이를 막아섰다고 한다. 안 전 지검장은 이 전 대통령이 밀었던 것으로 알려진 박영아 교수를 송파갑에, 송파갑 출마를 준비했던 나경원 의원을 중구에 밀어넣는 방식으로 공천갈등을 최소화했다.

친이계도 날린 안강민의 칼질

이 과정에서 안 전 지검장은 자신의 의지를 피력하기 위해 이 대통령을 몇 차례 만났고, 결국 이를 이 대통령이 받아들이면서 공천 조율이 이뤄졌다고 한다. 특히 당시 공천을 좌지우지하던 이방호 의원과 이재오 의원으로부터 주도권을 가져온 것도 이때부터였다. 안 전 위원장은 한발 더 나아가 김덕룡 의원과 박희태 의원에게 선거대책위원장을 제안했다. 공천탈락자에게 선대위원장직 제안을 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결국 두 사람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당이 단일대오로 선거에 임할 수 있었다.

당시 공심위 관계자는 “안강민 위원장은 한나라당 대선 경선 때도 후보검증위원장을 맡으면서 이명박·박근혜 두 사람 간 공방을 자제시켰던 인물”이라며 “중원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공천바람을 일으킬 필요가 있고, 이를 위해서는 계파갈등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방침”이었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결과적으로 나간 사람들이 생존했고, 당에서는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공천 결과를 받아들이면서 수도권에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면서 “개인이 죽어야 당이 산다는 것을 보여줬던 대표적 선거”라고 설명했다. 그는 “당시 사실상 당의 총수였던 이명박 대통령이 몇몇 지역구에 자기 사람을 꽂는 일을 고집했다면 과반 이상의 압승은 어려웠을 것이다. 당시 이상득 의원에게 공천을 주지 않았으면 당시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얻은 의석수는 170석을 넘겼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보수정당이 기득권을 포기하고 혁신적 공천을 했을 때 승리했던 사례는 또 있다. 1996년 15대 총선이다. 당시 선거는 김영삼 대통령 임기 막바지에 치러졌기 때문에 신한국당이 필패할 것이란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신한국당 이회창 총재는 재야 운동권 출신인 김문수, 이재오부터 ‘모래시계 검사’ 홍준표까지 좌우 스펙트럼을 넓힌 인재 영입으로 139석을 얻었다. 신한국당·민주당·자민련 3당 체제에서 139석은 압도적 승리로 평가받았다.

문재인도 기득권 포기로 선거 승리

근래에 기득권을 포기하고 당이 뭉쳤을 때 선거에서 이긴 사례는 지난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승리한 경우다. 당시 당 대표였던 문재인 대표는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교사로 알려진 김종인씨를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영입했다. 국민의당과의 분당 사태로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꺼내든 카드였다. 문 대표는 김종인 비대위원장에게 당 운영에서부터 공천에 이르는 전권을 넘겼다. 당시 문 대통령의 결단이 없었다면 새정치연합이 20대 총선에서 127석을 확보하며 제1당에 오르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란 게 정치권의 중론이다.

실제로 문 대통령에게서 전권을 넘겨받은 김 전 비대위원장은 친문(친문재인)·친노(친노무현) 가리지 않고 공천 쇄신의 칼을 휘둘렀다. 현재 민주당 1인자인 이해찬 대표를 포함해 친노 원로그룹인 유인태 국회 사무총장, 문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노영민 대통령 비서실장과 강기정 청와대 정무수석, 대중적 인지도가 높았던 정청래 전 의원 등이 당시 공천에서 모조리 배제됐다. ‘물갈이’와 함께 진행된 인재 영입은 대중에게 더욱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표창원 경찰대 교수, 김병관 웹젠 대표, 이철희 시사평론가, 박주민 변호사, 조응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 양향자 전 삼성전자 상무 등이 분야별 전문성을 인정받아 영입됐다. 이들은 새정치연합이 총선에서 승리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런 전례들로 봤을 때 국민은 기득권을 포기하는 모습에 표를 준다는 결론에 이른다. 현재의 자유한국당은 큰 위기다. 2008년 선거에서 승리했을 때의 강점은 남아 있지 않다. 오히려 2016년 더불어민주당의 모습과 더욱 가깝다. 더군다나 이회창·이명박·박근혜 같은 강력한 리더십도 없고, 계파갈등의 불씨는 남아 있다. 일부 의원들이 불출마 선언을 하고 있지만, 한국당 기득권의 핵심으로 꼽히는 중진 및 TK 의원들은 요지부동이다. 게다가 보수는 뿔뿔이 흩어져 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둘러싼 논란과 문재인 정부 3대 게이트로 명명되는 권력형 비리들이 연이어 터져나오고 있음에도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보수 야당은 전혀 반사이익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지지율이 약간 오르고는 있지만 여전히 여당과 비교해서는 격차가 크다. 게다가 진보와 보수 극단으로 갈라진 틈을 차지하기 위해 안철수 전 의원도 정치권 복귀를 선언했다.

자유한국당이 포기한 기득권은 무엇?

보수 야당들은 결국 ‘통합’이란 정치지형 변화로 해답을 찾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지난 1월 1일 출입기자단 오찬간담회에서 “자유민주진영의 대통합을 실현하기 위한 통합추진위원회를 조속히 출범시켜야 한다. 이제는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통합의 큰 문을 활짝 열고 통합의 열차를 출발시키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문재인 정권을 심판하기 위한 첫걸음이 바로 통합이다. 통합이 정의고, 분열은 불의”라고 강조했다. 보수통합의 또 다른 축으로 꼽히는 유승민 새로운보수당 인재영입위원장도 당 신년하례회 후 기자들과 만나 “아무리 늦어도 2월 초까지는 중도보수 세력이 힘을 합쳐 통합이든 연대든 총선에서 이길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보수정당들이 새해 벽두부터 ‘통합’이란 키워드를 꺼내든 것은 보수 야당 간 통합 없이 선거에서 이기기는 어렵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보수 야당 간 통합의 필요성은 이미 여러 언론사 여론조사를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주간조선이 지난해 10월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보수통합이 이뤄졌을 때 지지하겠다는 응답자 비율이 보수정당의 지지율 단순합계보다 10%포인트 가까이 높게 나왔다. 당시 주간조선은 수도권 유권자 1000명을 대상으로 각 정당 지지도까지 함께 조사했었다. 그 결과 더불어민주당이 38.8%로 1위를 차지했고, 자유한국당이 22.6%, 바른미래당이 6.2%, 정의당이 7.5% 순이었다. 민주평화당이 1.3%, 우리공화당이 0.9%로 그 뒤를 이었다. 그런데 새로운 보수통합당이 출현하면 이를 지지하겠다는 응답자의 비율(38.3%)이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 우리공화당 등 보수 3당의 지지율 합계(29.7%)보다 8.6%포인트나 높았다.

하지만 통합이 보수가 선거에서 승리하는 ‘만능열쇠’일 수는 없다. 지금의 정치권 상황에서 보수통합은 선거에서 이기기 위한 최소한의 충분조건에 불과하다. 신선한 인재영입이나 뼈를 깎는 혁신공천, 중도층으로의 외연확장 등이 이어져야만 그나마 여당과 대등한 위치에서 선거를 치를 수 있다. 과거 총선 사례를 비교해보면 이런 특징들이 더 확연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현재의 자유한국당에 쇄신의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황 대표는 지난 1월 1일 기자회견에서 기득권을 내려놓겠다고 했지만, 내려놓겠다는 기득권이 무엇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는 이 자리에서 전광훈 목사나 고성국 평론가처럼 자신과 가까운 사람을 공천위원장 후보로 언급하기도 했다. 2016년 문재인 대표가 공천이나 당 인사권까지도 내려놓은 것과는 거리가 있다.

지난 1월 2일 불출마를 선언한 자유한국당 여상규 의원은 이런 황 대표에게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자유주의 가치하에 전 야권이 통합해야 하는데 각자 기득권을 가지고 있으면 통합이 되겠는가. 그래서 모든 기득권을 다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대표 직위는) 제일 먼저 내려놓아야 할 기득권이다.”

지금의 자유한국당과 황교안 대표가 포기하고 있는 기득권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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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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