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대통령선거에 민주공화당과 신민당 후보로 각각 출마한 박정희와 김대중.
1971년 대통령선거에 민주공화당과 신민당 후보로 각각 출마한 박정희와 김대중.

‘God Bless Korea!’

한국에 대한 역사적 축복은 1997년 말 찾아온 IMF 위기 때 재현됐다. 그 위기는 한국이 지난 30여년간 쌓아온 성취를 일순간에 허물어뜨릴 수 있는 ‘금융 쓰나미’였다. 이 위험한 순간에 혜성같이 등장한 이가 막 대선에서 승리한 김대중이었다. 그는 뛰어난 국제 감각과 외교술로 선진국 지도자와 금융가들을 설득해 부채의 지불유예를 성사시켰다.

아마 이 ‘활극’을 보면서 가장 기뻐했을 이는 지하에서 잠자고 있던 박정희였을 것이다. 그가 일궈온 한강의 기적이 후임자의 실수로 날아가게 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바로 자신에 의해 핍박받던 김대중이 구원투수로 등장해 일거에 전세를 역전시켰으니 말이다. 아마 김대중이 저승으로 갔을 때 가장 먼저 달려와 악수를 청할 이가 박정희가 아니었을까.

“김 대통령. 정말 고맙소.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내가 과거에 김 대통령께 한 행동을 생각하면 몸 둘 바를 모르겠는데….”

“무슨 말씀을…. 아니 박 대통령께서 열심히 일하신 것이 다 나라와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제가 위기 때 나선 것도 나라와 국민을 위한 것 아니겠습니까?”

아마 이런 대화를 나누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두 사람은 여러 면에서 대조적이다.

박정희는 일제하에서 교사를 하다 일본군 장교 생활을 했다. 독립 후에는 국군에 투신한 뒤 좌익 활동에 연루돼 사형선고까지 받고 구제된 후 장군까지 올랐다. 이후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죽을 때까지 대통령으로 지냈다. 그는 평생 ‘힘’을 추구한 전사(戰士) 기질의 소유자다.

김대중은 청년 시절 잠깐의 사상적 방황(좌익)과 사업가로서 경력을 제쳐놓고 보면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야당 정치가로서 일관된 삶을 살아왔다. 평생 ‘신념’을 추구한 선비 기질의 소유자다.

박정희는 혁명을 일으킬 정도로 과단성 있는 지도자다.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승리, 영토 확장, 생산 증대를 추구하는 목표 지상주의자다. ‘잘살아 보세’라는 슬로건이 말해주듯 경제와 실리를 중시하는 전략가다.

김대중은 기나긴 인고의 세월을 견디며 인간답게 사는 사회, 민주주의 구현을 추구하는 이상가다.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개인 철학이 말해주듯 양심과 법도를 중시하는 원칙주의자다.

나이로 따지면 박정희는 김대중보다 겨우 여섯 살 위나, 두 사람의 사고방식은 한 세기를 건너뛴다. 유교적 정신이 몸에 밴 박정희는 일본 메이지유신 시대 지사처럼 조국 근대화에 목숨을 건 19세기 계몽주의 시대 군주형인 반면, 김대중은 민주주의를 신봉하고 분배와 복지를 중시하는 20세기 민주주의 시대 지도자형이다.

두 사람이 한국 정치를 이끌던 1960~1970년대 서로의 관계는 극명하게 갈린다. 박정희는 가해자고 김대중은 피해자였다.

박정희는 1971년 대선 때 맞붙은 이후 그를 집중 탄압했다. 1987년 민주화가 이뤄질 때까지 만 16년간 김대중은 온갖 고초와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역사의 아이러니는 박정희의 탄압으로 김대중이 더욱 크게 됐다는 점이다. 박정희가 표적 탄압함으로써 김대중은 ‘안티 박정희’와 민주화 세력의 구심점이 될 수 있었다. 호남이란 확실한 지지기반도 얻었다. 만약 박정희가 김대중을 그렇게 가혹하게 다루지 않았더라면 김대중은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명멸한 여러 야당 지도자들과 비슷한 길을 걸었을지 모른다. 탄압이 오히려 정치적 축복이 된 셈이다.

박정희도 마찬가지다. ‘한강의 기적’은 박정희 몫만은 아니다. 김대중과 김영삼을 주축으로 하는 민주화 세력의 끊임없는 견제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박 정권의 철권정치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된 민주화 요구, 정부의 실정(失政)에 대한 줄기찬 항거 덕분에 산업화 세력은 끊임없는 자기비판과 수정을 해가며 제 궤도를 달려 ‘한강의 기적’을 이룩할 수 있었다.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중동, 동구권 독재자가 국가 발전에는 실패하고 독재자 개인의 부정부패로 끝난 것과는 참으로 대조적이다.

만약 김대중이 박 정권 압박에 좌절하고 말았다면 박정희의 경제발전 또한 좌절됐을 수 있다. 여느 독재자들처럼 권력의 무한질주 속을 달리다 역사적으로 비참한 파멸을 맞이했을 수도 있다.

우리는 한국과 정반대의 경우를 북한에서 찾을 수 있다. 북한의 김일성은 천수를 누리고 공산국가에서 거의 유일무이하게 권력을 아들에게 넘겨주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신의 ‘안티세력’을 완벽하게 제거했다. 그러나 북한은 지금 세계에서 경제나 인권 등 모든 면에서 가장 헐벗고 뒤진 대표적인 나라다.

나는 박정희와 김대중으로 상징되는 한국의 양대 세력이 지금 한국을 만든 주인공들이자 동시에 문제점들을 야기시킨 책임자들이라고 생각한다. 이들 산업화와 민주화 두 세력의 대조적인 성향과 역할로 인해 한국은 이만큼 발전해왔고 후퇴도 했다.

박정희와 김대중은 당대에는 숙명의 라이벌이자 견원지간(犬猿之間)이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화해한 사이라고 생각한다. 훗날 역사가들은 한국의 성취와 관련, 이 두 사람의 관계와 역할을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동지적 관계요 역사적 동반자’로 평가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 두 사람의 대조적인 면들이 숨 가쁜 시대적 상황들과 맞물리면서 창조적 스파크 현상을 일으켜 후퇴가 아닌 발전, 실패가 아닌 성공의 역사를 만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지금, 박정희와 김대중의 후예들이 여전히 우리나라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으나 창조적 스파크는커녕, 허구한 날 악다구니 벌이는 ‘나쁜 정치’를 하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풍전등화의 위기감이 나라 전체를 휩싸고 있는 지경이다.

우리 모두 곰곰이 생각해보자. 박정희의 ‘악역’이 있었기에 김대중이 악역을 하지 않고도 나라를 잘 이끌어갈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김대중의 ‘선방(善防)’이 있었기에 박정희의 독재가 단지 악역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살신성인한 것으로 역사적 자리 매김을 받을 수 있다.

21세기 세계 10위권 경제력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이 화합과 번영의 길로 가는 것이 순리다. 북한과의 관계 개선도 하는 판에 한강의 기적을 이끌어온 양대 견인차 세력이 손을 맞잡고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그리는 것이 허황된 상상인가?

함영준 마음건강 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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