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고등학교 졸업생들이 학사모를 던지고 있다. ⓒphoto 뉴시스
서울의 한 고등학교 졸업생들이 학사모를 던지고 있다. ⓒphoto 뉴시스

올겨울 고등학교 졸업식 분위기가 예년과 다르다. 고등학교 3학년생과 예비 대학생들의 표심을 잡으려는 정치인들이 졸업식장을 찾고 있다. 지난해 12월 27일 선거권 연령을 만 19세에서 만 18세로 변경하는 내용의 공직선거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2002년 1월 1일부터 4월 16일 사이에 태어난 고등학교 3학년생, 2001년 4월 16일 이후 출생한 대학교 1학년생도 당장 4·15 총선에서부터 표를 행사할 수 있게 돼서다.

1월 첫 주에 졸업식을 진행한 서울의 한 고등학교 관계자는 “한 말씀 하려는 분들이 종종 있다. 올해는 내빈들이 늘고 자칫 행사가 유세장이 될까봐 발언권은 주지 않고 소개만 하는 것으로 그쳤다”고 말했다. 또 다른 학교 관계자는 “올 사람들은 먼저 찾아오니 초대장도 따로 돌리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측에 따르면 국회의원이나 시도의회 의원들이 학교 행사에 참석해 얼굴을 비치거나 상을 주려는 시도 등은 과거에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 개정안 통과로 개별 정치인들의 행보가 더 커질 거라는 관측이다. 연합회 관계자는 “심지어는 정치인들이 학교운영위원회에 참여해 압력을 넣을 수 있다는 이야기까지 학교장들 사이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이미 정당 차원에서 발 빠르게 움직이는 경우도 있다. 정의당은 지난 1월 7일 만 18세 청소년 16명의 입당식을 열고 청소년 유권자를 겨냥한 정책을 가장 먼저 발표했다. 학자금 무이자 대출, 병사 월급 100만원, 청년사회상속제 도입 등이 주된 내용이다. 더불어민주당의 경우 당내 전국청년위원회를 전국청년당으로 개칭, 승격해 청년들의 목소리를 수용하겠다는 방침이다. 바른미래당·새로운보수당은 청년을 당 대표로 선발하거나 기존에 운영 중이던 학생위원회를 활용하겠다는 계획이다. 바른미래당 관계자는 “안철수 전 대표가 내놓은 ‘초·중·고 552학제 개편’이 시행되면 사실상 교육과정이 만 17세로 모두 끝나게 된다. 우리 당은 이후 만 18세부터 시작될 청소년들의 정치참여 방안에 대해 지속적으로 고민해오던 참이었다. 이번 선거권 연령 하향은 우리가 추구하는 교육정책과도 잘 맞물린다. 그간 짜오던 정책을 보완해나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당초 선거권 연령 하향에 반대해왔던 자유한국당마저도 청소년들을 포섭하기 위한 전략을 내부적으로 긴밀히 논의 중이다.

가치 지향에 이념 배제 성향

정당들이 이처럼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지만 교실의 고등학교 3학년생들이 이번 총선에서 과연 얼마만큼 ‘합리적’ 판단을 할지에 대해서는 정치권 내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우려가 기우에 그칠 것이라는 주장이 적지 않다. 류명규 화성시청소년수련관 전 관장은 “성인보다 정무적 판단이 떨어질 거라는 예측은 기우다. 그동안 사회적 지위, 배분에서 청소년들이 자리할 곳이 없다 보니 이런 말이 나오는 것뿐이다”라고 말했다.

2002년 16대 대선이 치러질 당시 선거권 모임운동 ‘낮추자’는 온오프라인상에서 선거권이 없는 만 18세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모의 대선 투표를 진행한 바 있다. 16대 대선 출마 후보에 대한 의견을 물었는데, 결과는 실제 대선과 동일하게 나왔다. 총 유효득표 1088표 중 노무현 후보가 668표를 얻어 1위를 차지한 것이다. 이회창 후보는 218표를 얻어 2위에, 권영길 후보는 151표를 얻어 3위에 올랐다.

올해 처음으로 선거권을 얻게 된 안준재(18) 군은 “선거권 연령 하향으로 사회문제를 깊이 들여다보며 일찍부터 정치참여를 준비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고 본다. 미래의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지원해줄 수 있는 정치인에게 힘을 실어주겠다. 주변 친구들도 비슷한 마음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청소년들은 무엇을 기준으로 표를 행사할까. 지난 1월 10일 서울시 국제청소년센터에서 열린 청소년계 신년인사회의 화두는 ‘만 18세 선거권’이었다. 이 신년인사회는 청소년 활동과 복지, 상담 분야 등 각계각층의 청소년 지도자와 기관장, 정부 관계자, 청소년이 모두 모여 한 해의 사업·협력 방안 등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청소년들은 “사교육을 줄여달라” “공부하기 쉬운 환경을 만들어달라” “알바 자리가 없다. 이를 늘려달라” “양성평등이 실현되는 사회를 만들어달라” 등의 요구사항을 공유했다.

청소년계 종사자들은 이를 두고 청소년들이 대학입시나 취업, 군입대 등 자신들과 직결되는 사안에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란 평가를 내놓았다. 양철승 한국청소년단체협의회 사무총장은 “우리나라 교육열이 청소년들을 입시에 매몰되도록 만들다 보니 가까운 현안에 주의를 기울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청소년계에선 대표적인 청소년 정치참여 사례로 2008년 광우병 파동 때 적지 않은 청소년들이 참여한 광화문 촛불집회를 꼽는다. 사실 당시 청소년을 광장으로 불러낸 데엔 광우병 관련 이슈보다는 그들과 관련된 4·15 교육자율화 대책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이 많다. 윤성이 한국정치학회 회장은 ‘청소년 정치참여 연구’ 보고서를 통해 “당시 정부가 주도한 0교시 부활, 우열반 편성, 방과 후 수업, 일제고사 시행 등 자신들과 직결되는 교육정책이 청소년의 공분을 불러왔다”고 평가했다. 청소년들은 광우병 파동 전후로 교육정책 반대 집회를 벌이고, 대통령 미니홈피에 매일 수백여 건의 게시글을 올렸다고 한다.

한도희 한국청소년수련시설협회 사무총장은 “이러한 사례를 고려했을 때 청소년들 표심은 총선보다도 2년 후 있을 지방선거에서 더 다이내믹하게 움직일 가능성이 있다”며 “‘우리 지역 청소년들에 한해 ○○○○정책을 추진하겠다’는 선심성 현안 공약이 지방선거에 더 많이 나오곤 한다”라고 말했다.

18세 유권자들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이념이나 정파성이 약하다는 점이다. 여론조사업체 한국갤럽은 지난해 12월 만 19세부터 만 29세 청년 482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하면서 ‘다음 중 어느 정당 또는 단체를 지지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에 대해 ‘모름·없음’이라고 답한 경우 ‘그럼 본인 성향은 어느 정당에 조금이라도 더 가깝습니까?’라고 재차 물은 바 있다. 그 결과 무당층이 35%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3명 중 1명은 그 어느 당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이들의 무당층 비율은 여타 세대보다도 높게 나타났다. 청소년계는 만 18세 청소년들의 무당층 경향은 이보다도 클 것으로 본다. 한도희 사무총장은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은 이미 진보·보수의 개념이 청소년들의 정치참여, 표 행사와는 유의미한 관계가 없다고 분석한 바 있다”고 말했다.

가치지향적인 성향도 청소년들의 정치참여 특성 중 하나로 거론된다. 자신의 이해관계에 얽매이기보다 정의, 공정, 도덕 등 가치를 기준으로 정치인을 평가할 것이란 이야기다. 이광호 한국청소년활동진흥원 이사장은 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자신과 관련한 사안에만 주의를 기울인다는 건 이미 과거의 분석일 수 있다. G세대, Z세대는 점차 공동체 문화와 관련한 사안엔 더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출하려 한다. 요즘 아이들이 ‘나중에 뭐하고 싶냐’란 질문에 직업을 언급하기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라고 답하는 것도 이런 측면에서 풀이될 수 있다. 가치의 우선순위는 개인의 경험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것이다.”

지난해 12월 31일 서울 국회의사당역 앞에서 청소년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손을 들어 ‘만 18세 선거권 쟁취’를 자축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해 12월 31일 서울 국회의사당역 앞에서 청소년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손을 들어 ‘만 18세 선거권 쟁취’를 자축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청소년을 가르치려 하지 마라”

그럼 맞춤형 공약을 내놓는 등 기존 방식대로 18세 표심을 잡으려는 정치권의 최근 움직임은 적절한 것일까. 청소년계에선 정치권이 선거권 연령 하향 이슈에 대한 접근을 달리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한도희 사무총장은 “우리 사회는 온 국민이 주권을 갖고 권리를 행사하는 공화정을 견지한다. 선거권 확대는 곧 민주주의 발전이다. 정치권은 이들 모두를 하나로 보고 이 권리가 확대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세대별로 맞춤형 공약을 내놓는 건 되레 소외되는 세대만 만들어낼 뿐이다”라고 지적했다.

한국청소년학회는 2010년 서울에 위치한 4개 고등학교 학생 700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정치권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당시 조사에서 청소년들은 스스로 정치를 이해하고 효율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자신들의 능력에 대해 높은 믿음을 보였다. 하지만 자신들의 요구에 정치권이 응답·반응할 것이라는 믿음은 현저히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정부의 운영, 제도 등에 대해선 높은 신뢰를 보이나, 정치인 개인에 대해선 깊은 불신을 갖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결국 정치권은 청소년 계층을 타깃으로 한 정치활동에 급급할 것이 아니라 신뢰를 얻을 수 있는 행동부터 보여야 한다는 말이다.

청소년계 종사자들은 독일 아동·청소년국이 1995년 선거권 연령을 18세에서 16세로 낮춘 후 2002년 정치인들에게 전한 몇 가지 권고안을 우리도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한다.

“청소년을 가르치려 하지 마라. 청소년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안다는 것처럼 행동하지 마라. 선거 때 외에도 청소년이 처한 환경에서 직접, 정기적으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말하라. 청소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간단·명료하게 공약과 정책을 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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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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