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층은 각종 선거의 승패를 좌우하는 부동층(Swing Voter)의 핵심이다. 이들은 여야(與野) 정당을 향한 지지가 확고한 진보층과 보수층에 비해 냉철하게 정부 정책을 평가하며 투표하는 유권자들이다. 전문가들은 “각 진영에 대한 선호가 약한 중도층 규모가 30~40%가량”이라며 “선거가 가까이 와야 표심(票心)이 드러나는 중도층 때문에 막판에 정치 지형의 급변이 자주 나타난다”고 한다.
올해도 21대 총선이 50여일 앞으로 다가오면서 중도층이 움직이고 있다. 지난 2월 14일 한국갤럽 발표에 따르면 ‘4월 총선에서 기대하는 결과’를 물어본 질문에 전체 유권자의 45%가 ‘정부 견제를 위해 야당이 승리해야 한다’고 했고, ‘정부 지원을 위해 여당이 승리해야 한다’는 43%였다. 작년 초부터 갤럽이 다섯 차례 실시한 동일한 조사에 ‘정부 견제론’이 ‘정부 지원론’을 앞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1월 조사에선 지금과 정반대로 정부 지원론(49%)이 정부 견제론(37%)보다 높았다. 한 달 전 조사와 비교하면 진보층은 정부 지원론(80→78%)이 계속 우세했고, 보수층은 정부 견제론(70→74%)이 변함없이 강세였다. 하지만 중도층에선 정부 지원론(52→39%)이 급락한 반면 정부 견제론(37→50%)이 급등했다. 진보층과 보수층은 여야에 대한 지지가 변함이 없지만, 중도층에선 지각변동이 벌어진 것이다.
충청권서도 ‘야당 승리해야’ 급등
지역별로도 중도층이 많은 충청권에서 여야에 대한 태도 변화가 가장 컸다. 한 달 전 조사와 비교하면 호남권은 여당, 영남권은 야당에 대한 지지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대전·충청은 ‘여당이 승리해야 한다’(55→37%)가 크게 하락한 반면 ‘야당이 승리해야 한다’(30→49%)가 급등하면서 분위기가 급변했다. 역시 중도층이 많은 서울과 인천·경기 등 수도권도 최근 정부 지원론은 하락한 반면 정부 견제론이 상승했다. 얼마 전부터 중도층에선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도 하락세가 뚜렷했다. 갤럽의 올해 초와 최근 조사를 비교하면 중도층의 문 대통령 지지율은 47→41%로 낮아진 반면, 국정운영 부정평가는 43→51%로 높아졌다. 이로써 1월 말부터는 중도층에서 문 대통령에 대한 부정 평가가 긍정 평가를 역전했다.
중도층이 정부·여당에 등을 돌린 이유로 청와대의 울산시장 개입 사건과 관련한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이른바 ‘검찰 학살 인사’, 공소장 비공개 강행 등을 지적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정권 핵심을 방어하기 위한 ‘수사 방해’ 논란이 중도층에 실망감을 줬다는 것이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조국 전 장관 등과 관련해 정권을 향한 비판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는 것도 영향이 크다는 분석이 있다. 같은 진영에 있던 사람이 자신이 속했던 진영의 문제나 위선을 드러내면 중도층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이다. 박성민 ‘정치컨설팅 민’ 대표는 “탄핵 정국 때 보수 정당이 무너진 것은 고정 지지층 때문에 무너진 것이 아니라 스윙보터인 중도·보수층이 이탈하면서 무너졌다”며 “진중권 전 교수의 최근 행보는 중도·진보층 이탈의 신호로 볼 수 있다”고 했다.
경제와 일자리, 안보·외교 등 정부 정책에 대한 중도층의 평가가 정권 초반과 달리 갈수록 냉정해지고 있는 것도 주목된다. 민생·경제에 대한 체감도 역시 크게 악화됐다. 지난 1월 갤럽 조사에서 ‘향후 1년 경기 전망’을 묻는 질문에 중도층은 ‘나빠질 것’(45%)과 ‘비슷할 것’(35%) 등 대다수(80%)가 나아지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반면 ‘좋아질 것’은 15%에 그쳤다.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대해서도 지난해 말 갤럽 조사에서 중도층의 다수(58%)가 ‘잘못하고 있다’고 했고 ‘잘하고 있다’는 22%에 머물렀다.
선거에서 승부의 바로미터 역할을 하는 중도층은 여야가 접전을 펼칠 경우 위력이 더 강해진다. 더불어민주당(123석)과 새누리당(122석)이 초박빙 경쟁을 벌였던 2016년 총선에선 투표 3일 전 갤럽 조사에서 중도층은 양당 지지율이 각각 25%로 동률이었다. 박근혜 후보(51.6%)와 문재인 후보(48.0%)가 3.6%포인트 차로 승부가 갈린 2012년 대선 일주일 전 미디어리서치 조사에선 전체 유권자의 후보 지지율도 박 후보(47%)와 문 후보(43%)가 오차범위 내 접전이었다. 당시 유권자 이념 성향별로 보수층에선 박 후보(75%), 진보층에선 문 후보(72%)가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하지만 전체 유권자의 10명 중 3명에 달했던 중도층에선 박 후보(46%)가 문 후보(45%)에게 간발의 차로 앞섰고, 최종 승부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중도층서 안철수는 아직 미풍
지난 총선과 대선에 이어 다시 여야(與野) 중간 지대에서 활동을 시작한 안철수 국민의당(가칭) 창당준비위원장 쪽으로 중도층이 얼마나 이동할지 여부도 관심을 끈다. 안 위원장은 최근 창준위 회의에서 “30% 이상의 무당층과 중도층 유권자들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큰 사명감을 느낀다”며 적극적으로 중도층 공략에 나섰다. 하지만 안 위원장을 향한 중도층의 지지세는 아직까지 뚜렷하지 않다. 지난 2월 둘째 주 갤럽에서 ‘안철수 신당’을 넣고 정당 지지율을 조사한 결과 전체 유권자에선 3%, 중도층에서도 5%에 머물렀다. 안 위원장은 지난해 연말 갤럽의 주요 정치인 호감도 조사에서도 중도층에서 22%에 그쳤다. 이낙연 전 총리(52%)뿐 아니라 심상정 정의당 대표(42%), 박원순 서울시장(30%) 등에도 뒤졌다. 2017년 대선 직전 조사에서는 중도층의 안 위원장 호감도는 68%였고, 당시엔 문재인 후보(42%)와 홍준표 후보(12%) 등에 모두 앞선 선두였다. 하지만 약 3년 만에 중도층은 보수 정당과 진보 정당에 대한 평가와 함께 안 위원장에 대한 평가도 크게 달라졌다.
전문가들은 “중도층은 여당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야당에 애정이 강한 것도 아니다”라며 “지난 총선과 대선에서 중도층은 안철수 위원장에게 상대적으로 관심을 많이 보였지만, 지금은 마음을 확실히 정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김장수 제3정치연구소장은 그의 저서 ‘하드볼게임’에서 “한국의 정치 지형은 ‘기울어진 운동장’이 아니고 선거마다 이전 정권을 심판하는 스윙보터들에 의해 지형이 급변하는 ‘디스코 팡팡’ ”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나라는 미국이나 유럽에 비해 중도층이 많은 편인데, 정당들이 계속 조변석개하다 보니 특정 정당에 대한 애정이 깊지 않다”고 했다.
허진재 한국갤럽 이사는 “최근 조사에서 중도층의 총선에 대한 관심도는 78%로 보수층(81%)과 진보층(76%)에 비해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높다”며 “중도층은 투표율도 비교적 높아서 여야가 접전을 벌일 경우엔 승부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클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