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종필 전 국무총리. 생전에 “정치는 허업이야”라는 경구를 남겼다. ⓒphoto 뉴시스
고 김종필 전 국무총리. 생전에 “정치는 허업이야”라는 경구를 남겼다. ⓒphoto 뉴시스

“정치는 허업(虛業·헛수고)이야!”

한국 정치의 풍운아 김종필 전 총리가 던진 경구(警句)다. 노(老)정객의 묵직한 한마디는 반향을 일으켰다. 많은 정치인들이 이 말을 인용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2009년 10월 6일 정몽준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정치가 허업(虛業)이 아니라 꽃을 피우고 과실을 따는 실업(實業)이 돼야 한다”고 했고, 2016년 3월 16일 홍준표 당시 경남지사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여야의 공천 정국에서 절망을 본다. 정당 지도자들 역시 자신만 살겠다고 몸부림치는 것을 보니 정치무상을 느낀다. 평생을 정치에 몸담아온 김종필 전 총재께서 하신 정치는 허업이라는 말씀이 다시금 생각난다”고 썼다.

허업(虛業)의 사전적 의미는 실속이 없이 겉으로만 꾸며 놓은 사업이다. 열매를 수확할 수 있는 실업(實業)의 반대말이다. 정몽준·홍준표뿐만 아니라 대다수 정치인들이 ‘정치는 허업’이라는 메시지를, ‘정치는 덧없고 헛된 일이며 정치가란 허망한 업’이라는 식의 정치 허무주의로 해석하였다.

그러자 당사자인 JP가 직접 나섰다. 그는 2015년 2월 23일 “내가 왜 ‘정치는 허업’이라 했는지 해석을 잘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며 “정치는 키우고 가꿔 열매가 있으면 국민이 나눠 갖는 거다. 정치인 자신에겐 텅텅 빈 허업이니, ‘남는 게 없다’며 한탄하며 죽는 거다. 국민에게 나눠주는 게 정치인의 희생정신이라는 말이다. 정치인이 열매를 따먹겠다고 하면 교도소밖에 갈 곳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국민이 안심하고 여유 있게 희망을 갖고 살면 그걸 도와주고 만든 걸로 만족해야지, 나도 열매를 따겠다고 하는 건 정치인이 아니다”고 덧붙였다.

요컨대 기업인들에게 사업은 부를 안겨주는 실업이지만, 정치인들에게 정치는 부를 안겨주지 못하는 허업이라는 것이다. 이는 정치인들이 자신의 업이 허업임을 자각하고 국민을 위해 봉사할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는 주문이자, 공을 빙자해서 사익을 꾀하는 빙공영사(憑公營私)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였다. 2006년 5월 임기를 마친 김원기 국회의장은 “정치적 경륜과 경험이 자산이 아니라 제척(除斥) 사유가 되고 있다”는 고별사를 남기고 의장 공관을 떠났다. 그는 정치에 몸담았던 사람이 사회로부터 백안시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져도, 정치인들은 이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개탄하였다. 정치를 허업이 아닌 사익추구의 방편, 실업으로 삼고자 하는 풍토와 거기서 비롯된 사회적 불신풍조와 냉소주의에 대한 통렬한 지적이었다.

신뢰를 상실한 정치는 조롱거리가 된다. 풍부한 경험은 존경이 아니라 “많이 해묵었다 아이가”라는 비아냥의 대상이 된다. 정치가 신뢰를 잃는 가장 큰 원인은 정치가 허업이라는 인식의 결핍, 공심(公心)의 실종이다. 공심의 실종은 정치의 실패를 낳는다. 공이 흐트러질 때, 정치는 기능부전에 빠지고 사회는 문란해진다. 동서고금을 넘어 정치학이 몰입해온 화두가 공을 어떻게 세우고 실현할 것인가였다.

정치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낮아지면, 거꾸로 공에 대한 강조가 잦아진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선공후사(先公後私), 멸사봉공(滅私奉公), 공평무사(公平無私), 공명정대(公明正大) 등의 표현을 곧잘 입에 올린다. 사보다 공을 앞세워야 하며, 하는 일이나 태도가 사사로움이나 그릇됨이 없이 정당하고 떳떳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당하신 말씀들이다. 문제는 언행 불일치로 구두선(口頭禪)에 그치고 만다는 데 있다. 공을 강조하면 할수록, 정치 불신이 오히려 심화되는 악순환은 이렇게 진행된다.

필자는 언제부턴가 정치인들이 “저는 사심(私心)이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할 때 깊은 공허함을 느낀다. 죽기 직전 사형수라면 몰라도 인간인데 어찌 개인적 마음인 사심이 없을 수 있겠는가. 사리사욕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나’보다 ‘내 것’을 먼저 입에 올리는 인간의 본성과 어울리지 않는다. 헌법 가치인 시장경제의 기본철학과도 맞지 않는다. 인간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개인의 이익(私利)과 욕망(私慾)을 추구한다. 열심히 일해 돈을 버는 것은 사리를 채우는 것이다. 먹고 싶은 것을 찾아 먹고, 입고 싶은 옷을 사 입고, 마음에 드는 상대와 사랑을 나누는 것은 모두 사욕을 채우는 행위다. 다만 사리와 사욕의 충족 과정이 건전한지, 지나친 탐욕으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고 법질서마저 어기는지에 따라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제 우리 사회의 언어문화는 바뀌어야 한다. 국어사전을 보면 사(私)는 1)개인이나 개인의 집안에 관한 사사로운 것, 2)일 처리에서 안면이나 정실(情實)에 매여 공정하지 못하게 처리하는 것이라고 부정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사심과 사리사욕이란 용어는 아예 백안시되고 있다. 이는 명분과 체면을 앞세워 실질을 무시한 조선 성리학(性理學)의 폐해가 아직도 우리 언어문화에 고스란히 묻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풍토부터 고쳐야 한다. 공자도 부귀(富貴)는 누구나 다 바라는 바이고 빈천(貧賤)은 누구나 싫어하는 바라고 했다. 다만 정도(正道)로서 얻는 것이 아니라면 누리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권장할 것과 억제할 것을 명확히 구분하고 있는 점에서 시장경제 철학과 일치한다.

이제 우리는 조선 성리학의 부정적 잔재에서 벗어나야 한다. ‘공’은 좋고 훌륭한 것이고, ‘사’는 떳떳하지도 아름답지도 못한 것이라는 식의 선악 이분법을 털어내야 한다. 그것은 겉 다르고 속 다른 표리부동(表裏不同)의 위선과 이중성만 부채질할 뿐이다. 개인 없는 사회가 존재할 수 없듯이, 사가 없는 공은 성립할 수 없다. 사에 대해 쉬쉬하는 풍조는 사의 은밀한 추구, 공적 영역에 대한 침범으로 연결돼 공을 망가트린다. 건강한 사를 보장해야 공이 바로 선다. 일본에서는 ‘나’라는 뜻의 ‘와타시(わたし)’의 한자를 ‘사(私)’로 쓴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진정한 공사 구분은 바로 제대로 된 사의 정립과 존중에서 시작된다.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의 경계선을 정확히 가르고, 양자를 공히 존중하는 것이 진정한 공사 구분이다. 무너진 공을 바로 세우는 지름길도 엄정한 공사 구분에 있다.

공적 인물(public figure)에게는 공심(public mind)이 있어야 한다. 공심이란 무엇인가? 사익의 포기와 공적 대의에의 헌신이 아니다. 정상적인 범위 내에서의 사익추구는 당연히 보장되어야 한다. 공심의 핵심은 엄정한 공사 구분이다. 공무를 빙자하여 사리를 꾀하는 빙공영사를 하지 말아야 한다. 공직에 있으면 큰돈을 벌 수 없다. 급여 이상의 것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공인은 일반인들과 목적함수가 달라야 한다. 공적 임무 수행과 성취를 통해 얻는 짜릿한 희열과 쾌감 그리고 보람이라는 비금전적 소득, 정신적 충만감을 중히 여겨야 한다. 거기에 사회적 인정과 대중적 사랑까지 더해지면 금상첨화다. 이것이 허업이 갖는 묘미다. 총선에 도전하는 정치인들이 음미해 봤으면 한다.

신지호 평론가·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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