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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호] 20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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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호의 正眼世論]보수의 새로운 좌표, 시민자치와 민관협치

신지호  평론가·전 국회의원 jayho63@gmail.com

▲ 2005년 39세의 나이로 보수당의 대표가 된 데이비드 캐머런 전 영국 총리. 그가 재집권을 위해 내건 비전이 ‘시민보수주의(civic conservatism)’였다.
“나의 동료 시민 여러분(My fellow citizens).”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2009년 1월 20일 취임연설의 첫머리를 이렇게 시작하였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이라는 상투적 어구보다 훨씬 인간적이고 민주적으로 다가온다. 미국에서는 자국민을 가리켜 ‘미국 시민(American Citizen)’이라 부른다. 우리가 한국 시민(Korean Citizen)이라는 표현을 거의 쓰지 않는 것과 대조적이다.
   
   시민(市民)은 신민(臣民)과 구별되는 근대의 산물이다. 시민은 생명, 자유, 재산의 권리를 가진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로 자신들의 주권을 존중하는 ‘법의 지배’에만 복종한다. 서구의 근대 국민국가는 이렇게 형성된 시민사회로부터 나왔다.
   
   시민사회는 하향식(top down)이 아니라 자발적 결사(結社)에 뿌리를 두고 상향식(bottom up)으로 조직된다. 보수주의의 원조 에드먼드 버크는 사회가 대면 상호작용을 통한 상향식 접근법에 의해서만 형성될 수 있다고 믿었다.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을 책임지고 이웃을 배려하는 자유로운 존재로서 상호작용하는 요령을 배우는 곳은 가정, 지역 동호회와 단체, 학교, 직장, 교회 등이다. 시장이 자생적 질서인 것처럼, 시민사회도 자생적으로 성장, 발전한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위로부터 조직된 국가다. 시민사회로부터 나온 상향식 국가가 아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대한민국 체제의 양대 기둥은 내재적 축적의 산물이 아닌 외래적 발전의 결과물이었다. 압축적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했지만,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 등 국가주의적 요소는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다. 민주화는 진전되었지만, 좌우 공히 국가주의적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하향식 통치는 타율적 인간, 무책임한 개인을 양산한다. 위로부터 조직된 국가 대한민국에서 자율적 시민사회의 온전한 실현과 시민자치는 아직 요원해 보인다.
   
   보수는 기본적으로 개인과 결사의 자유와 자율 그리고 다양성과 다원주의를 옹호한다. 국가적 획일성 강조는 보수의 원형과 거리가 멀다. 그런 점에서 국정교과서 만들기는 패착이었다. 국정교과서는 ‘깍두기 머리’와 교련의 추억을 되살릴 뿐이다.
   
   구(舊)보수가 친(親)국가였다면 신(新)보수는 친(親)시민이어야 한다. 자율적 시민사회와 평화롭게 공존하는 국가와, 시민결사를 파괴하여 그 기능을 국가조직에 흡수하려는 국가는 천지 차이다. 보수는 국가통제나 관치(官治)보다 시민자치와 민치(民治)를 중시하고 우선하는 기조를 확립해야 한다. ‘더 큰 시장’을 넘어 ‘더 큰 시민사회’를 지향해야 한다. 시민단체라면 알레르기 반응을 나타내는 모습은 이제 그만 거두어야 한다. 오히려 시민이라는 소중한 이름을 진보가 독점하게끔 방치한 과오에 대해 깊이 반성하여야 한다.
   
   권력에서 밀려난 지금이 오히려 체질을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보수 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상명하복, 위계질서, 가부장주의, 꼰대 등과 같은 부정적인 것들이 많다. 제복 문화에 기초해 인위적 질서 확립에만 치중해온 구보수의 취약점이 그대로 응축되어 있다. 이제 보수는 탈(脫)박정희, 즉 국가통제와 권위주의 문화 극복을 통해 시민과 함께하는 보수로 거듭나야 한다. ‘시민의 자유는 자치를 공유하는 것에 달려 있다’는 것이 공화주의의 핵심 명제다.
   
   요즘과 같은 양극화 시대에 ‘작은 정부-큰 시장’ 프레임으로 대응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국가통제 대 시민자치’ ‘관치 대 민치’로 구도를 재설정하고 후자의 편에 서서 견결히 맞서 싸워야 한다. 보수는 자율적 시민사회의 수호자로 거듭나야 한다.
   
   영국 보수당이 토니 블레어가 이끄는 노동당에 3연패를 당하고 위기에 처해 있던 2005년, 39세의 나이로 보수당의 대표가 된 데이비드 캐머런은 새로운 비전을 내걸고 당을 재건하여 2010년 총선에서 승리하고 13년 만에 재집권에 성공했다. 그 비전이 ‘시민보수주의(civic conservatism)’였다. 개인과 가족과 지역사회에 자신들의 삶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되돌려 주는 것, 그럼으로써 책임과 기회가 함께 발전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을 목표로 내걸었다.
   
   극단적인 좌우 이념을 제외하면 보수와 진보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사이의 경계선을 어디에 그을 것인가에서 갈린다. 자유를 중시하는 보수는 개인의 자율적 영역, 사적 자치 영역을 진보보다 넓게 잡는다. 반면 평등에 무게를 두는 진보는 정부가 개입하고 조정해야 할 영역을 보수보다 넓게 설정한다. 보수와 진보는 사적 자치의 영역이 어디까지인지, 정부의 개입은 어디까지가 적절한지를 놓고 치열한 공방을 벌인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보수의 철학이고,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는 진보의 슬로건이다.
   
   이 대목에서 보수는 고민해 보아야 한다. 사회·경제적 양극화가 심화하는 속에서 공적 영역, 정부의 역할 범위를 좁게 잡는 것은 일종의 정치적 모험일 수 있다. 자신의 피땀으로 풀어야 할 난제를 정부가 나서서 해결해 주겠다는데, 마다할 사람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나는 내 운명의 주인이다.(I am the master of my fate.) 나는 내 영혼의 선장이다.(I am the captain of my soul.)” 보수가 가슴 깊이 새겨야 할 명제들이다. 보수는 그 자유롭고 주체적인 개인들과 그 개인들의 자발적 결사가 만들어내는 자율적 질서를 중시하고 보호하여야 한다. 그것이 보수정치의 지상명령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보에 비해 상대적으로 좁게 설정된 공적 영역에 대해서만큼은 철두철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적 자치 영역을 제대로 보호해낼 수 없다.
   
   공적 영역과 그 행위 주체에 대한 생각도 새로이 해야 한다. 공적 영역의 담당자는 관(官)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공적 영역은 관치가 아니라 민관협치(民官協治)의 장이 되어야 한다. 시민적 덕성은 관료의 메마른 영혼보다 어려움에 처한 동료 시민들에게 더 따뜻하게 다가간다. 공공(公共)에 대한 지식과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 책임감은 시민자치와 민관협치의 핵심 동력이다. 이는 코로나19 극복 과정에서도 입증되었다. 국가는 시민사회의 이러한 기능을 함양해야지 관의 영역으로 대체하려 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공화국은 관치의 영역이 커지는 국가가 아니라, 자율적 시민사회가 주도하는 시민자치와 민관협치의 공간이 넉넉한, 그래서 사람 냄새가 나는 나라다.
   
   문재인 정권이 포스트 코로나19 프로젝트로 한국판 뉴딜을 추진한다니 공적 영역의 확대는 불가피하다. 보수는 시민자치와 민관협치로 이 국면에 대응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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