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주화운동 40주년인 지난 5월 18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서 미래통합당 주호영 원내대표가 윤상원 열사의 비석을 살펴보고 있다. ⓒphoto 뉴시스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인 지난 5월 18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서 미래통합당 주호영 원내대표가 윤상원 열사의 비석을 살펴보고 있다. ⓒphoto 뉴시스

주호영 미래통합당 원내대표가 취임 후 첫 공식 외부 일정으로 광주를 찾았다. 5·18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식에서 주먹을 쥔 채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했고, 유가족들을 만나선 통합당 의원들의 과거 망언에 대해 사과했다. 3년 전 같은 행사에서 정우택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주호영 원내대표는 방명록에 ‘5월 정신으로 자유와 정의가 역동하는 하나 된 대한민국을 만들어가겠습니다’라고 썼다.

주 원내대표는 광주행 이틀 전인 지난 5월 16일 입장문을 내고 “당 일각에서 5·18을 폄훼하고 모욕하는 정제되지 않은 발언이 있었다. 이유를 막론하고 5·18 희생자와 유가족, 상심하셨던 국민 여러분께 안타깝고 죄송한 마음을 전한다”고 밝혔다. 주 원내대표의 사과는 자유한국당 시절이던 지난해 2월 소속 의원들이 국회에서 “5·18은 폭동”(이종명), “5·18 유공자라는 괴물집단”(김순례) 등 망언을 한 데 따른 것이다. 당시 당 지도부는 유감을 표명하면서도 “다양한 해석이 존재할 수 있다”(나경원 당시 원내대표) 등 모호한 입장을 취해 논란을 키웠다.

주지하듯이 ‘1980년 광주’는 우리 사회의 뜨거운 이슈였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제13대 국회에서 5공 청문회가 열리며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이 이어졌지만, 속 시원한 결론은 도출하지 못했다. 5·18 관련 단체 등이 12·12사태 및 5·18 주모자들을 고소·고발하였으나 검찰은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렸다. 이렇게 답답하게 진행되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급진전된 것은 김영삼 정부 들어서다. 1995년 11월 24일 김영삼 대통령은 5·18특별법을 제정하라고 집권여당인 민자당에 지시하였다.(당시는 대통령이 집권여당의 총재직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공공연한 지시가 가능했다.) 이후 입법은 속전속결로 이루어져 같은 해 12월 19일 국회는 찬성 225명, 반대 20명, 기권 2명의 압도적인 표차로 5·18특별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의 핵심은 12·12 반란자와 5·18 내란자 및 부화뇌동자의 공소시효를 전두환, 노태우 재임기간 정지시켜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검찰은 전두환을 비롯한 1980년 당시 신군부 측 핵심인사 11명을 군형법상 반란수괴죄를 적용, 구속기소하였다. 재판 결과 1997년 4월 17일 대법원 상고심에서 전두환 무기징역, 노태우 징역 17년의 형이 확정되었다.

대법원은 1979년 일어난 12·12는 군사반란으로, 이듬해 발생한 5·17 비상계엄 확대와 광주 유혈진압은 국헌문란 목적으로 진행한 신군부의 ‘연속된 폭동’으로 규정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헌법기관인 대통령, 국무위원들에 대해 강압이 가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에 항의하기 위해 일어난 광주 시민들의 시위는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였고, “헌정수호를 외친 광주 시민에 대한 진압작전 중의 무자비한 살상행위는 내란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직접수단”이었으며, “헌법이 정한 민주적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폭력에 의해 정권을 장악하는 행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다”고 판시하였다.

흔히 전두환의 12·12는 박정희의 5·16과 동일선상에서 거론되곤 한다. 확실히 군사쿠데타라는 외양은 일치한다. 하지만 5·16은 무고한 시민에 대한 살상을 동반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차원을 달리한다. 전두환 신군부의 내란목적 살인행위는 도대체 국가는 왜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갖게 만들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 그리고 재산을 지키는 것이 국가의 제1임무라는 신성한 명제를 짓뭉개버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의 어긋남을 바로잡고자 한 것이 바로 김영삼의 5·18특별법 제정이었다. 대법원 확정판결 직후인 1997년 5월 9일 김영삼 정부는 5·18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했고, 이때부터 ‘임을 위한 행진곡’이 기념식에서 공식적으로 제창되었다. 이후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 이어 2008년 이명박 정부 첫해에도 제창되었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은 2009년부터 기념행사에 불참했고, ‘임을 위한 행진곡’은 제창에서 합창으로 변경됐다. 2009년과 2010년에는 본행사가 아닌 식전행사에서, 2011년부터는 본행사에서 합창으로 불렸다. 이에 반발한 5·18유가족회를 포함한 관련 단체들은 광주 금남로에서 별도의 기념식을 열었다.

박근혜 정부 첫해인 2013년 6월 여야 국회의원 158명의 찬성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 5·18 기념곡 지정 촉구 결의안’이 본회의에서 통과됐지만, 박근혜 정부는 수용하지 않았다. 하태경 의원의 증언에 의하면,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은 가사 중의 ‘임’은 김일성이고 ‘새날’은 사회주의 혁명을 의미한다고 청와대에 보고해 제창을 막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한 편의 블랙코미디였다. 김일성대를 졸업한 주성하 동아일보 기자는 2016년 5월 17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이 노래를 북한과 연결시키는 찌질한 짓거리는 그만해라. ‘임을 위한 행진곡’은 종북가요도 김일성 찬양가요도 아니다. 오히려 김정은의 압제에 신음하는 북한 인민이 따라 배워야 할 정신이다. 북한에서 이 노래를 허락 없이 부르면 잡혀가 정치범이 된다”고 일갈하였다. 사선(死線)을 넘어 자유의 땅으로 온 탈북자들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이다. 오죽 답답했으면 이런 말을 했겠는가.

여기서 보수는 돌이켜보아야 한다. 김영삼의 결단으로 이루어진 보수정치의 긍정적 유산을 왜 스스로 걷어차고 있는지. 1990년 1월의 3당 합당은 산업화 세력(민정당·공화당)이 민주화 세력(민주당)의 수혈을 받아 보수의 외연을 확대한 것으로 한국 보수에 두 개의 DNA가 존재할 수 있음을 입증한 사건이었다. 이질적 세력의 하나 됨이라는 측면에서는 단순한 덧셈정치를 뛰어넘는 곱셈정치였다. 이 모험이 성공하여 탄생한 것이 김영삼 정부다. 혹자는 김영삼이 주도한 전두환에 대한 단죄가 자신의 당선을 도운 민정계에 대한 인간적 배신이라고 비판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전두환의 국헌 파괴 행위는 사사로운 정리(情理)로 면죄될 수 없다. 보수는 이승만과 김구를 함께 품을 수 있지만, 김영삼과 전두환을 아우를 수는 없다.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 그 답은 대법원 판결문에 나와 있다.

영국의 대표적 보수 지성인 로저 스크러턴에 따르면, 보수주의자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물질적·정신적 유산을 잘 지켜 후대에 물려주려는 신념을 갖는다. 자신의 긍정적 유산도 계승하지 못하고 오히려 걷어차 버리는 뺄셈정치로 인해 보수의 입지는 매우 좁아졌다. 열린 보수가 닫힌 보수로, 포용적 보수가 옹졸한 보수로, 민주적 보수가 권위적 보수로 퇴행한 것이다. 정당의 목표는 집권이다. 그런데 이런 보수로 집권을 바란다면 양심불량이다. 최근 수년간 보수정치가 보여준 행태는 사실상의 집권 포기 행위에 다름 아니다. 한국의 보수는 영화 ‘국제시장’뿐 아니라 ‘택시운전사’를 보면서도 눈물을 흘려야 한다.

신지호 평론가·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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