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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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 겸 중민사회이론연구재단(중민재단) 이사장은 최근 한국 정치 지형이 급격히 뒤바뀌고 있다고 보고 있다. 과거와 비교해 진보진영은 기득권화돼 국가권력을 우선하며, 보수진영은 오히려 시민사회를 우선한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지난 4~5월에 실시한 코로나19에 대한 국민 인식 조사에선 이런 현상이 더 뚜렷하게 나타났다고 한다.

한 교수는 “최근 들어 정치·사회적으로 큰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이를 가시적으로 입증한 것이 코로나19 확산 이후의 정치 지형”이라며 “일시적인 현상이라기엔 그 변화상이 10여년 전부터 꾸준히 보였으며 특히 진보진영의 사고방식은 두드러지게 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 대표적인 진보 성향의 학자로 과거 열린우리당 열린정책연구원 이사직과 김대중 대통령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 민주통합당 대선평가위원장 등 요직을 두루 맡아왔다. 때문에 진보·보수에 대한 그의 분석은 예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 6월 8일 서울대 인근 중민재단 사무실에서 그를 만나 진보·보수의 변화상과 최근 여야 정치 논리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코로나19 인식 조사서 뒤집힌 진보와 보수

한 교수는 지난 4월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중민재단을 통해 일반 시민 1056명, 대구·경북 시민 420명, 86세대 233명을 대상으로 코로나19에 대한 국민 인식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는 ‘정부 결정과 시민 의견 중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가’ ‘통치와 법치 중 무엇이 중요한가’ ‘강제 검역과 자발 검역 중 무엇이 정당한가’ 등을 묻고 이를 진보·보수 응답자별로 수치화했다. 한 교수는 “코로나19는 단순히 감염병이 아니라 자본주의, 크게는 인류 문명에 던지는 함의가 굉장히 클 거라 생각하던 차에 중국 우한에 있는 교수로부터 이와 관련한 설문조사를 해보자는 제안이 왔다. 이를 국내 실정에 맞게 다시 정리해 실시했다. 결과는 그동안 체감해왔던 것처럼 큰 변화를 보였다”고 설명했다.

한 교수에 따르면 사회 통념상 진보는 ‘시민사회 중심’ ‘아래로부터의 접근’ ‘법치 강조’ ‘소수집단 대변’ 등의 특성을 보이는 반면, 보수는 ‘국가권력 중심’ ‘위로부터의 접근’ ‘통치 강조’ ‘주류집단 대변’ 등의 특성을 띤다. 하지만 이번 연구 조사에선 이 특성이 모든 문항에서 일관되게 정반대로 나타났다고 한다. 한마디로 진보는 정부를, 보수는 시민을 대변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한 교수는 특히 진보의 변화가 더욱 두드러졌다고 말한다.

“진보진영은 국가권력에 포섭되거나 순응하지 않고 이들과 거리를 두며 본래 진보의 가치, 즉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날카로운 눈으로 정부를 비판, 저항한다. 집권 정부가 진보라 할지라도 이는 변치 않는 특성이었다. 과거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도 진보진영은 그래왔다. 내가 김대중 정부에서 정책기획위원장으로 일했을 당시 진보가 보수진영보다 우릴 더 가혹하게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도와주진 못하고 왜 이렇게 비판만 하냐’는 등의 이야기도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최근 진보진영의 이런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국가주의에 포섭돼 정부 목소리에 동조하고 있다. 이번 설문조사에선 이런 모습이 더욱 단적으로 나타났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진보진영은 실제 ‘시민 협력’보단 ‘정부 결정’을, ‘자발 검역’보단 ‘강제 검역’을, ‘낙인찍기에 신중하기’보단 ‘모든 정보 공개’를 우선하는 등 기존 보수의 특징을 보였다. 한 교수가 2010년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진보진영은 시민을, 보수진영은 정부를 우선시한 바 있는데 10여년 만에 두 진영의 특성이 달라졌다는 이야기다. 물론 당시엔 보수정권의 집권으로 진보·보수진영의 성향이 지금과 반대로 나온 측면이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렇다 해도 진보진영이 본래의 정체성을 잃은 건 돌이킬 수 없는 경험적·통계적 사실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한 교수는 이런 현상이 2000년대 후반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고 분석한다. 한 교수는 “2007년 광우병 사태가 출발점이 됐던 것으로 보인다. 소위 말하는 진영 정치가 이때부터 심화됐다. 우리 편, 네 편으로 나뉘어서 우리 쪽은 지지, 반대쪽은 깎아내리기만 한다. 그 과정에서 진보·보수의 통념과 기존 상식은 빠르게 무너져내렸다”고 말했다.

이번 조사에선 유독 대구·경북 시민들의 변화가 눈에 띄었다고 한다. 기존 보수의 특성은 옅어지고 시민 협력을 우선하는 등 진보의 특성을 보인 것이다. 한 교수는 “보수진영에서 이런 현상이 나타난 이유는 더 분석해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확실한 건 과거까지 보수 성향이 강한 곳으로 평가받던 대구·경북이 달라질 정도로 정치 지형이 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의 깊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진보진영으로 평가됐던 386세대가 국가권력 중심주의적인 모습을 보인 점도 주목할 사안으로 꼽는다. 그는 “조사 결과를 보면 386세대 집단이 가장 강한 보수 성향을 나타내고 있다. 사실 이런 현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며 과거부터 조금씩 나타나 온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20대는 어느 한곳에 치우치지 않고 가장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 그의 분석 결과다. 한 교수는 “20대가 오늘날의 정치 상황에서 넓은 의미의 시민집단과 뜻을 함께하며 국가권력을 견제하려는 경향이 가장 크게 나타나고 있다”며 “여야 정치권이 꼭 살펴봐야 할 점”이라고 덧붙였다.

한상진 교수는 김대중 정부 시절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직을 맡기도 했다. 진보·보수에 대한 그의 분석은 예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photo 연합
한상진 교수는 김대중 정부 시절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직을 맡기도 했다. 진보·보수에 대한 그의 분석은 예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photo 연합

자기만 옳다는 진보의 ‘자기 확신’이 문제

한 교수는 최근 이런 변화의 흐름, 특히 진보진영의 변화는 정치권에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고 본다. 그가 봤을 때 ‘조국 사태’ ‘윤미향 사태’ ‘금태섭 전 의원에 대한 징계 논란’ 등은 권력화 혹은 기득권화하는 진보진영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례라고 한다. 한 교수는 한때 이를 두고 “진보가 오히려 더 비민주로 치닫는다” “독선적이다”라고 비판한 바 있다. 그는 진보진영의 ‘자기 확신’이 커지면서 이런 논란이 가속화하는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속가능한 정치 모델이 되기 위해선 자기 확신에 따라 일방향으로 정책을 집행하는 것이 아닌 시민집단과 대화하며 상식을 깨지 않는 선에서 이야기할 줄 알아야 한다. 근데 지금의 진보는 자기 확신이 강하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확신은 ‘자신들이 옳다’라는 생각이다. 이것이 강하니 독단적으로 사고하고 돌진하고 보는 거다. 이를 멈출 수 있는 건 야당인데 그렇다고 야당이 여권을 제대로 견제하는 것도 아니다. 권력을 쥔 여권의 독주는 불가피했다.”

지난 코로나19 인식 설문조사에서 진보는 신천지 신도를 피해자보다는 가해자로 보는 경향이 보수보다 더 높게 나타난 바 있는데 이 또한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진보정권, 넓게는 진보진영의 성과가 빛나 자부심을 느끼고 만족해야 하는데 지금의 상황은 녹록지 않다. 남북관계는 혼란을 거듭하고 일본과의 교류는 막힌 지 오래다. 경제적 성과도 미미하다. 우리가 틀릴 수 있다는 신호가 곳곳에서 터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현 정권의 코로나19 방역이 모범 사례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옳았음을 증명하고 채우지 못했던 자부심을 여기서 채워야 했다. 이를 방해하는 신천지는 진보진영에선 제거의 대상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었다. 이 또한 자기 확신이 작용하면서다. 소수집단을 대변하는 진보의 특성은 사라졌다.”

과거사 집착하며 퇴보만 하는 진보

최근 여권에선 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정치자금법 위반 사건과 함께 대한항공(KAL) 858기 폭파사건 등 과거사를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를 두고 진보가 ‘앞으로 나아간다’는 본래 의미는 잊고 퇴보만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데, 한 교수는 이에 대한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과거 정부가 폭력을 휘두른 사태 등에 대해선 진상규명이 분명 필요하다. 하지만 인권유린 여부와는 무관한 여야 고도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사안을 다시 거론하는 건 적절치 못하다. 정치적으로 띄우려는 시도로밖에 읽히지 않는다. 여권에선 나름 근거를 갖고 과거사 재조사 필요성을 거론한 것이겠지만 그 이전에 시민사회가 지켜야 할 헌법기관의 명예 등에 대해서도 존중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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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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