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통합당 이주환(왼쪽부터)·유상범·전주혜·정희용·김형동 의원이 지난 7월 1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민원실에서 국회의장 상임위 강제배정 및 상임위원장 선출 무효 확인을 위한 권한쟁의심판청구서를 제출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미래통합당 이주환(왼쪽부터)·유상범·전주혜·정희용·김형동 의원이 지난 7월 1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민원실에서 국회의장 상임위 강제배정 및 상임위원장 선출 무효 확인을 위한 권한쟁의심판청구서를 제출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명제 1)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눌 수 없다.

(명제 2) 권력은 나눌수록 커진다.

상반되는 두 명제다. 어느 쪽이 진실에 가까울까? 현실정치를 보면 전자의 설득력이 두드러진다. 권력은 집중화의 속성을 지닌다. 권불오년(權不五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의 이치와 그 교훈을 몰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나는 전임자와 다르다. 충분히 다를 수 있다”는 확신이 권력자의 뇌를 지배하는 순간, “성스러운 과업을 수행하기 위한 효율적 권력집중”은 필수요건이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기확신은 자기최면으로 바뀌고, 권력집중은 권력중독으로 심화한다.

권력중독자의 뇌를 스캔해 보면, 뇌 신경세포 흥분 물질인 도파민이 과다하게 분비되는 현상이 약물중독자와 비슷하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깔아뭉개거나 위협할 때, 마치 약물중독자가 약물을 흡입할 때 느끼는 것과 같은 도취감을 느낀다. 권력중독은 알코올중독보다 훨씬 무섭다. 술에 취하면 반나절 자고 나면 깨어나지만, 권력에 취하면 약이 없다. 설상가상으로 뇌에 ‘기름기’가 껴 합리적 판단이 어려워진다. 권력중독자는 권력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미망(迷妄)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덧없음을 한탄한다.

권력이 지닌 이러한 속성을 알기에 몽테스키외를 비롯한 선각자들은 엄격한 삼권분립 및 견제와 균형을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로 강조하였다. 국민주권 및 법의 지배 역시 자의적(恣意的) 권력 행사를 방지하기 위한 장치였다.

그러나 권력은 끊임없이 일탈을 꿈꾼다.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강정인 교수에 의하면, 박근혜 정부는 이른바 ‘위임 민주주의(delegative democracy)’의 극단적 전형을 보여주었다. 민주선거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지만, 취임 이후 “대의민주주의를 넘어 모든 권력을 위임받은 것처럼 전권을 행사하는 왜곡된 민주주의”, 곧 ‘제왕적 대통령제’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박근혜 청와대는 만기친람(萬機親覽), 깨알지시, ‘적자생존’(적는 자만이 생존한다) 등 오래된 흑백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풍경을 연출했다. 독일 통일을 일궈 낸 헬무트 콜은 각료회의 때 메모를 금지하였다. 국정을 논할 자리에서 메모나 하고 있으면 안 된다는 주문이었다.

그렇다면 문재인 정부가 지난 3년간 보여준 모습은 어떠한가? “우리 이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라는 열성 지지자들의 주문은 전임 정부를 한참 뛰어넘는 무한(無限)권력의 위험성을 보여준다. 박근혜 정부가 위임 민주주의의 극단적 전형이었다면, 문재인 정부는 아예 위임 민주주의로부터 일탈하고 있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 국회는 대통령의 명을 받아 법을 만드는 ‘통법부’라는 오명을 벗지 못했다. 그러나 1987년 민주화를 계기로 여야는 머리를 맞대고 여당 독주의 ‘통법부’를 야당의 견제가 가능한 ‘민의의 전당’으로 돌려놓는 관행을 만들어냈다. 여당이 독식하던 상임위원장을 의석수 비율에 따라 야당에도 배분한 것이다. 이 불문율은 이후 몇 차례의 과반 여당 체제에서도 지켜졌다. 이처럼 30년을 넘게 축적되어 온 국회 운영의 관행과 전통을 깡그리 무시하고 집권세력은 야당 몫 법사위원장을 비롯해 전 상임위원장을 싹쓸이하였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21대 후반기 법사위원장을 차기 대선의 당선자를 낸 당에서 맡자는 박병석 국회의장의 제안이었다. 아무리 민주당 출신이라지만, 삼권분립 및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입각해 국회를 운영해야 할 최고책임자인 국회의장이 국회직 선출방식을 대선 결과에 귀속시키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른 것이다. 국회의장이 국회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침해한 사례로 한국정치사의 오점으로 남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절제력을 상실한 권력의 질주가 어떻게 민주주의를 망가트릴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집권세력의 일방통행 및 독식 욕망은 원 구성에 그치지 않고 있다. 민주당 법사위 간사인 백혜련 의원은 자신들이 강행 처리한 공수처법 중에서 야당의 ‘비토권’을 보장해 준 공수처장 추천권을 무력화시키는 법안을 발의하였다. 또한 민주당은 방송통신위원회 상임위원 등 정부 산하 위원회 구성원의 여야 추천 비율에서 민주당 몫을 더 늘리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뭐가 되었든 집권세력의 가고자 하는 길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전부 치워버리겠다는 기세다. 진보 정치학계의 대부 최장집 교수는 현 집권세력의 직접민주주의가 전체주의와 유사하다고 지적했는데, 정말이지 딱 그대로다.

과도한 권력집중은 민주공화국의 조직 원리에 위배된다. 자의적 권력행사를 가능케 함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을 예속의 굴레로 몰아간다. 그래서 고대 공화국은 혼합정을 채택해 견제와 균형을 이루고자 노력했다. 현 집권세력은 협치의 필요성을 강조하나 분권이 전제되지 않는 협치는 공허한 말장난일 뿐이다. 진정한 공화국은 분권과 협치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는 나라다. 제왕적 대통령제하에서 진정한 공화국을 만드는 것은 어쩌면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것보다 더 어려울지 모른다.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다년간 근무했던 그레고리 헨더슨은 1968년 ‘소용돌이의 한국정치(Korea : The Politics of the Vortex)’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그는 한국 정치를 중앙권력을 향하여 모든 활동적 요소를 휘몰아가는 소용돌이에 은유하였다. 일단 소용돌이가 일어나면, 그 거대한 흡입력은 모래알의 정치개체를 빨아들여 어떤 이성적인 성찰도, 여야 간의 타협도, 정책을 위한 진지한 토론도 마비시키고 만다. 헨더슨의 처방은 분권화와 다양화였다.

헨더슨의 책이 출판되고 5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한국은 압축 산업화와 민주화를 통해 성공의 길을 걸었다. 그 성공에는 정치·경제·사회·문화 거의 모든 분야의 다양화와 다원화가 포함되어 있다. 안타까운 것은 소용돌이 정치문화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는 점이다. ‘문(文)주주의’의 권력 독식은 한국 민주주의의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려놓았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는 만악(萬惡)의 근원이면서 만사의 해결사라는 두 얼굴을 띤다. 두 얼굴 모두 바람직하지 못하다. 실력을 키우는 것보다 줄 잘 서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불건전한 풍조를 부추긴다. 한국이 물적·인적 자본에 비해 신뢰, 부패방지 등 사회적 자본에서 크게 취약한 이유도 바람직하지 못한 정치의 두 얼굴에 기인한 측면이 크다.

모든 걸 정치로 빨아들이는 ‘소용돌이 풍토’의 수혜자는 정치인이요, 피해자는 선량한 국민이다. “권력은 나눌수록 커진다”는 정치인 입장에서는 틀린 말이지만, 국민의 입장에서는 맞는 말이다. 정치인의 권력이 줄어들수록, 국민의 권력은 커진다. 그런 점에서 권력중독은 민주주의의 적이다.

신지호 평론가·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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