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빈 라덴 사살 작전을 지휘하고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빈 라덴 사살 작전을 지휘하고 있다.

‘포토옵(photo opp)’은 정치와 언론 모두에 긴밀히 연관된 약어다. 영상 우위 시대가 되면서 요즘 더욱 중요해졌다. 그러나 국내 언론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다. ‘사진 포착 기회(photo opportunity)’ 정도를 뜻하는 이 말은 1970년대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 시절 만들어졌다. 당시 백악관은 닉슨 대통령이 언론 사진에서 긍정적 이미지로 보도되도록 여러 장면을 연출하면서 이를 ‘포토옵’이라고 불렀다.

포토옵은 치밀하게 기획된 ‘의사 사건(疑似事件·pseudo-event)’을 반드시 수반한다. 의사 사건은 지진처럼 자연적으로 발생한 진짜 사건(real event)과 달리, 언론에 보도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일부러 꾸며낸 사건을 지칭한다.

미국에서 대선이나 중간선거 때 후보들은 나무를 심거나 쓰레기를 줍거나 노인복지시설을 방문하는 가벼운 의사 사건을 일으켜 포토옵을 만든다.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이나 대선후보가 재래시장을 방문해 노점의 어묵을 먹는 장면은 대표적인 포토옵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지난 4월 총선 때 황교안 당시 미래통합당 대표는 “어묵을 간장에 찍어 먹는 장면도 어색하다”라는 핀잔을 전원책 변호사에게서 듣기도 했지만 말이다.

창당하거나 선거에 출사표를 내거나 어떤 중대한 결단을 하면서 서울 국립현충원을 참배하는 것도 포토옵의 한 유형이다. 서울 현충원은 ‘순국선열’이라는 용어와 더불어 한국 정치의 ‘제의(祭儀)’ 속성을 생성한다.

가장 성공한 포토옵, 빈 라덴 사살 회의

문제는 포토옵이 기대와 달리 부정적 보도를 이끌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일차적으로 정치인 본인의 실수에 기인한다. 대선주자로 거론되는 안철수 전 바른미래당 의원은 지난 1월 미국 귀국 후 첫 정치일정으로 현충원을 참배했다. 4월 총선 출전을 위한 의식이었다. 그러나 그는 방명록에 ‘대한민굴’로 썼다가 나중에 ‘ㄹ’을 진한 ‘ㄱ’으로 고쳤다. ‘굳건히’를 ‘굳건이’로 쓴 건 그대로 뒀다. 한 달 뒤 국민의당 대표직 수락 후 현충원에 가서는 ‘코로나19’를 ‘코로나20’으로 표기했다. 2016년 국민의당 창당 땐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 방명록에 ‘가슴에 깊이’를 ‘가슴에 깊히’로 쓰기도 했다. ‘오탈자’가 그의 ‘비장한 결기’를 번번이 가렸다.

포토옵은 이렇게 의도치 않게 일이 흘러갈 위험을 항상 안고 있다. 주인공인 정치인이 사소한 실수를 하면 매정한 언론은 의사 사건 그 자체보다 실수에 더 주목한다. 뉴스와 포털은 그 실수로 도배가 된다. 또 행사 도중에 각본에 없는 돌발적인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포토옵이 제공하는 시각적 효과는 강렬하고 즉각적이라 정치인은 이것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요즘엔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 영상과 사진을 강조하는 뉴미디어가 인기를 끈다. 포토옵은 이런 미디어 추세에도 잘 맞는 전략이다.

국회 본회의장에서 의원이 문자메시지를 주고받는 장면이 종종 카메라 기자에 의해 찍혀 보도되는데, 상당수는 의도적으로 찍힌 것으로 여겨진다. 이 역시 기획된 포토옵일 것이다.

세계적으로 가장 성공한 포토옵으로는 ‘오바마의 빈 라덴 사살 작전 지휘’ 장면이 꼽힌다. 2011년 5월 1일 미군 특수부대는 이라크에 은신하고 있던 빈 라덴을 사살해 그의 시신을 바다에 수장했다. 9·11테러를 일으켜 2900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주범 빈 라덴은 미국인의 공공의 적이었다. 그를 찾아내 제거한 것은 국민적 원한을 달래고 정의를 실현한 미국 대통령의 큰 치적이었다.

백악관이 공개한 사진은 이러한 치적을 더 돋보이게 했다. 이 사진에 따르면, 백악관 지하벙커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구석 자리에 몸을 구부리고 앉아 작전 장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대신 오바마는 중앙의 대통령 자리를 지휘관인 마셜 웹 합동특수전사령부 부사령관에게 양보했다.

이 사진은 오바마의 ‘탈권위주의’와 ‘국가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전문가를 우대하는 실용주의’를 부각했다. ‘커맨더 인 치프(Commander in Chief·군 통수권자)’로서의 이런 멋진 모습과 혁혁한 전공(戰功)은 그에 대한 여론의 지지를 끌어올렸다. 이 장면은 ‘대통령의 시각적 레토릭이 어느 정도까지 강력할 수 있는가’에 관한 연구를 촉발했다.

반면 가장 실패한 포토옵도 미국 대통령의 몫이었다. 2003년 5월 1일 태평양에 떠 있던 미 해군 에이브러햄 링컨 항공모함의 갑판에 한 대의 공군 전투기가 착륙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전투기에서 조종사 복장으로 내렸다. 그는 ‘임무완수(Mission Accomplished)’라고 적힌 대형 플래카드를 배경으로 항공모함 갑판 위에서 이라크전쟁의 종전을 사실상 선언했다. MSNBC 방송을 비롯한 미국 언론은 “부시는 영웅이고 승전을 이끈 뛰어난 사령관” “느긋하게 승리를 즐기자”라고 보도했다.

(좌) 문재인 대통령과 참모들이 청와대 경내를 산책하고 있다. (우)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도보 다리에서 벤치 회담을 하고 있다.
(좌) 문재인 대통령과 참모들이 청와대 경내를 산책하고 있다. (우)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도보 다리에서 벤치 회담을 하고 있다.

실패한 포토옵, 링컨함의 조지 W. 부시

그러나 이 이벤트의 예후는 좋지 않았다. ‘임무완수’ 이후 이라크에서 무려 3920명의 미군이 전사했다. 플래카드의 의미에 대해 백악관 측은 “이라크전쟁 임무완수가 아니라 링컨함이 10개월 작전을 마치고 귀환했다는 뜻”이라고 구차하게 둘러댔다. “플래카드는 병사들이 만들어 건 것”이라고 변명했으나, 나중에 백악관이 제작해 설치한 사실이 밝혀졌다.

포토옵의 이런 성공과 실패 사례는 우리나라 정치지도자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그것은 ‘치적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포토옵을 남발하면 국민의 신뢰를 잃는다’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문재인 대통령의 포토옵은 어떠할까?

2017년 5월 11일 문재인 대통령은 신임 청와대 참모들과 공관에서 오찬을 함께하고 차담회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흰셔츠와 넥타이 차림에 커피를 들고 신록(新祿)으로 둘러싸인 청와대 경내를 산책했다. 임종석 당시 비서실장, 조국 당시 민정수석도 보였다. 이 모습을 찍은 사진에선 ‘자연스럽고 밝고 활기찬 분위기’가 느껴졌다.

인터넷에서 지지자들은 환호했다. “문 대통령과 수석들 실력뿐 아니라 외모도 출중” “외모 패권주의” “청와대 F(Flower)4”라는 말이 쏟아졌다. 취임 직후의 이 포토옵은 성공적이었다. 이즈음 문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율은 80%에 육박했다. 문재인 정부의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다.

남북 정상회담에서도 포토옵은 빛났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부부동반으로 백두산을 오르는 장면도 좋았지만, 2018년 4월 판문점 회담이 백미였다.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함께 군사분계선을 넘나드는 모습, 두 사람이 이른바 ‘도보 다리 벤치 회담’에서 다정스레 담소하는 모습은 정부의 캐치프레이즈인 ‘한반도의 봄’을 구현하는 듯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를 대표하는 이 두 포토옵은 원래의 빛을 점점 잃고 있다. ‘청와대 F4’ 중에 조국 전 수석은 재판에 넘겨졌고, 임종석 전 실장은 비서실장에서 물러난 뒤 울산시장선거 개입 의혹 사건으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 송인배 전 비서관은 불법 정치자금 수수혐의로 대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형을 확정받았다. 경내 산책 사진이 자아내는 ‘우아한 아우라’는 거의 사라진 셈이다.

청와대 기자단이 찍은 질병관리청장 임명장 수여식 장면. ⓒphoto 뉴시스
청와대 기자단이 찍은 질병관리청장 임명장 수여식 장면. ⓒphoto 뉴시스

빛바랜 ‘청와대 F4’ 포토옵

남북 정상회담 후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은 결렬됐고 북핵 폐기는 요원한 상황이 되고 있다. 북한은 문 대통령을 향해 험한 말을 쏟아냈다. 김 위원장의 동생인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은 문 대통령의 연설에 대해 “뻔뻔함과 추악함이 남조선을 대표하는 최고 수권자의 연설에 비낀 것은 참으로 경악스러운 일” 등의 막말을 했다. 문 대통령의 ‘운전자’ ‘균형자’론도 비판에 직면해 있다. 멋진 남북 정상회담 사진들은 이미지에 그칠 뿐 현실과 잘 연결되지 않고 있다.

아쉽게도, 청와대의 포토옵은 이제 자주 ‘감탄’보다는 ‘논란’을 일으킨다. MBC에서 열린 ‘2019 국민과의 대화, 국민이 묻는다’ 이벤트는 대통령이 국민 패널의 질문에 일일이 답하는 새로운 기획이었다. 그러나 야당에선 “대통령을 지지하는 국민 위주로 선정된 것 아니냐” 하는 비판이 나왔다. 이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전국적으로 부동산 가격이 오히려 하락했을 정도로 안정화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 발언에 진보성향 시민단체로 알려진 경실련까지 반발했다. 경실련 측은 “전국적으로 1.76% 내렸지만, 서울에서 아파트 값이 급등했다”라고 했다. 이 사례는 방송국 스튜디오에 근사하게 세팅된 이벤트가 중요하긴 하지만 결국 그것을 채워줄 콘텐츠(실적)가 더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문재인 정부에선 탁현민 의전비서관 같은 포토옵 전문가가 중용된다. 그러나 ‘탁현민 효과’는 예전 같지 않다. 몇몇 홍보전문가들에 따르면, 문재인 정부의 포토옵은 ‘치적’을 바탕으로 수행될 필요가 있다고 한다. 특히 국민 피부에 직접 와닿는 ‘경제적 치적’이 없으면, 포토옵은 ‘쇼통’ 같은 비판에 쉽게 직면하고 대국민 설득에도 힘이 달린다는 것이다.

지난 9월 11일 문 대통령은 질병관리본부에서 청(廳)으로 승격된 질병관리청을 찾아 정은경 신임 청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100여명의 질병관리관리청 직원들이 이 행사에 참여했다. 문 대통령은 “세계에서 모범으로 인정받는 우리 K방역의 영웅 정은경 본부장님이 초대 청장으로 임명되신 것에 대해 축하 말씀을 드린다”라고 했다.

이 행사를 기획한 탁 비서관은 “권위를 낮출수록… 권위가 더해지고 형식이 공감을 얻으며 의례는 감동을 준다. 정 청장의 임명장 수여식이 그랬다”라고 긍정적으로 자평했다. 일부 언론은 “청주까지 임명장 특급배송이요~”라는 우호적 제목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청’으로 바뀌면서 ‘질본’이라는 애칭도 사라졌다. 수여식장 벽면 상단엔 ‘심각’이라고 쓰인 붉은 바탕 문구가 붙어 있었다. 코로나19 확산세가 심각하다는 뜻으로 읽혔다. 이 문구는 청와대 홈페이지에 있는 수여식 사진엔 잘려나갔지만, 기자단이 촬영한 사진에선 선명하게 보였다. 자연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포토옵은 청와대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K방역 영웅 민망하지. 국민에게는 물리적 거리두기 하라면서 이렇게 모여 임명식 하면 되냐”라고 쓴 한 전문의의 페이스북 게시물은 소셜미디어로, 뉴스로 퍼져나갔다. 정 청장은 결국 “자영업자들께서 그런 장면을 보고 고통과 괴리감을 느끼셨다는 것에 대해서는 송구하다는 말씀을 드린다”라며 머리를 숙여야 했다.

문재인 정부에 지금 필요한 것은 사진이 아니라 치적이다.

허만섭 국민대 교양대학 부교수ㆍ전 신동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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