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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9호] 2020.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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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호의 正眼世論]‘민주’의 이름으로 ‘공화’를 파괴한 정권

신지호  평론가·전 국회의원 jayho63@gmail.com

▲ 조국 전 법무부 장관 구속 전 피의자 심문이 열린 지난해 12월 26일 서울 송파구 동부지방법원 앞에서 조 전 장관 지지자들이 구속영장 기각과 검찰 개혁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photo 뉴시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건만, 나의 사고 체계는 아직 엉성하다. 내 머릿속에는 보수주의, 자유주의, 공화주의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으면서도 어떨 때는 대립, 충돌하는 이념들이 혼재해 있다.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는 “우둔한 자는 경험으로부터 배우고, 현명한 자는 역사로부터 배운다”고 했다.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않고 역사로부터 깨달음을 얻는 사람은 현명하다. 역사 학습의 묘미는 바로 선인(先人)들의 경험에서 교훈을 얻는 것에 있다.
   
   경험이 인간의 인식 형성에 미치는 영향은 압도적이다. 경험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한 인간이 어떠한 경험을 했는가는 그의 지식 및 의식의 생성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 편견을 유발하기도 한다.
   
   나 또한 경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나에게는 동 세대들과 함께 겪은 공동의 경험이 있고 개인적 체험도 있는데, 그것들은 나의 의식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인간의 이성과 선험적 예지력을 신봉하던 20〜30대 사회주의자 시절에, 역사는 직선형이든 나선형이든 일정한 경향성을 띠고 발전한다고 믿었다. 그 경향성은 하나의 법칙으로 체계화될 수도 있으며, 그런 맥락에서 역사의 진보는 과학의 영역이라고까지 생각하였다. 인간의 내면세계도 그 과정에서 성숙, 발전해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요컨대 인간과 사회는 모두 이성의 명령에 따라 개조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사회주의에서 자유주의로
   
   그러나 나이테가 하나씩 늘고 경험이 쌓일수록, ‘나’라는 인간이 허점투성이이고 때로는 자기모순적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인간은 불완전하며, 그 불완전한 존재가 내리는 판단 또한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역사적=논리적’이라는 등식도 더 이상 인정하지 않기에 이르렀다. 더 나은 세상을 향한 노력은 계속되어야 하지만, 인간과 사회의 속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실험은 비극으로 끝난다는 교훈도 새기게 되었다. 영락없는 ‘찐 보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나의 사상적 체계를 잡아준 이념은 자유주의였다. 자유는 보수와 진보가 공히 주창하는 핵심 가치다. 그런데 각자가 강조하는 핵심영역은 다르다.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간섭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경제적 자유주의가 있는가 하면, 삼권분립과 법의 지배, 언론·출판 및 집회·결사의 자유를 주장하는 정치적 자유주의가 있다. 동성혼과 낙태를 지지하는 사회적 자유주의도 존재한다.
   
   2000년대 이후 한국의 보수는 주로 경제적 자유주의에 초점을 맞추어왔다. 시장보수라는 표현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왔다. 전경련, 한국경제연구원, 자유기업원, 한국경제신문 등이 이러한 흐름을 대변했다. 그러나 박근혜 탄핵 사태를 통해 자유시장과 자유기업을 외치던 전경련이 여전히 정경유착의 창구임이 드러나 시장보수의 한계를 드러냈다.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사건이 시장보수의 이율배반을 드러낸 것이었다면, 전경련 산하 자유기업원의 국정교과서 지지 캠페인은 시장보수의 무원칙성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박근혜 정부는 2014년 2월 기존 검정 중·고교 한국사 교과서의 편향성을 바로잡기 위해 국정교과서를 펴내겠다고 하여 사회적 논란을 낳았다. 당시 나는 방송 시사 프로그램에서 기존 교과서에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국정교과서 편찬에는 보수의 이름으로 반대한다고 논평했다.
   
   
   시장보수의 이율배반
   
   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통제와 간섭은 적을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이념이다. 그런데 여러 종의 검정교과서를 단종의 국정교과서로 대체하겠다는 것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 그리고 다양성과 다원주의에 대한 침해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탄핵 사태 속에서 나타난 한국 자유주의의 일그러진 모습은 공화주의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켰다. 공화주의는 시민적 덕성(civic virtue)과 공공선(common good) 추구라는 개념 때문에 흔히 자유주의와 대립되는 공동체주의의 일종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공화주의의 키워드는 어디까지나 자유다. 전통적으로 자유주의가 다른 사람이나 집단에 의한 간섭과 방해를 받지 않는 상태를 자유로 간주하는 반면, 공화주의는 주종적(主從的) 지배(dominance)와 예속(dependency)이 없는 상태를 진정한 자유로 인식한다.
   
   법의 지배(rule of law)는 바로 그런 상태를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다. 루소는 “우리는 법에 종속되어 있을 때 자유롭다. 하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에 종속되어 있을 때는 자유롭지 못하다. 왜냐하면 후자의 경우, 나는 타인의 의지에 종속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공화주의자들은 권력의 자의적(恣意的) 행사를 줄이기 위한 법적 제약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반면 자유주의자들에게 법은 간섭과 강제로 다가간다. 비(非)지배 자유는 신장되는데, 불(不)간섭 자유는 침해되는 충돌이 발생하는 것이다. 1958년 ‘두 개의 자유 개념(Two concepts of liberty)’이라는 제목의 옥스퍼드대학 취임 강연에서 “자의적 전제와 혼돈으로부터 여러분을 보호한다고 할지라도 법이란 항상 족쇄다”라고 말한 이사야 벌린은 자유주의자였고, “우리 모두는 자유롭기 위해 법에 복종한다”고 한 고대 로마의 정치사상가 키케로는 공화주의자였다.
   
   나는 키케로의 생각을 지지한다. 우월적 지위에 있는 갑의 횡포를 막기 위한 법은 필요하다. 사용자에게 노동법이, 가부장에게 가정폭력방지법이, 검사에게 형사소송법이, 의사에게 의료법이 간섭의 증가로 다가갈 수 있지만, 그들이 휘두를지도 모르는 자의적 권력의 공포로 인해 자유로워야 할 인간의 영혼이 피폐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는 반드시 마련되어야 한다.
   
   공화주의의 절박한 필요성은 문재인 정권 들어 시간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예종으로부터의 해방, 즉 공화주의적 자유는 엄정한 법 집행 없이는 실현될 수 없다. 유전무죄-무전유죄의 사회 풍토, 정치적 외풍에 의한 기획 수사 또는 노골적 봐주기 수사, 그리고 ‘그때그때 달라요’의 고무줄 판결 등 불공정한 법 집행은 공화국 시민들의 진정한 자유를 효과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장치인 법치주의의 사회적 토대를 갉아먹는다.
   
   이 점에서 한국 사회는 아직 갈 길이 멀다. 권력과 금전으로부터 독립된 온전한 법치주의만이 공화주의적 자유를 실현해 나갈 수 있는데, 문재인 정권 들어서서 ‘사법의 정치 예속’은 노골적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임명직에 대한 선출직의 ‘민주적 통제’라는 미명하에 편파적이고 불공정한 인사를 수차례 단행하여 공정한 법 집행의 수호자가 되어야 할 검사와 판사를 정권의 심기나 살피는 해바라기로 만들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을에게 불이익을 줄 수 있는 갑의 존재, 즉 지배와 종속의 가능성은 인간의 고귀한 영혼을 비굴하게 만들며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관계를 해친다. 미국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토머스 제퍼슨은 “종속관계는 아첨과 굴종을 낳고 미덕의 새싹을 짓밟는다”라고 했다.
   
   정치와 사법의 분리는 권력분립의 요체다. 진정한 공화국은 ‘법의 지배’가 온전히 실현되는 나라다. 공화주의는 권력자의 자의적 판단에 의존하는 ‘사람의 지배’, 즉 인치(人治)와 양립할 수 없다. 자유는 타인의 자의적 권력행사가 원천적으로 차단되어야 성취될 수 있다. 국가의 목적은 비지배 자유의 신장에 있으며, 고로 정치는 법의 지배에 근거해 조직되어야 한다.
   
   
   노골적인 사법의 정치 예속
   
   그러나 문재인 정권은 정반대의 길로 치닫고 있다. “우리 이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우리 이니 건들면 눈알 빠진다”는 대깨문들의 광기는 최고 권력자에 의해 철통 방어되고 있다. 이 정권 들어 절제와 배려라는 시민적 덕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오직 다수의 횡포만이 광란의 춤을 추고 있다. 문 정권은 민주의 이름으로 공화를 파괴한 정권이다. 공화와 동행하지 못하는 민주는 사이비 민주주의로, 최장집 교수의 지적대로 ‘유사 전체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입법·행정·사법의 삼권분립으로 유명한 몽테스키외는 저서 ‘법의 정신’(1748)에서 “덕성이 소멸되면 야심은 받아들일 만한 마음속으로 들어가고, 탐욕은 모든 마음속으로 들어간다. 욕망은 대상을 바꾼다. 그래서 인간은 사랑하던 것을 더는 사랑하지 않게 된다. 그전에는 법에 의해 자유로웠으나, 이제는 법에 대해 자유로워지고 싶어 한다”고 갈파하였는데, 문 정권이 바로 그렇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는 우리 헌법 제1조 1항이다. 민주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답을 못할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공화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제대로 답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헌법 제1조 2항(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은 민주만을 설명하고 있다. 우리 헌법은 ‘법의 지배’가 공화국의 핵심 개념임을 명기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 보니 대깨문 같은 사이비 민주주의 세력이 법치를 파괴하는 반(反)공화국 책동을 일삼고 있다. 언젠가 제7공화국 헌법이 만들어지면, 제1조 3항을 신설해 ‘대한민국은 사람이 아니라 법이 지배하는 나라다’라는 문구를 넣어야 할 것이다.
   
   최근 청년세대가 가장 중시하는 가치인 공정도 공화주의의 이름으로 풀어낼 수 있다. 법의 지배는 ‘법 앞의 평등’과 동의어다. 법 앞의 평등은 공정의 대전제가 된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공허한 미사여구와는 차원을 달리한다. 법의 지배가 실현되는 공정사회 건설은 향후 한국 사회의 핵심 과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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