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1월 12일 청와대 관저 접견실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과 전화통화를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1월 12일 청와대 관저 접견실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과 전화통화를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문재인 정권이 미국 대선에서 바이든이 아니라 트럼프의 당선을 내심 희망했다는 것은 특별한 비밀이 아니다. 정권의 ‘전위대’ 역할을 하는 김어준은 자신이 진행하는 방송에서 내놓고 트럼프가 되어야 한다고 선동했다. 이유는 딱 하나, 트럼프가 되어야 한반도 평화 쇼의 재탕, 삼탕이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미 대선을 열흘 앞둔 지난 10월 23일 통일부 국정감사에서 민주당 이낙연 대표가 “바이든이 당선되면 오바마 정부의 대북정책인 ‘전략적 인내’ 기조로 돌아가지 않겠느냐”고 물은 것은 걱정과 우려였고, 이인영 통일부 장관이 “오바마 3기로 접근할 수도 있지만, 클린턴 3기가 될 수도 있다”고 답한 것은 희망과 바람이었다. 실제 트럼프는 선거 유세 기간 중 “김정은, 시진핑, 푸틴이 나의 재선을 바란다”고 과시했고, 바이든 지원 유세에 나선 오바마는 “미국의 적대국 독재자들은 트럼프가 대통령 자리에 있어야 자국에 이롭다고 생각한다”고 비판했다.

안타깝게도(?) 선거 결과는 바이든의 승리로 끝났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과 회담을 갖기 위해 지난 11월 8일 미국 방문길에 올랐다. 11월 3일 치러진 미 대선의 승자가 개표 나흘 만에 겨우 가려진 직후, 패배한 현직 대통령 쪽과 회담하러 미국까지 날아간 것이다. 그는 미국 도착 직후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선다고 하더라도 과거 오바마 행정부 때와 같은 대북 ‘전략적 인내’ 정책으로 회귀하지는 않으리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근거는 없었다. 바이든 측 인사와 만나 대화도 하기 전에 김칫국부터 마신 것이다.

지난 11월 9일 폼페이오와의 회동에서는 “양국 간 긴밀한 공조를 이어나가기로 했다”는 공허한 합의를 이루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폼페이오는 “앞으로 몇 달 안에 제2기 트럼프 행정부로 순조로운 전환이 이뤄질 것”이라고 선거 불복을 시사했다. 강 장관은 선거 불복 장관과 긴밀한 공조를 논한 것이다.

반면 “주미 대사관에서 많이 준비한 것 같다”는 강 장관의 호언과 달리 기대했던 바이든 측과의 만남은 별 소득이 없었다. 민주당 상원의원을 만나고 바이든 측을 만났다고 홍보한 것은 전형적인 과장법이었다. 바이든 캠프는 미국 주재 외교관들이 이메일을 보내도 일절 응답하지 않는 ‘읽씹(확인하고 답하지 않음)’ 모드를 가동 중이다. 접촉 금지령을 내린 것이다. 강 장관은 민감한 시기에 부적절한 방미라는 ‘난센스 외교’를 하였다.

강 장관의 헛수고 방미에도 불구하고 더불어민주당 한반도 태스크포스 소속 송영길·김한정·김병기·윤건영 의원은 11월 16〜20일 미 워싱턴을 방문해 바이든 측 인사들과의 만남을 조율하겠다고 밝혔다.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위원장인 송영길 의원은 지난 11월 9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바이든의 대북정책은 오바마 시절의 ‘전략적 인내’로 회귀하지 않고 클린턴 시절의 적극적 관여정책으로 갈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하며 “미국이 북한에 특사를 보내든지 대화 통로를 열어서 북이 비핵화의 길로 가도록 신뢰를 쌓는 조치를 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대미 로비 자금을 지출하는 나라다. 미국의 비영리 정치 자금 추적 단체인 ‘책임정치센터(Center for Responsive Politics)’가 2016년부터 외국 정부와 기업이 미국을 상대로 로비 활동을 벌였다고 미국 법무부에 신고한 금액을 추적한 결과, 한국(1억6551만8893달러)은 일본(1억5698만달러)과 이스라엘(1억1839만달러), 사우디아라비아, 중국 등을 모두 제치고 1위에 올랐다. 눈길을 끄는 점은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2017년도 한국 정부의 대미 로비 지출이 2016년(633만달러) 대비 8배를 넘었다는 사실이다. 강 장관에 이어 민주당 방미단도 허탕을 치면, 문재인 정부는 ‘헛돈 쓴 호구(虎口·어수룩해 이용하기 좋은 사람)’가 되는 셈이다.

외교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보다 정확성이다. 지금 문재인 정권은 너무 서두르고 있다. 문 대통령은 지난 11월 9일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진전에 어떤 공백도 생기지 않게 하겠다”고 말했다. 이러한 조급증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대선 유세 기간 바이든은 김정은을 여러 차례 ‘독재자’ ‘폭군’ ‘깡패’라고 표현했고 심지어 히틀러와 동일선상에 놓고 비유하기도 했다. 바이든은 지난 10월 22일 TV토론에서 “북한은 이전보다 훨씬 더 쉽게 미국 본토에 도달할 수 있는 미사일 능력을 갖고 있다. 트럼프는 핵 야망이 큰 독재자를 정당화했다”고 비판했다. 부통령 재직 시절의 방중(訪中) 일화도 소개했다. 중국 측의 “왜 미국은 중국 가까이 미사일을 배치하고 한·미 군사훈련을 하느냐”는 질문에 “북한이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면서 “집권하면 계속 그렇게 할 것”이라고도 했다. 또 “어떠한 러브레터(정상 간 친서 교환)도 없을 것”이라며 “김정은이 핵 능력을 축소하는 데 동의하는 조건”에서만 만날 수 있다고 못 박았다. 이에 북한은 관영매체들을 통해 바이든을 “미친개” “늙다리 미치광이” “치매 말기”라고 비난했고, 바이든은 “북한의 욕설은 명예훈장”이라고 대꾸했다.

바이든의 외교정책을 총괄하는 토니 블링큰 전 국무부 부장관은 오바마 행정부 시절 북한 붕괴에 대비한 사전 협의를 중국에 제안했을 정도로 북한 이슈에 관심이 많은 인물로 전해진다. 그는 2018년 6월 뉴욕타임스 기고에서 “비핵화 약속이 북한의 현재 핵 능력을 줄이지 않는다. 북한은 과거에도 비핵화 약속들을 수없이 깼다”고 지적하였다.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핵 폐기(CVID)를 북한이 결단할 때까지 제재를 강화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런데도 여권은 주관적 희망에 매몰돼 비(非)현실적 주문(呪文)을 외고 있다. 특히 바이든이 김대중 전 대통령을 존경하고 햇볕정책을 지지했다는 것을 무척이나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 때는 북한이 핵을 보유하기 전이었다. 그때 한 이야기를 대륙간탄도미사일에 핵탄두의 소형화까지 진전된 현 상황에 대입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미국의 경우 정권이 바뀌면 정책 재검토에 3~6개월이 소요된다. 바이든 행정부는 북한 비핵화가 단기간에 풀리기 어려울 뿐 아니라 제재 효과가 쌓여야 해결 가능성이 커진다고 볼 것이다. 북한 문제는 일단 제쳐 두려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떠한 공백도 허용치 않겠다면서 금강산 개별관광, 종전선언 같은 주장을 하면 한·미 간 마찰음이 커질 수밖에 없다. 김대중 넥타이 말고는 믿을 구석이 없는 문재인 정권의 조급증은 일을 더 꼬이게 만들 것이다. 지금은 바이든 시대에 맞게 한국의 대북정책을 차분히 리셋해야 할 때다.

신지호 평론가·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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