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순천 팔마운동장에 있는 여순항쟁탑. 지난 5월 ‘여순사건위령탑’에서 이름을 바꿔 달았다. ⓒphoto 이동훈
전남 순천 팔마운동장에 있는 여순항쟁탑. 지난 5월 ‘여순사건위령탑’에서 이름을 바꿔 달았다. ⓒphoto 이동훈

더불어민주당이 ‘여수순천 10·19사건 특별법’ 제정을 서두르는 가운데, 정작 이 법안을 대표발의한 민주당 소병철 의원(초선·전남 순천광양곡성구례갑)의 부친(고 소석우씨)이 여순사건 때 좌익 반란군이 타도 대상으로 삼은 여수 철도경찰 간부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소 의원은 지난 총선 과정에서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을 ‘1호 공약’으로 내걸면서도 군경가족이란 사실을 선거공보 등에 공개적으로 밝힌 바 없어 논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여순사건 당시 군경가족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현지 표심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지난 21대 총선 때 민주당 인재영입 4호로 ‘순천광양곡성구례갑’에서 공천받아 국회에 입성한 소병철 의원이 대표발의한 ‘여수순천 10·19사건 특별법’의 핵심 내용은 여순사건의 진상조사와 함께 희생된 유족들에 대한 의료비와 생활지원금 등 법률적·재정적 지원을 하는 것이 골자다. 이를 통해 과거 ‘여순반란’ ‘여순병란(兵亂)’ ‘여순군란(軍亂)’ 등으로 통칭되다가 김영삼 정부 때인 1995년 ‘여순사건’으로 공식명칭이 바뀐 해당 사건을 ‘여순항쟁’으로 격상시키는 것이 목표다. 과거 ‘4·3폭동’으로 불린 제주 4·3사건을 ‘4·3항쟁’으로 격상시킨 것과 같은 경로를 밟아가는 것이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제주도에서 김달삼 등 남조선노동당(남로당)계 인사들이 일으킨 4·3사건 진압을 위해 여수와 순천 일대에 주둔 중이던 국방경비대(국군의 전신) 14연대 소속 남로당 계열 군인들이 일으킨 군사반란이다. 상부의 제주 투입 명령을 거부하고 현지에서 무장반란을 일으킨 사건으로, 길게 보면 제주 4·3사건의 연장선상에 있다. 북한 당국이 편찬한 조선대백과사전은 제주 4·3사건과 여순 10·19사건을 각각 ‘제주도 인민봉기’ ‘려수군인폭동’으로 기술하고 있다.

국정원 파견 검사 출신

현재 ‘여순사건 특별법’은 순천 출신 소병철 의원을 비롯해 같은 당 주철현(여수갑), 김회재(여수을), 서동용(순천광양곡성구례을), 김승남(고흥보성장흥강진) 등 전남 동부권 의원 5명이 주도적으로 이끌며 민주당 소속 의원 152명이 이름을 올렸다. 여기에는 순천 출신 김태년 원내대표를 비롯 전남지사 출신 이낙연 대표도 지원사격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태년 원대대표는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은 서로 연관된 쌍둥이 사건으로 동일한 수준의 역사적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며 “더 이상 미룰 수 없으며 우리 당은 국정감사 종료 후 정기국회에서 여순사건 특별법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1950년 6·25전쟁 전면도발을 앞두고 군내에 잠입해 있던 남로당 프락치 출신 군인들의 선동으로 시작된 반란사건으로 희생된 군경들을 비롯해 공무원 및 우익단체, 그 가족들도 적지 않은 상황에서 국민적 합의 없이 특별법 제정을 서두르는 것이 성급하지 않냐는 지적도 나온다.

게다가 특별법을 대표발의한 소병철 의원은 광주일고, 서울대 법대 출신으로 서울중앙지검 공안부 검사 출신이다.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 인수위 전문위원을 거쳐 국가정보원 초대 법률보좌관으로 부임해 김대중 대통령 낙선 공작인 ‘북풍(北風)사건’을 다뤘고, 주미(駐美) 한국대사관 법무협력관으로 근무한 경력도 있다. 현 정부에서 ‘눈엣가시’처럼 여겨온 국가보안법은 1948년 여순사건 직후 제정된 법이다.

이에 일각에서는 “여순사건 당시 반란군에 의해 고초를 당한 경찰 출신 부친을 두고, 공안부 근무 경력이 있는 검사 출신으로 사건의 복잡성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소 의원이 여순사건을 미화할 소지가 다분한 특별법을 대표발의하는 것이 맞느냐”는 지적도 나온다.

과거 청와대에 있었던 한 관계자는 “소병철 의원이 과거 정권에서는 본인이 여순사건 때 고초를 겪은 군경가족 출신이라는 사실은 동료 검사들 상당수도 알고 있었다”고 밝혔다. 사시 25회 출신인 소병철 의원은 이명박 정부 말, 호남 출신 첫 대구고검장을 지내며 줄곧 차기 검찰총장, 법무장관 하마평에 올랐었다.

김태선 전 서울시장 회고록에 기록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하던 국방경비대 14연대가 제주 출병 명령에 항명하고 무장반란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군경 및 공무원, 우익단체는 물론 지방 유지와 그 가족들까지 반란군에 의해 적지 않은 희생자가 나왔다는 것은 이미 확인된 사실이다.

당시 반란군은 여수 시내를 점령한 직후, ‘인민위원회가 모든 행정기구를 접수한다’ ‘유일하고 통일된 민족정부인 조선인민공화국을 보위하고 충성을 맹세한다’ ‘조국을 미 제국주의에 팔고 있는 이승만 정부를 분쇄할 것을 맹세한다’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민주주의 토지개혁을 실시한다’ ‘친일 민족반역자와 악질 경찰관 등을 철저히 처단한다’는 6개항의 결의안을 발표했다.

소병철 의원의 부친인 고 소석우씨 역시 단지 ‘철도경찰’이라는 이유로 반란군에 붙잡혀 구타와 고문 등 적지 않은 고초를 당한 경우다. 소병철 의원의 부친이 여순사건 당시 겪은 고초는 여순사건 당시 수도경찰청장을 지낸 김태선 전 서울시장(1903~1977)이 1974년 중앙일보에 남긴 회고록에서도 소씨의 사진과 함께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서울시장, 내무부 장관 등을 지낸 김태선 전 시장은 1948년 여순사건 당시 수도경찰청장을 지내고, 제2대 재향경우회장을 지냈다. 김태선씨의 회고록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여수·순천을 장악한 반란군들은 불과 2~3일 동안에 경찰관 400여명과 우익 인사 및 경찰관 가족 500여명 등 900여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경찰관들의 수난이 얼마나 처참한 것이었나 하는 것은 당시 여수 철도경찰 지대장 소석우 경위의 체험담을 들어보면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회고록 상세 내용은 19쪽 상자기사 참조)

회고록에 따르면, 19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 당시 여수 철도경찰 지대장 소석우 경위는 과거 일제가 조성한 비행장이 있었던 여수 신월리(현 한화 신월사업장)에 주둔하던 반란군이 여수 시내를 덮치자 부하 18명을 이끌고 반군에 대항해 싸운다.

하지만 순식간에 부하 13명이 피살되자 졸지에 도망자 신세가 됐다. 하지만 이내 반군에 붙잡혀 “철경(철도경찰)으로 있으면서 열차 안에서 유부녀 몇 명을 겁탈했느냐” “쌀을 몇백 가마 훔쳐 먹었느냐”는 신문을 당하며 모진 고문까지 당했다고 한다. 이후 수중에 있던 당시 돈 2만7000원을 반군에게 건네고 공개총살 처형장에서 간신히 살아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여순사건 관련 회고록을 남긴 김태선 전 시장이 여순사건 당시 수도 서울의 치안을 총괄하는 수도경찰청장이었던 만큼, 여순사건 당시 군과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경찰 측 입장이 과도하게 대변됐을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김태선 전 시장이 소석우 당시 여수 철도경찰 지대장이 겪은 일을 기록한 대목은 상당히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소씨가 ‘순천시 인제동 55의 11에서 남산주유소를 경영하고 있다’며 구체적인 생활상까지 적고 있기 때문이다. 소병철 의원 역시 지난 선거과정에서 자신이 “순천 남산주유소집 삼남매 중 막내였다”며 “아버지가 갱생보호소 순천지소장을 지냈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 재향경우회 순천지회의 한 관계자는 “소병철 의원의 부친 소석우씨는 대선배님으로, 과거 재향경우회 순천지회장을 역임하셨다고 들었다”고 밝혔다.

회고록은 당시 상황 전개와도 부합한다. 당시 반란은 남로당 소속으로 군내에 잠입해 있던 지창수(상사)와 김지회(중위) 주도로 일어났는데, 당시 여수를 점령한 약 2000~3000명 규모의 반란군은 지리산으로 입산하는 과정에서 철도를 타고 북상하면서 순천, 광양, 구례, 곡성, 보성, 고흥 등 전남 동부 7개 시군을 차례로 점령했다. 전남 동부 일대가 사실상 남로당의 지령을 받는 반란군에 의해 차례로 적화(赤化)된 것이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약 2달 만에 발생한 최초의 군사반란 사건으로 6·25전쟁 직전 이승만 정부 최대 위기였다. 이에 작전권을 쥔 미군 당국과 이승만 대통령은 국방경비대 14연대 소속 반란군을 즉각 ‘빨갱이’로 규정, 대대적 토벌에 들어갔다. 결국 전남 동부 일대는 반군토벌전투사령부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송호성 장군이 이끄는 토벌군에 의해 차례로 탈환됐고, 군사반란 주동자인 김지회와 지창수는 각각 사살, 생포되었다. 지창수는 6·25전쟁 발발 직후 처형됐다.

하지만 반란군 진압과정에서 무고한 양민들이 함께 희생됐고, 2009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당시 위원장 안병욱)는 여순사건으로 여수에서 124명, 순천에서 439명의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했다고 밝힌 바 있다. 다만 유가족 측은 “여순사건 희생자는 1만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여순사건 특별법을 발의한 더불어민주당 전남 동부권 의원들. (왼쪽부터) 김승남·주철현·소병철·김회재·서동용 의원. ⓒphoto 소병철 의원 페이스북
여순사건 특별법을 발의한 더불어민주당 전남 동부권 의원들. (왼쪽부터) 김승남·주철현·소병철·김회재·서동용 의원. ⓒphoto 소병철 의원 페이스북

전남 여수 자산공원에 있는 경찰충혼탑과 충혼비(오른쪽). 충혼비는 한동안 땅에 파묻혔다가 이곳으로 옮겨왔다. ⓒphoto 이동훈
전남 여수 자산공원에 있는 경찰충혼탑과 충혼비(오른쪽). 충혼비는 한동안 땅에 파묻혔다가 이곳으로 옮겨왔다. ⓒphoto 이동훈

땅에 파묻혔다 나온 경찰충혼비

여순사건 당시 군경가족인 소병철 의원이 특별법 제정을 주도하고 있는 ‘여순사건’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복잡한 사건 중 하나라고 평가받는다. 사건 발발 직후 국군 부대번호에서 ‘14연대’를 연상시키는 ‘4’ 자가 통째로 사라졌을 정도로 언급이 금기시됐으나, 운동권 교과서로 불리는 순천 출신 조정래 작가가 쓴 소설 ‘태백산맥’의 배경이 되며 서서히 재평가되는 수순을 밟았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여순사건은 관련 특별법을 제정하기도 전에 적어도 여수와 순천 일대에서는 이미 ‘여순항쟁’으로 격상된 분위기다. 순천의 팔마종합운동장 한쪽에 서 있던 ‘여순사건위령탑’은 지난 5월 ‘여순항쟁탑’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받은 고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의 글씨로 ‘동백꽃 붉은 도시 반란의 도시/ 푸른 하늘 서러워 꽃이 지더니/ 흐르지 못한 반백 년 항쟁의 세월/ 이제야 흐르네 우리 가슴에’란 시가 새겨져 있다. 순천 버스터미널 인근 사거리에는 지난 10월 ‘여순항쟁 역사관’이 문을 열었고, 소병철 의원이 검찰 퇴임 후 석좌교수를 지낸 국립 순천대는 지난 10월 12일부터 ‘여순항쟁 역사화전’을 개최했다.

반면 지난 11월 10일 기자가 찾아간 여수시 종화동의 자산공원 한쪽에 세워져 있는 경찰충혼비 일대는 찾는 사람도 없이 쓸쓸한 분위기였다. 이 비(碑)는 여순사건 당시 14연대 소속 반란군에 맞서 싸우다 순직한 고인수 여수경찰서장(총경) 등 경찰관 72위의 영령을 모신 탑이다. 여순사건 직후인 1950년 옛 여수경찰서 경내에 이 비가 세워져 있었을 때만 해도 오가는 사람들이 배례를 했다고 하는데, 이후 아무도 관심을 쏟지 않아 한동안 땅속에 파묻혀 있기도 했다.

이후 2014년경에 여순사건 당시 격전지였던 ‘쫑포(종포)’와 오동도가 내려다보이는 자산공원 한쪽으로 옮겨졌다. 재향경우회 순천지회의 한 관계자는 특별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재향경우회 입장에서 민감한 주제라 말하기가 좀 그렇다”며 “관심 없다”고 말을 아꼈다. 그렇게 ‘동백꽃 붉은 도시’에서 여순사건은 ‘여순항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김태선 당시 수도경찰청장의 여순사건 회고

여수 철도경찰 지대장 소석우 경위 총살장서 구사일생

(전략) 경찰관들의 수난이 얼마나 처참한 것이었나 하는 것은 당시 여수 철도경찰 지대장 소석우 경위의 체험담을 들어보면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소씨는 현재 순천시 인제동 55의11에서 남산주유소를 경영하고 있다.)

반군들이 여수시를 습격한 19일 밤 소 경위는 부하 18명을 이끌고 시내로 나가 반군에게 대항했지만 순식간에 13명이 피살되고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자 나머지 5명에게 피신할 것을 명령하고 철경 사무실로 달려갔다. 주요 서류를 정리해 버리기 위해서였다. 사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벌써 반군들은 철경 사무실 쪽으로 벌떼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소 경위는 숨을 곳을 찾다가 숙직실 벽장 문을 열어젖혔다. 비좁은 벽장 속에는 이미 3명의 철경들이 숨어 있어 더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되돌아서 나오던 소 경위는 사무실 뒷문으로 뛰어든 반군들에게 잡혀 자신이 가지고 있던 포승으로 두 손을 결박당했다. 소 경위는 반군에게 끌려가면서 “나는 경찰관이 된 지 한 달밖에 안 된다. 나쁜 일을 한 적이 없으니 제발 목숨만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마침 소 경위의 주머니에는 2만7000원이 들어 있었다. 소 경위는 7000원을 꺼내 옆에 앉은 반군에게 쥐여주며 살려 달라고 애걸했다. 돈을 받은 반군이 운전하는 동료를 보고 “이 자식 살려줄까?” 하고 물었다. 소 경위는 다시 만원을 꺼내 그들에게 주면서 사정했다.

반군들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를 집까지 태워다주고 돌아갔다. 죽을 뻔했다 살아난 소 경위는 그대로 있다가는 또 반군들에게 잡힐 것 같아 여수를 벗어나기로 하고 밤을 틈타 떠났다. 그는 약 20리 떨어진 미평(여수시 미평동)까지 가서 또 반군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소 경위는 “어린아이 병이 위독해 약을 지으러 간다”고 둘러댔다. 반군들은 이 말을 곧이들었으나 지방폭도 중에서 얼굴을 아는 자가 소 경위를 가리키며 “저놈은 여수 철도경찰대장”이라고 소리쳤다.

반군들은 소 경위를 미평 주재소로 끌고 가 모진 고문을 시작했다. 반군들은 “철경으로 있으면서 열차 안에서 유부녀 몇 명을 겁탈했느냐”면서 당치도 않은 신문을 했다. 그런 일이 없다고 부인하자 반군들은 장작으로 소 경위를 마구 두들겨 팼다. 고문에 못 이긴 소 경위가 “세 번 했다”고 거짓 자백하자 이번에는 “쌀을 몇백 가마 훔쳐 먹었느냐”고 다그쳤다. “100〜200가마 훔쳐 먹었다”고 아무렇게나 대답하자 반군들은 “그럼 됐다”면서 소 경위를 유치장으로 밀어넣었다.

소 경위는 깜깜한 유치장 바닥에 미끄러져 넘어졌다. 손 짚은 곳이 끈적끈적했다. 오물인 줄 알고 손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 보았다. 피비린내가 코를 울컥 찔렀다. 유치장 바닥은 선혈로 가득했으며 칼에 찔려 죽은 10여구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다. 모두 학살당한 경찰관들이었다. 어둠 속에 눈이 익자 시체 가운데서 한 명이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는 철경 사무실 벽장에 숨었던 부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어깨가 반쯤 잘려 팔 하나가 밀려 나간 무참한 꼴이었다. 그는 소 경위를 알아보고 “주임님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주임님은 칼에 맞지 않으셨습니까” 하고 모기 소리 같은 목소리로 말하다 눈을 감고 말았다.

새벽이 되자 반군들은 소 경위를 끌어내 여수경찰서로 데려갔다. 여수경찰서에서도 총살당한 사람이 수없이 많았다. 반군들은 밤 9시쯤 되자 유치장에 갇혔던 10여명을 불러내 경찰서 뜰에다 나란히 세워 놓고 기관총을 난사했다. 나란히 섰던 경찰관들이 낙엽처럼 쓰러졌다. 소 경위도 물론 쓰러졌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지만 소 경위는 추운 기를 느꼈다. 그는 “내가 틀림없이 총살당했는데 웬일인가” 하고 몸을 일으켜 보았다. 아무데도 상한 데가 없었다.

살았다고 생각한 소 경위는 여수 뒷산으로 허둥지둥 기어 올라갔다. 죽을힘을 다해 소라(여수시 소라면)까지 다다랐으나 날이 밝자 또 반군에게 잡히는 몸이 됐다. 반군들은 피투성이의 소 경위를 보자 처형장에서 도망 온 것을 당장 알아차리고 총대로 소 경위의 등어리를 수없이 펑펑 내리쳐 반죽음이 된 그를 소라 유치장으로 끌어넣었다. 유치장에는 소라 지서장과 여수경찰서 기마대장이 먼저 끌려 와 쓰러져 있었다. 그들은 뼈가 부러지고 살이 찢어져 보기조차 처참한 모습이었다. 잠시 후 그들은 총살장으로 또 끌려 갔다. 총살장은 공동묘지였다. 공동묘지에는 발가벗긴 채 학살된 시체들이 즐비하고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후략)

자료 : 1974년 11월 21일, 중앙일보 게재 ‘김태선 회고록’

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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