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12일 텍사스주에서 일정을 마치고 백악관으로 돌아온 트럼프 대통령. ⓒphoto 뉴시스
지난 1월 12일 텍사스주에서 일정을 마치고 백악관으로 돌아온 트럼프 대통령. ⓒphoto 뉴시스

미국 역사에 이런 대통령은 없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공화당)은 조 바이든 차기 대통령(민주당)의 취임식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선거 조작(election fraud)’을 주장하면서 대선 결과에 승복하지도 않았다. 친트럼프 시위대는 수도 워싱턴의 의회 건물에 들어가 난동을 부렸다. 이 과정에서 몇 명이 숨졌다. 미국의 최고 수출품인 민주주의는 모양새를 구겼다.

트럼프 본인도 말기에 여러 수모를 당한다. 민주당 연방 하원의원들은 임기가 10여일 남은 그에 대해 ‘내란 선동’ 혐의로 탄핵소추안을 발의했다. ‘폭도들’의 의회 난입 배후라는 것이다. 퇴임 후 그는 이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을 수 있다.

그는 사건 2시간 전 지지자들 앞에서 “의사당으로 가라”고 했다. ‘트위터’ 계정에 “더 열심히 맞서 싸워라” “힘을 보여줘라”라고 쓰기도 했다. 그가 진절머리 내온 ‘뉴욕타임스’가 그의 트윗을 복원 및 해석한 결론은 ‘선동’이었다. 바이든 당선인은 “지난 4년간 트럼프 대통령에 의해 민주주의와 헌법이 무시돼 온 것이 폭력을 촉발했다”라고 했다.

‘트위터’는 그의 계정을 영구정지시켰다. ‘페이스북’도 현직 미국 대통령의 계정을 임기 종료 때까지 무기한 차단했다. “위험이 너무 크다”(마크 저커버그 CEO)라는 이유였다.

대부분의 미국 대통령은 8년 연임을 해왔다. 4년 만에 선거에 져서 물러나는 건 그 자체로 불명예다. 거기에다 트럼프는 자국 미디어와 정치권의 비난을 한 몸에 받고 세계적 망신을 사고 있다.

‘막말 참회’ 후에도 설화

돌이켜보면, 이런 처지가 된 것은 자업자득인 측면이 있다. 2016년 대선 때 트럼프 후보는 원고에 없는 즉흥 연설로 공화당 지지자를 매료시켰다. 그의 말에는 상대편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에게선 느낄 수 없었던 솔직함과 소탈함이 있었다. 이 때문에 여론조사 예측을 뒤엎고 당선된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만큼 선을 넘는 발언도 자주 나왔다.

“오바마가 IS(이슬람국가)를 창설했다. 사기꾼 힐러리를 공동창설자로 부르겠다.”

“힐러리는 뇌에 합선을 일으켰다.”

“우리는 중국이 미국을 강간하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내 진정한 매력은 내가 엄청난 부자라는 점이다.”

2016년 8월 18일 트럼프는 그간 내뱉은 막말에 대해 “후회한다”라며 처음으로 사과했다. “특히 개인적인 아픔을 주는 발언들에 대해선 그런 마음이 더하다”라고 참회했다.

이후 언제 그랬냐는 듯 그의 설화는 이어졌다. ‘개인적인 아픔을 주는 발언’도 계속됐다. 2020년 대선 땐 조 바이든 후보를 ‘졸린 조’ ‘지하실 바이든’ ‘조진핑’이라 호칭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자택 지하 공간에서 선거대책회의를 하는 점, 시진핑 국가주석의 중국에 상대적으로 유화적인 점을 그냥 두지 않은 것이다.

대선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2020년

1월 미국 내 누구도 트럼프의 재선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때까지 미국 경제는 호황이었고 그는 높은 국정수행 지지도를 누렸다. 78세의 바이든이 역동적인 트럼프를 꺾는 건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불과 두어 달 만에 ‘넷플릭스’에서 상영되는 정치드라마 이야기처럼 상황이 극적으로 역전됐다. 내가 보기에, 이는 트럼프의 입이 자초한 일이었다. 그를 낙선으로 돌려세우는 ‘터닝포인트’를 하나만 꼽으라면, 나는 2020년 4월 2일 워싱턴 백악관에서 열린 코로나19 태스크포스에서 트럼프가 발언하는 장면을 선택할 것이다.

“마스크 대신 두꺼운 스카프를”

“마스크 착용과 관련해 새로운 권고가 나올 것이다. 사람들은 마스크를 착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의무적으로 따를 필요는 없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하길 원하지 않는다. 만약 사람들이 스카프를 쓰고자 한다면 그럴 수 있다. 스카프가 더 낫다. 그게 더 두껍다. 마스크를 쓰지 말고 대신 스카프를 사용하라고 추천한다.”

‘스카프가 더 낫다. 그게 더 두껍다.’ 이것은 트럼프식 유머일까? 미국인 수십만이 코로나19로 사망하는 상황에서 마스크를 쓰지 말라는 말은 무책임하게 들렸다. 유사한 비과학적인 신념이 트럼프의 입에서 이후에도 계속 흘러나왔다.

트럼프는 마초 성향의 상당수 백인 남성이 그러하듯, 마스크 착용을 유난히 싫어했다. 이런 모습도 쟁점이 됐다. 대통령은 점점 희화화됐다. 백인 경찰의 무릎에 목이 눌려 흑인이 사망한 플로이드 사건 때도 트럼프는 ‘군 동원’ 같은 자극적인 말을 했다. 하지 않아도 될 이 말로 시위는 전국으로 번졌다. 대중은 트럼프를 불신하게 됐다.

많은 나라에서 확진자 수가 늘어나는 것에 비례해 국가원수의 지지율이 올랐다. 사실 트럼프는 코로나19라는 난제를 해결할 필요도 없었고 아주 유능하게 대처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다른 나라 정상들처럼 ‘상식적이고 평범한 말’을 국민에게 전하기만 하면 됐다. 행정관료가 올려주는 매뉴얼에 따르면 충분했다. 국가적 위기상황이 오면 국민은 대통령의 ‘안정감 있는 말’에서 위안을 찾고 희망을 지니는 법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개인기와 애드리브에 너무 의존했다.

결국 트럼프는 거침없는 말투로 대통령이 됐지만 이것으로 인해 자리에서 내려오게 됐다. 트럼프도 지금쯤 자신이 이렇게 된 이유를 깨닫고 있을 것이다.

2017년 11월 8일 한국을 방문해 국회에서 연설을 한 트럼프 대통령. ⓒphoto 뉴시스
2017년 11월 8일 한국을 방문해 국회에서 연설을 한 트럼프 대통령. ⓒphoto 뉴시스

트럼프, 코스피 호황에 기여

트럼프가 눈에 거슬리는 비상식적인 언행을 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한국에 준 영향은 냉정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그는 ‘네로 황제’가 아니라 ‘악동’에 가깝다. 트럼프 재임 중엔 로마가 불타는 것 같은 일은 없었다. 그의 기묘한 말과 행동은 누구에게도 특별한 피해를 주지 않는 자잘한 결과로만 이어졌다.

친트럼프 시위대의 의사당 난입 사건도 달리 해석될 여지가 있다. 엄밀히 보면 그는 지지자들에게 “의사당으로 가라”고 했지 “의사당 안으로 들어가라”라고 하진 않은 듯하다. “더 열심히 맞서 싸워라” “힘을 보여줘라”라는 말은 트럼프를 싫어하는 쪽에겐 ‘폭력 선동’으로 들린다. 그러나 명시적 선동이라기보다는 법적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은유적 표현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스포츠 경기에서도 “싸워라” “힘내라” 같은 말을 흔히 쓴다.

의사당 난입으로 추락한 미국 주가는 다음 날 바로 반등했다. 그러나 탄핵소추는 국정 난맥과 대형 기술주 규제의 신호탄으로 읽히면서 주가에 길고 강한 악재가 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곧 나가는 대통령을 탄핵소추 하겠다는 미국 민주당 의원들이 조금 진정하면서 균형감각을 찾는 것이 어떨까 한다.

언론에서 거의 다루진 않지만, 안보와 경제 분야에서 트럼프는 한국에 특히 긍정적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결과물’을 놓고 보면 그렇다.

유엔 연설에서 “북한을 완전히 파괴하겠다”라고 한 으름장은 그의 책 제목대로 ‘협상의 기술’이었다. 트럼프는 하노이, 싱가포르, 판문점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만났다. 김정은에 대한 호칭은 ‘꼬마 로켓맨’에서 ‘내 친구’로 부드러워졌다. 트럼프는 ‘정상회담 후 몇 년간 북한이 핵·미사일 실험을 하지 않아 온 점’을 치적으로 내세운다. 일리가 없지 않다. 그런데도 대북제재는 더 촘촘해졌다. 북한이 실질적으로 얻은 것은 별로 없다.

경제와 관련해 많은 전문가는 ‘거시적으로 보면 반도체·정보통신 산업의 사이클이 일본에서 한국으로 넘어왔고 이젠 한국에서 중국으로 넘어가는 중이었다’라고 분석한다. 트럼프는 이런 흐름을 힘으로 틀어막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정부는 삼성전자 7나노 공정의 잠재적 경쟁자이자 중국 최대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업체인 SMIC를 블랙리스트에 올려 수출제한조치에 나섰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중국 반도체산업의 싹을 잘라버리겠다”라는 초강력 제재였다. 세계 1위 휴대전화 제조사인 중국 화웨이도 트럼프의 표적이 돼 창사 이래 최대 위기를 맞았다. 트럼프는 중국 소셜미디어인 위챗과 틱톡의 모회사인 톈센트와 바이트댄스의 미국 거래를 전면 금지하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중국 3대 통신회사들도 뉴욕 증시 퇴출이 결정됐다.

기술력과 가격경쟁력으로 무장한 중국 기업들은 한국의 강력한 경쟁 상대로 부상하고 있었다. 한국경제신문은 “미국, 화웨이 이어 SMCI 제재 칼날… 삼성 파운드리엔 긍정 회로”라고 표현한다. 동아시아에선 중국 제조업이 흥하면 한국 제조업은 위기를 맞는 ‘제로섬 게임’이 펼쳐진다. 이 구도에서 트럼프의 중국 정밀타격은 한국에 기회가 되고 있다고 한다. 커다란 잠재적 위협 요소가 어느 정도 제거되면서 한국 대표기업들의 실적 기대치가 높아졌고 이것이 최근 한국 주식시장 활황의 숨은 동력이 됐다는 이야기다.

“함께 자유로운 하나의 한국”

트럼프는 대외 관계에서 주류적 가치에 부합하는 점진적 어법보다는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급진적이고 충동적인 어법을 선택한다. 예를 들어 그는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우한 바이러스’라고 거리낌없이 부른다. 중국 측 과실로 중국 우한에서 발원해 전 세계 인류에 큰 피해를 주고 있으니 우한 바이러스가 맞는다는 논리다.

트럼프의 접근법은 사회 주류의 ‘엘리트 담화’와 격렬하게 충돌했다. 트럼프가 뉴욕타임스, CNN, 민주당을 싫어하는 만큼 이들도 그를 병적으로 싫어한다. 그러나 책 ‘정치수사학’에 따르면, 다른 한편으로 트럼프의 전략은 ‘스테이트크래프트(statecraft·전통적 외교수단에 새로운 기술을 접목한 새로운 틀)’로 평가된다. ‘트럼피즘(트럼프주의)’은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표를 얻은 낙선자’다. 지지자들은 기성 정치가의 ‘뱀장어처럼 기름진 말투’보다는 그의 ‘자기감정에 충실한 직설적 말투’를 더 좋아한다. 트럼프는 2017년 11월 8일 방한 당시 국회 연설에서 많은 의원과 한국 국민에게 다른 면모를 보여 줬다. “고전적이면서 현대적인 한국의 모습에 대한 경외감”으로 시작한 그의 연설은 “함께 자유로운 하나의 한국과 안전한 한반도”라는 너무나 따뜻하고 감동적인 비전으로 마무리됐다.

허만섭 국민대 교양대학 부교수ㆍ전 신동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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