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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5호] 2021.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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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호의 正眼世論]“新보수는 시민을 찾아와야 한다”

신지호  평론가·전 국회의원 jayho63@gmail.com

▲ 2009년 1월 20일 인파를 뚫고 취임식장으로 향하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시 오바마의 취임사 첫머리는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이 아니라 ‘동료 시민 여러분(My fellow citizens)’으로 장식됐다. photo 뉴시스
“동료 시민 여러분(My fellow citizens).”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2009년 1월 20일 취임 연설의 첫머리를 이렇게 장식하였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이라는 상투적 어구보다 훨씬 인간적이고 민주적으로 다가온다. 미국에서는 자국민을 가리켜 ‘미국 시민(American citizen)’이라 부른다. 우리가 한국 시민(Korean citizen)이라는 표현을 거의 쓰지 않는 것과 대조적이다. 국적 획득도 미국 시민권(U.S. citizenship) 취득이라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시민이 되려면 도시에 거주해야 한다. 시골에 살면 군민이나 읍민이 된다.
   
   시민은 근대의 산물이다. 시민(市民)은 신민(臣民)과 구별된다. 신민은 군주 치하의 백성을 가리킨다. 전통적 신분제 사회에서 자기 삶의 주권을 지니지 못한 채 의무만이 부여된 복종과 수탈의 대상이었다. 이 같은 봉건적 질서를 깨트리고 영국의 명예혁명, 미국의 독립혁명, 프랑스혁명 등을 통해 등장한 것이 근대 시민사회다. 시민은 생명, 자유, 재산의 권리를 가진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다. 신민의 복종은 무조건적이었고 국가는 그 대가를 제공하지 않았지만, 시민은 자신들의 주권을 존중하는 ‘법의 지배’에만 복종하였다. 서구의 근대 국민국가는 이렇게 형성된 시민사회로부터 나왔다. 그래서 시민은 곧 국민이 된다.
   
   물론 근대 초기의 시민 개념에는 중대한 하자가 있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All men are created equal)’는 미국 독립선언문과 달리, 주권을 가진 시민은 유산계급의 백인 남성으로 제한되었다. 그러던 것이 많은 사람의 피땀 어린 노력으로 성별, 인종, 재산 등을 따지지 않는 보편적 시민 개념으로 확장되었다.
   
   이처럼 시민 없는 근대는 상상할 수 없다. 시민은 서양 문명의 귀중한 성과다. ‘시민은 국가의 친구이고, 국가는 시민의 우정에 보답한다’는 것이 서구 보수주의의 기본 시각이다. 시민권(civil right) 수호는 보수의 기본 임무다.
   
   그런데 보수가 수호해야 할 것은 개인의 권리만이 아니다. 관계적 존재인 인간이 만든 자유결사 역시 수호의 대상이 된다. 결사(結社)는 여러 사람이 공동의 목적 달성을 위해 만든 단체로 정당, 기업, 문화예술단체, 종교단체, 클럽 등 다방면에 걸쳐 있다. 자유결사는 시민사회의 뿌리다. 시민사회는 하향식(top down)이 아니라 자발적 결사에 뿌리를 두고 상향식(bottom up)으로 조직된다.
   
   보수주의의 원조 에드먼드 버크는 사회가 대면 상호작용을 통한 상향식 접근법에 의해서만 형성될 수 있다고 믿었다.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을 책임지고 이웃을 배려하는 자유로운 존재로서 상호작용하는 요령을 배우는 곳은 가정, 지역 동호회와 단체, 학교, 직장, 교회 등이다. 시장이 자생적 질서였던 것처럼, 시민사회도 자생적으로 성장, 발전하였다.
   
   소비에트 공산주의자들이 동유럽을 접수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다양한 시민결사의 해산이었다. 파괴와 건설이라는 사회주의 혁명의 문제의식에서 볼 때, 시민결사는 파괴해야 할 구체제의 골간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상향식으로 성장한 시민사회를 하향식으로 파괴하였다. 자율이 없어진 공간은 공산당의 지령과 국가통제라는 타율로 대체되었다.
   
   대한민국은 위로부터 조직된 국가다. 시민사회로부터 나온 상향식 국가가 아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대한민국 체제의 양대 기둥은 내재적 축적의 산물이 아닌 외래적 발전의 결과물이다. 압축적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했지만,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 등 국가주의적 요소는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다. 이 점에 관한 한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은 본질적 차이가 없다. 필자는 2006년에 발표한 글에서 이렇게 썼다.
   
   ‘흥미로운 것은 개발독재의 정부주도형 경제성장을 사시(斜視)로 바라보는 집권민주화세력이 정부의 개입과 간섭을 선호하며 큰 정부를 획책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무현 정권 출범 이후 공무원 수가 크게 늘고 세금폭탄이 퍼부어졌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대체로 산업화세력이 성장과 효율을 위한 국가개입을 정당화했다면, 민주화세력은 분배와 형평을 위한 국가개입을 선호하고 있다. 그런데 경기활성화의 수단으로 사회적 일자리 창출과 한국형 뉴딜정책 등을 주장한 것을 보면, 노무현 정권은 성장을 위한 정부의 주도적 역할마저 인정하고 있다.
   
   이는 한국의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이 견원지간(犬猿之間)의 치열한 정치투쟁과는 달리, 민간의 자율과 창의를 우선하기보다는 정부의 개입과 통제를 선호하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음을 말해준다. 대표적인 예로 개발시대의 고교평준화 및 본고사 폐지 정책을 집권민주화세력이 3불정책을 통해 금과옥조인 양 지키고자 하는 것을 들 수 있다.’
   
   10여년의 세월이 흐르고 문재인 정권이 들어섰지만, 본질적 행태는 크게 바뀐 게 없다. 위 인용문에서 단어 몇 개만 바꾸면 현 상황을 설명하고도 남는다. 하향식 통치는 타율적 인간, 무책임한 개인을 양산한다. 위로부터 조직된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자율적 시민사회의 온전한 실현과 시민자치는 아직 요원해 보인다. 뒤집어 말하자면, 보수와 진보 중 어느 쪽이 먼저 국가통제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날 것인가는 향후 한국의 사상계와 정치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다.
   
   보수는 기본적으로 개인과 결사의 자유와 자율 그리고 다양성과 다원주의를 옹호한다. 국가적 획일성 강조는 보수의 원형과 거리가 멀다. 국정교과서는 ‘깍두기 머리’와 교련의 추억을 되살릴 뿐이다.
   
   구(舊)보수가 친(親)국가였다면, 신(新)보수는 친시민이어야 한다. 자율적 시민사회와 평화롭게 공존하는 국가와, 시민결사를 파괴하여 그 기능을 국가조직에 흡수하려는 국가는 천지차이다. 문재인 정권은 후자다. 보수는 국가통제, 관치(官治)보다 시민자치, 민치(民治)를 중시하고 우선해야 한다. ‘더 큰 시장’을 넘어 ‘더 큰 시민사회’를 지향해야 한다. 시민단체라면 알레르기 반응을 나타내는 모습은 거두어야 한다. 오히려 시민이라는 소중한 이름을 좌파가 독점하게끔 방치한 과오에 대해 깊이 반성하여야 한다.
   
   권력에서 밀려난 지금이 오히려 체질을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보수 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상명하복, 위계질서, 가부장주의, 꼰대 등과 같은 부정적인 것들이 많다. 이제 보수는 시민자치 수호 세력으로 거듭나야 한다. 국가통제와 관치의 공간을 줄이고 시민자치와 민치의 공간을 넓혀나가는 진지전을 견결하게 수행해나가야 한다. 일본 격언에 ‘꽃이 피지 않는 겨울에는 뿌리를 깊이 내려라’라는 말이 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되뇌며 마음의 위안을 구하는 관조적 자세를 넘어 시민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리는 개척자 정신을 발휘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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