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지난 6월 29일 서울 서초구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관에서 대선 출마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지난 6월 29일 서울 서초구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관에서 대선 출마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자유민주주의는 대한민국의 헌법가치다. 헌법 전문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한다는 표현이 나오고, 제4조에도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고 명기되어 있다.

그런데 자유민주주의를 거북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문재인 정권은 2018년 개헌안에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민주적 기본질서’로 변경하려 했다.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 집필 기준에서도 자유를 빼고 그냥 민주주의라 표기했다. 민주주의가 자유민주주의보다 확장적 개념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굳이 자유를 빼려는 저의가 무엇이냐는 반발이 확산하자 현 정권은 자유민주주의라는 표현을 다시 사용하기도 했다.

한동안 잠잠했던 자유민주주의 논쟁에 다시 불을 붙인 것은 윤석열이었다. 검찰총장 시절 자유민주주의만이 독재를 배격하는 진짜 민주주의라고 강조해 온 윤석열은 퇴임 후 5·18 민주화운동 41주년 메시지에서 “5·18 정신은 특정 진영의 전유물이 아닌 보편적 자유민주주의와 인권 정신이다. 자유민주주의의 반대는 독재와 전체주의다. 그런데 현 정부는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빼려 하고 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러자 한겨레신문 박찬수 선임논설위원이 윤석열을 물고 늘어졌다. 그는 5월 26일 자 칼럼에서 “윤석열은 왜 ‘민주주의’가 아니고 ‘자유민주주의’를 말하는 걸까. 41년 전 광주에서 수많은 시민을 살상한 5공 신군부가 내걸었던 유혈진압의 명분이 ‘북한 침략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걸 윤석열은 알고 있을까. 그가 구속시킨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이 집권기간에 ‘자유민주주의’란 단어를 집어넣기 위해서 그토록 집요하게 역사교과서를 바꾸려 했던 사실을 벌써 잊은 것일까.…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헌법을 만들면서 굳이 ‘자유민주’란 표현을 삽입한 이유는 분명하다. 실제론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면서도, 북한 공산주의로부터 ‘자유’를 지키겠다는 명분을 내세울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론 정경유착과 시장만능주의에 기반한 약육강식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한국에서 ‘자유민주주의’는 반공과 반북, 개발독재라는 이데올로기를 가리는 허울로 작동해왔다”라며 자유민주주의를 들고나온 윤석열의 행동은 뜬금없다고 질타했다.

박찬수의 논리는 단순하다. 박정희, 전두환 등 자유와 민주주의를 오히려 탄압한 위정자들이 통치 명분으로 내세웠던 자유민주주의란 표현을 왜 쓰느냐는 것이다. 한마디로 황당하기 짝이 없다. 건강한 보수는 박정희, 전두환 시절에 자유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권위주의라는 표현으로 그 시절의 정치를 설명한다.

자격이 안 되는 사람이 분수에 넘치는 칭호를 스스로 붙일 때 참칭(僭稱)이라는 표현을 쓴다. 전두환이 내걸었던 자유민주주의와 정의사회 구현은 이 범주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훨씬 악질적인 참칭은 세습왕조 국가인 북한이 자신의 국명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칭한 것이다. 북한은 민주주의 국가도 공화국도 아니다.

박찬수는 박정희, 전두환이 쓴 ‘자유민주주의’란 용어를 왜 사용하냐고 시비를 거는데, 그렇다면 북한이 사용한 ‘민주주의’와 ‘공화국’이란 표현도 쓰지 말아야 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 제1조도 바꾸어야 한다. 이 무슨 해괴망측한 헛소리인가.

박찬수의 견강부회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 자유민주주의는 ‘공정과 정의’와 양립하기 어렵다는 게 우리 현대사의 교훈이다. 현 정권과 갈등을 빚은 검찰 수사로 ‘공정과 정의’의 상징처럼 떠올랐지만, 그 한 꺼풀 뒤엔 지극히 퇴행적이고 이념 회귀적인 모습이 자리하고 있는 게 아닐까”라고 억지 논리를 부풀리고 있다.

좌파 지식인들이 자유민주주의란 표현을 거북스러워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유민주주의를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간주하는 운동권의 계급론적 해석 때문이다. 이런 해석은 있는 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없는 자들을 위한 민중민주주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귀착된다.

그러나 자유는 특정 계급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 헌법은 특수계급의 존재를 인정하지 아니하며,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제11조)고 규정하고 있다. 우리 헌법에 나오는 자유는 모든 국민의 자유를 뜻한다. 그런데 이런 원칙은 권력자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선택적 자유로 훼손될 위험도 존재한다. 그것을 막기 위한 장치가 바로 법치주의다. 고로 자유민주주의는 법의 지배를 통해 완성된다. 즉 자유와 법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나는 자유롭기 위해 법에 복종한다”는 공화주의자들의 다짐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법을 계급지배의 도구로 간주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법은 부르주아가 프롤레타리아를 착취하는 자유를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다. 거꾸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가 실현되면, 그때의 법은 부르주아의 자유를 박탈하는 무기가 된다. 문파들이 윤석열의 적폐청산 수사에는 열광하다가 정권 수사에 경기를 일으키며 ‘검수완박’을 추진한 내로남불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바로 자유와 법치를 만인에게 동등하게 적용되는 보편적 개념이 아니라 특정 집단 또는 세력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도구적 개념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현 정권에서 자유와 법치가 함께 무너진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사법을 정치 도구화하려는 일련의 시도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박찬수가 윤석열을 비판하면서 쓴 “퇴행적이고 이념 회귀적인 모습”은 고스란히 문파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윤석열은 지난 6월 29일 정치 참여 선언문에서 “민주주의는 자유를 지키기 위한 것이고, 자유는 정부 권력의 한계를 그어주는 것이다. 자유가 빠진 민주주의는 진짜 민주주의가 아니고 독재요 전제다”라면서 “이 정권은 도대체 어떤 민주주의를 바라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필자는 한국의 진보가 유럽식 사회민주주의를 추구한다고 커밍아웃해 주기를 고대한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말처럼, 건강한 사회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와 경쟁 또는 협력하면서 대한민국을 높게 날도록 일익을 담당할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뜯어봐도 문파들의 민주주의, ‘문주주의’는 유럽식 사회민주주의와 거리가 멀어 보인다. “우리 이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부터 문자폭탄에 이르기까지 절제와 관용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야만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문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외피를 쓴 친문 패권주의일 뿐이다. 자칭 민주화 세력의 민주주의 훼손은 도를 넘었다. 그들의 성찰과 거듭남이 없다면, 내년 대선은 ‘자유민주주의 vs 문주주의’의 구도로 치러질 수밖에 없다.

신지호 평론가·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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