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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5호] 2021.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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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능력주의 논란, 이준석이 아니라 정부가 불러왔다

김상철  경제칼럼니스트  2021-07-07 오후 12:56:04

▲ 국민의힘 대변인 선발 토론배틀은 이준석 대표가 내세우는 능력주의가 당직에 적용된 대표적 사례다. photo 뉴시스
‘공정’이 다시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국민의 힘 이준석 대표의 등장은 논란에 불을 붙였다. 이준석 대표는 실력과 실력주의야말로 21세기의 시대정신이라고 주장한다. 공정한 경쟁이 공정한 사회를 만든다는 것이다. 정정당당하게 실력으로 줄 세우자는 주장이다. 능력주의(meritocracy)라고도 한다. 계층 간의 이동은 어려워지고 소득의 양극화는 심해지는 이 시대에 지금 세대가 발견한 대안이다. 외부의 개입을 배제하고 오로지 개인의 실력과 그 결과만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투명한 경쟁 시스템을 지향한다. 그게 가장 공정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갑자기 등장한 얘기는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미 수년 전부터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능력주의’ 바람이 불어왔다. 공정성과 능력주의에 대한 논란이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던 계기는 인천국제공항의 전 직원 정규직 추진이었다. 형평성을 강조하는 정부는 대통령의 1호 공약으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정책을 내세웠다. 하지만 인천공항의 전 직원 정규직 채용 추진에 대해 노력에 기반하지 않아 공정하지 않다는 반대의견이 쏟아졌다. 갈등은 그 후로도 반복됐다. 2017년 서울교통공사의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둘러싼 논란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벌어졌던 기간제교사의 정규직화 논란 때에도, 그리고 대학 입시의 수시와 정시 논란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이어졌다.
   
   
   공정과 정의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
   
   공정성은 보통 개인이 받는 보상의 차이가 적절한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능력주의의 관점에서 공정성은 기본적으로 노력에 상응하는 결과로서 정당한 보상을 중시한다. 개인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기여하고, 기여만큼 또는 실적만큼 보상을 받는다. 능력 또는 실적과 보상 사이의 연결은 시장이 담당한다. 경쟁적 시장은 해야 할 일에 필요한 능력을 배분하고, 일의 결과에 따라 적절한 몫을 분배한다. 그래서 공정성의 전제는 보통 시장경쟁이 제대로 작동하는 상태다.
   
   공정과 정의에 대한 견해가 누구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경제학의 시조 애덤 스미스 같은 사람은 공정과 정의를 분리해 생각한다. 공정(fairness)은 질투와 허영 같은 인간 본성에 대응하는 규칙이다. 이런 본성은 인간이 희소한 자원을 더 가지기 위한 경쟁에 나서는 원동력이 되고 결과적으로 사회를 더 풍요롭게 만든다. 하지만 경쟁에는 경쟁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규칙이 필요하다. 그게 바로 공정이다. 정의는 타인의 분노에 공감하는 인간 본성에 대응하는 규범이다. 사회가 분노를 적절하게 해결하지 않으면 이는 곧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불러온다. 그래서 사회가 당사자들을 대신해 처벌이나 보상을 하고, 구성원들이 원한을 가지지 않도록 하는 게 바로 정의다.
   
   정의와 공정은 각각 다른 인간 본성을 상대하는 것이어서 공정하다고 정의로운 것도 아니고 반대로 정의롭다고 해서 공정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20세기의 정치철학자 존 롤스에게 공정성은 사회계약 유지의 토대다. 정의라는 것이 사회의 존속, 즉 계약의 유지를 위한 규범이라면 공정이 곧 정의인 셈이다. 롤스가 1985년 발표한 논문의 제목부터 ‘공정으로서의 정의’였다.
   
   능력주의에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원래 처음 사용할 때부터 부정적인 의미였다. 능력주의라는 말은 마이클 영(Michael Young)이라는 영국의 사회학자가 1958년 ‘능력주의의 발흥’이라는 소설을 통해 처음 세상에 내놓은 개념이다. 능력주의가 하나의 사회체제로 등장하는 이 소설은 가상의 미래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여기서 능력주의는 민주주의(democracy)에 대척하는 개념으로 그려진다. 마이클 영에 따르면, 능력주의란 “능력의 차이에 따라 사회적 지위를 분배하는 보상과 인정 시스템”이다. 이 소설이 그리는 세계에서 국가는 자원 낭비를 줄이기 위해서 조기에 지능검사를 통해 인간을 선별한다. 효율적인 국가운영과 경쟁력 향상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를 따져 인간을 구분하고 사람들은 능력에 따른 차별과 인간의 도구화를 받아들인다. 소설은 결국, 능력주의의 한계에 분노한 시민들로 인해 혁명이 일어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내 편 네 편에 따라 다른 현 정부의 공정성
   
   불공정을 상쇄할 대안으로서의 능력주의는 한계가 분명하다. 능력주의는 공정한 경쟁을 실현하지 못한다. 출발선부터 뒤처진 사회적 약자를 도외시한다. 능력 또한 세습되기 때문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우리 사회에서도 유명해진 하버드대학의 마이클 샌델은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눈을 가린 여신, 즉 능력주의에 기반을 둔 공정의 결함에 대해 설파한다. 능력에 따른 소득불평등은 계층에 따른 소득불평등보다 전혀 정의롭지 않다는 것이다. 샌델은 능력이 유전적 또는 태생적 운에 의해 결정되는 만큼 공정한 경쟁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많은 미국의 일류 대학에서는 가족 중에 처음으로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에게는 가산점을 준다. 책을 읽는 중산층 부모를 둔 학생과 빈민가에서 총소리를 들으며 공부한 학생을 같은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사실 오로지 능력 혹은 실적에 따라 보상을 받는 완전경쟁이 이뤄지는 시장이라는 것도 현실에는 없다. 독점이나 정보를 이용한 지대(rent)의 추구가 시장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능력주의는 기회의 평등과 공정한 경쟁을 전제로 능력에 따른 차별, 즉 불평등을 정당화한다. 하지만 사실은 완전히 공정한 경쟁도 완전한 기회의 평등도 불가능하다. 능력주의의 원칙은 실현된 적도 없고 ‘진정한 능력주의’가 실현될 가능성도 없다. 공정한 경쟁이 불가능하다면 실적에 따른 보상의 차이도 인정할 수 없다. 능력주의는 인간을 하나의 기준으로만 보는 비윤리적인 측면도 있다. 인간의 가치를 능력으로만 판단하는 사회는 인간을 오로지 하나의 척도로 재단해 순서를 매긴다. 이런 획일화는 합리적이지도 않지만, 인간 존엄성에 대한 훼손이기도 하다.
   
   뚜렷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능력주의가 사회문제를 해결할 대안으로 제기되는 것은 다른 마땅한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경쟁이 필연적이고 불가피하다면 시스템이라도 투명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능력의 차이를 부정하고 시작하는 어떤 논의도 현실에서는 의미를 찾기 어렵다. 샌델의 대안이라는 것도 기껏 겸손한 마음과 제비뽑기였다. 현 정부는 공정성을 이유로 다시 대학 입시에서 정시의 비중을 늘리고 있지만, 수시든 정시든 순서를 매기는 건 마찬가지다. 능력주의를 비판하는 쪽에서도 조직에서 가장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에게 역할을 맡기고, 그에 따라 보상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에 반대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불평등은 현실이다. 모든 테너가 파바로티처럼 노래를 부를 수는 없고 모든 요리사가 같은 솜씨를 가진 것은 아니다. 모든 축구선수가 메시처럼 뛸 수도 없다. 보상도 능력의 차이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자연스럽다. 능력주의는 자본주의의 고유한 산물도 아니다. 공산체제 시절의 소련이나 중국도 엘리트가 필요한 자리에는 엘리트를 선발해야만 했다. 물론 능력주의와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조합이 더 잘 맞는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시장 경제는 수요자가 원하는 능력이 무엇인지 잘 찾아주는 시스템이고, 경쟁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능력에 따른 보상보다 더 나은 방안은 없다.
   
   사실 공정을 둘러싼 논란은 현 정부 들어서 특히 커졌다. 촛불 이후 등장한 정부인 만큼 대중의 기대가 있었고 정부 스스로 공정을 크게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보수 기득권에 맞섰던 진보는 다시 기득권이 되었다. 지난 몇 년간 여론을 들끓게 했던 특권과 반칙으로 일어난 몇 가지 사건이 있다. 굳이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예를 들 것도 없겠다. 허위 인턴증명서나 병력관리 특혜만이 아니다. 부모의 기득권이 자녀의 교육과 취업의 기회를 결정하는 행태를 방치하고 연고와 진영에 따라 달라지는 공정성의 기준을 그대로 둔 채, 능력주의의 한계만을 비판하는 것은 공감을 얻기 어렵다. 비정규직 전환 문제가 공정과 능력주의 논의의 기폭제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지난 4년 동안 현 정부는 20만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했다. 하지만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 늘어난 대신 공공기관의 신규 채용은 지난해의 경우 2019년보다 20%가 줄었다.
   
   
   불평등이 능력주의를 낳는다
   
   능력주의가 또 다른 불평등의 원인이 된다는 주장은 옳다. 그것은 출발선이 다르다는 점을 무시하고 능력의 차이에 따른 결과의 불평등을 정당화한다. 형식적 공정은 불평등을 시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능력주의에 매달리는 것은 평등한 기회나 공정한 과정, 정의로운 결과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능력주의는 그저 공정성 실현을 위한 최소한의 수단일 뿐이다.
   
   능력에 따른 대우는 공정의 첫 단계다. 경제 불안이 장기화하면서 양극화는 심해지고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우리나라의 고용 상황은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최악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4년간 비정규직 근로자는 95만명이 늘었다. 사상 처음으로 비정규직 근로자는 700만명을 넘게 됐다. 공식 청년실업률은 10%, 체감 실업률은 25%에 달한다. 실업률은 2001년 이후 19년 만에 최고치이고, 지난해 실업자 수는 외환위기 때 이후 가장 많은 110만명이었다. 박근혜 정부 시절 성과연봉제와 저성과자 해고에 맞서 싸웠던 노동자들이 현 정부의 비정규직·정규직 전환 정책에 대해서 능력주의를 내세워 반대했다. 비정규직 교사의 정규직화에 임용고시 준비생들은 가뜩이나 줄어든 임용 규모에다 취업문이 더 좁아진다는 이유로 반발했다. 능력주의를 지지하는 이유는 평범한 사람에게는 이 방법 말고는 어떤 기회도 남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이다.
   
   문제는 남아 있다. 능력을 측정하는 기준은 무엇이며 능력 차이에 따른 보상의 격차는 누가 어떻게 정해야 하는가, 능력주의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소수집단 우대를 도입한다면 어느 수준의 특혜를 어떤 방식으로 부여할 것인가. 모두 답이 필요한 질문들이다. 논의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현재 우리 사회에 능력주의를 대체할 만한 합의된 대안은 없다. 능력주의는 불평등을 낳는다지만, 현실은 다르다. 반칙과 특권이 불평등의 벽을 쌓고 있다. 그런 불평등이야말로 능력주의를 부른다. 능력주의를 시대의 대안으로 만든 것은 젊은 야당 대표가 아니라 정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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