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치
[2473호] 2017.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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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 큰 인터뷰]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가 말하는 ‘법과 양심’

정장열  부장대우 jrchung@chosun.com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양심은 이렇게 법 안에, 그리고 법의 주변에, 또 법을 넘어 존재하여야 한다.’
   
   김우창(80) 고려대 명예교수를 인터뷰하러 가면서 그가 최근에 펴낸 ‘법과 양심’(에피파니)이라는 저서에 나오는 구절을 곱씹어봤다. 노(老)학자는 양심이 법보다 우위에 있음을, 이른바 덕치(德治)가 법치(法治)보다 낫다는 진리를 깨우쳐주려는 것 같았지만 기자의 눈에 세상사는 여전히 갈피를 잡기 힘들다. 사람들은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세상을 오랫동안 꿈꿔왔지만 지금 현실은 법이 있어도 살기 어려운 세상 아닌가. 법의 잣대가 공정하니 마니 격렬한 입씨름을 벌이는 요즘 사정에 비춰 보면 오히려 우리가 법에 얼마나 기대어 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법의 시대’에 양심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김우창 교수는 우리 시대 대표적인 석학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그는 1960~1970년대 미국 유학(코넬대 영문학 석사, 하버드대 미국문명사 박사)을 마치고 돌아와 우리 지성계에 큰 파장을 던졌다. 학문으로 단련된 분석을 바탕으로 한국의 대표 시인인 서정주, 박목월 등을 향해 ‘자기 만족’이라고 비판한 그의 글들은 문단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이후에도 그는 문단과 우리 사회 내부를 냉철하게 들여다보는 글들을 끊임없이 써왔다. 그의 학문적 자양분은 성찰적 사유다. 그는 ‘한번 더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지론을 앞세워 열정에 익숙한 우리 사회에 차가운 이성의 메스를 들이대왔다. 그런 그가 말년에 사유의 대상으로 삼은 게 법이라는 사실 자체가 흥미로웠다.
   
   지난 8월 28일 오후 서울 시내 한 호텔 커피숍에서 만난 그는 “‘법과 양심’에 실린 글들은 2010년부터 2014년까지 법관들 앞에서 강연한 내용들이 중심”이라고 소개했다. “헌법재판소, 사법정책연구원, 사법연수원 등에서 몇 차례 강연을 했었다. 서울대 법대 명예교수인 최송화 사법정책연구원장의 강권으로 사법정책연구원 정책자문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나 같은 인문학자한테 법을 얘기하고 법관들 앞에서 강연해달라는 요청이 와서 놀랐고, 경험 많은 법관들이 내 강연을 듣고 질문을 꽤 많이 해서 놀랐다. 사법연수원에서 강연했을 때는 막 사법시험을 통과한 법조인들이 시험에 치이고 고민의 경험이 없어서인지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아 또 놀랐다.”
   
   - 경험 많은 법관들이 강연을 듣고 어떤 질문을 던졌나. “이런저런 경우에 어떻게 판결하는 것이 옳은지, 양심적 판단은 어떻게 내려야 하는지 등을 나한테 물어왔다.”
   
   - 뭐가 옳은 판단이라고 답해줬나. “일단 법 정신에 따라 결정을 한 후에 자기의 양심을 첨가하라고 얘기해줬다. 자기 양심에 비춰 도저히 수긍이 가지 않는 결정은 법 규정에 있다고 하더라도 따르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늘 양심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얘기했다.”
   
   - 법관이 양심만 따라도 안 된다는 말인가. “법의 정신은 공동체의 규범을 확인하는 것이다. 양심을 앞세우면 법관 개인의 정치적 신념이 중요해질 수도 있다. 법관이 정치적 신념에 따라 판결하면 안 되는 것 아닌가.”
   
   - 정치적 신념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요즘 우리나라에서 이른바 ‘정치 재판’이 있을 수 있다고 보나. “우리나라는 보수와 진보로 양분돼 있으면서도 그것을 통일하는 문화가 없다. 그런 것이 없어서 위험한 상태다. 판사가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따라 판결할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그는 ‘법과 양심’에서 “문제가 있고 그것이 법의 심의 대상이 되었을 때, 그것이 사회 또는 대중의 여론의 흐름 또는 요동함에 따라 결정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법은 그 존재 이유를 잃어버릴 것이다. 법은 감정보다는 이성에 따라-법 전체의 정신에 의하여 한정되는 이성적 원리에 의하여 이끌어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처럼 혼란스러운 사회에서는 판사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면서 이런 얘기를 했다. “우리의 법관들은 윤리적 측면도 따져야 하고, 자기의 양심에도 비춰 봐야 하고, 집단적인 관습도 생각해 봐야 한다. 좌파 정권이라고 좌파식으로 판결하고, 우파 정권이라고 우파식으로 판결하면 법에 걸릴 사람도 빠져나가고 반대로 안 걸릴 사람도 걸린다. 우리처럼 혼란된 사회에서는 법관들의 자기 수련이 특히 필요하다고 본다.”
   
   법관의 자기 수련, 혹은 반성적 사고와 관련해 그가 저서에서 길게 인용하고 있는 것은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다. 이 소설에서 판사인 이반 일리치는 죽을병에 걸린 후 이른바 을(乙)의 신세로 의사를 만나고 나서야 자신이 판사로서 문제가 있었음을 깨닫는다. “이반 일리치에서 다룬 ‘역지사지(易地思之)’는 정말 중요하다. 일리치는 자기가 관대한 법관이었다고 스스로 자부했는데 이런 의식을 가진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스스로 관대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기가 피고인들에게는 항상 갑(甲)의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을 잊으면서 오만해지는 것이다.”
   
   - 일상적으로는 법의 존재를 잘 느끼지 못하고 사는데 일반인들에게는 법이 어떤 의미인가. “법은 규범성의 영토에서 일종의 문지기다. 사회 규범의 표현으로 윤리나 도덕, 그리고 그에 준하는 관습이 제대로 존재할 때 법은 별로 할 일이 없거나 편하게 된다. 옛 우리 전통에서 생각하던 덕으로 다스려지는 세계, 덕치의 세계가 그러한 것이다. 하지만 규범이 반드시 지켜지지 않으면 안 되는 부분, 또 규범이 파괴되는 극단적인 경우에 규범의 임계지점에 있는 법이 나타난다.”
   
   - 책에서 요즘 우리 사회의 규범이 무너지고 전통적인 도덕적 성찰도 사라졌다고 지적했는데, 그래서인지 우리 사회가 법에 너무 의존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도 든다. “사실 제대로 돌아가는 사회에서는 법도 양심도 필요 없다. 법을 의식하지 않고 양심이 뭐냐고 되돌아보지 않으면서도 저절로 살아지고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는 게 제일 좋다. 하지만 그게 안 된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커져서인지 양심에 대해 계속 반성해야 한다. 옛날 전통 촌락처럼 작은 사회에서는 장사하면서 거짓말하면 당장 망하지만 지금은 법과 양심에 따르지 않으면 여기저기 구멍이 많이 생긴다. 특히 법의 지배는 필요하다. 법은 윤리적 사회의 외곽선을 지키는 수위 역할을 한다. 법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없지만 그게 무너지면 안 된다.”
   
   그에 따르면, 법과 양심은 상호보완적이면서 사회를 지키는 두 기둥이다. 법은 제한과 구속을 의미하지만 보이지 않게 자유를 뒷받침한다. 시민의 자유는 일정한 법으로써 구성되기 때문이다. 반면 양심은 법을 제대로 움직이게 한다. 양심은 부도덕과 부정의에 대한 투쟁의 근거가 되고 정의가 사익(私益)의 명분이 되는 것을 막아줄 뿐더러 법을 준수하는 심리적 동기이기도 하다. 그는 “내가 법에 따라 산다고 해서 법에 쩔쩔맨다는 의미가 아니다. 스스로 마음에 있는 진실에 호소하는 것이다. 법을 지킨다는 건 사회적인 필요와 내면적인 요구에 충실한다는 의미”라고 강조했다.
   
   - 얼마 전 만기 출소한 한명숙 전 총리를 둘러싸고 민주당 인사들은 “판결이 잘못됐다. 그의 양심을 믿는다”고 주장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뇌물을 받은 사실적 증거가 있으면 처벌을 받아야 하고 증거가 없으면 정치적 판단을 한 것이니까 잘못됐다. 증거가 있으면 좌우를 막론하고 판결을 따라야 한다.”
   
   그는 ‘법과 양심’에서 법이 있다고는 하지만 부끄러움에 대한 자각이 없으면 그건 또 다른 폭력일 수 있다며 부끄러움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전체에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 왜 우리 사회가 전통적인 도덕적 성찰을 잃고 규범이 무너졌다고 생각하나.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이유가 뭔가. “결국 부패 문제다. 투명성도 없고 공적인 것을 위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돈 중심 사회가 된 것이다. 모두가 돈을 추구한다. 나도 이번에 낸 책이 ‘팔려야겠다’는 생각을 자연스레 한다.(웃음) 학문의 영역에서도 엄격한 객관성, 진리 탐구 대신 경제적 이점, 당장의 생산적 결과만 좇는다. 이런 사회는 윤리의 상실뿐 아니라 자기 상실도 낳는다. 자기가 보람 있다고 생각하는 것, 알아주지 않아도 해야 하는 것들을 하지 않는다.”
   
   - 책에서 ‘도덕적 명분이 권력과 탐욕의 장에서 쉽게 발견되는 공동 통화(通貨)’라고 했는데 무슨 의미인가. “공적인 차원에서의 도덕적 명분을 절대화하면 쉽게 개인적 이익을 도장(塗裝)하는 공허한 명분이 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현대사회의 사회적 균열의 대부분은 확신의 체계가 된 정치적 이념으로 인한 것이다.”
   
   그는 책에서 “오늘 우리의 사회는 명분적 도덕이 자아를 부풀리기 위한 수단이 되고 도덕적 언설의 범람과 도덕적 타락이 상호 자극하면서 진정한 인간적 도덕의 기준을 찾을 수 없게 됐다”고 비판했다.
   
   - 도덕적 명분의 절대화에 대한 비판은 ‘촛불 혁명’이라는 명분을 앞세우는 문재인 정부에도 교훈으로 들린다. “현 정부가 촛불혁명이라는 말을 너무 들먹이면 안 된다. 그러면 오히려 민주주의를 망가뜨리는 것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혁명 때문에 감옥에 들어갔나. 촛불의 압력이 있었지만 절차 안에서, 법률의 테두리 안에서 그렇게 된 것 아닌가. 혁명이라는 말이 사람을 흥분시키고 뭔가 보람 있는 일을 한다는 느낌을 주긴 하지만 지금은 혁명 상태가 아니다. 이 정부 사람들은 새로운 정치를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모든 걸 한 단계 높인다고 생각해야 한다.”
   
   - 한 단계 높인다니. “사회안전망이든 복지정책이든 사실 이전부터 다 해오던 것 아닌가. 지금까지 해온 것을 한 단계 높인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뭔가 정책을 발표할 때 연구를 많이 한 결과라고 국민들이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그런 것 같지 않다. 원전(原電) 문제만 해도 당장 폐지할 것처럼 들렸는데 지금은 60년에 걸쳐 한다고 그런다. 전문가들 의견을 충분히 들어 대체에너지를 뭘로 어떻게 하느냐 논의를 제대로 했는지 궁금하다. ‘문제점이 많아서 이렇게 풀어가려 하는데 그러면 당장 이런 다른 문제들이 생기니까 결국 이렇게 풀어가겠다’는 식으로 현실적 고려를 충분히 한 후 정책을 발표하는지 의문이다.”
   
   - 문재인 대통령은 직접민주주의의 필요성을 강조했는데. “추인으로서의 직접민주주의는 필요하지만 국민 스스로 뭘 해야 한다고 밀고 나가면 잘못될 때가 많다. 다수는 결국 승인하는 존재다. 이 정부는 ‘이것이 옳아서 한다’가 아니라 ‘국민이 지지하니까 한다’고 얘기하는데 그건 아니다. 이 정부는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지식인 사회를 지지하고 육성할 필요가 있다.”
   
   ‘법과 양심’을 읽다 보니 여러 군데서 눈길이 머물렀다. ‘정의에 대한 확신은 우리의 정치를 폭력까지는 아니라도 극단적인 대결에로 몰아간다’ ‘정의를 위한 투쟁은 쉽게 권력이 가져오는 특권의 유지를 위한 투쟁이 된다’ 같은 구절이 그랬다.
   
   - 이 대목은 현 정권 실세들이 귀담아들어야 할 대목 같다. “뭔가를 강하게 주장해야 할 때도 있지만 마냥 그러면 사는 것이 빡빡해진다. 구체적인 현실에서 윤리가 어떻게 성립해야 하느냐가 중요한데 삶의 복잡성을 단순화하면 문제가 생긴다. 양심도 강한 덕성과 부드러운 덕성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다. 루터가 종교재판에서 말한 ‘나는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식의 자기 확신이나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 사람마다 분명 있지만 이걸 외면적인 룰로 만들어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스탈린이나 레닌도 사람을 많이 죽이려고 해서 죽인 게 아니지 않느냐. 공산정권이 망한 다음에 밝혀진 얘기지만 레닌이 지주들을 5000명 죽였다는 보고를 받고 0을 하나 더 붙여 죽이라고 지시했다는 게 다 그런 것이다. 내가 하는 것은 다 옳다면서 이념화해서 밀고 나가면 문제가 생긴다.”
   
   그는 평생 자신이 진보의 편에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진보가 쇼(show)를 위한 것이면 안 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모든 인간이 자유와 평등과 우애 속에 살자는 것이 틀린 원칙이 아니지만 그 구체적인 방책이 있어야 한다. 현실과 항상 통하면서 자기 생각을 실현해 나갔어야 했다.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방책에 의해 국가나 사회가 개조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이미 세계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나. 동양에서 말하는 덕(德)도 논리적으로 추상화된 개념으로 터득되는 것이 아니라 성장의 과정, 경험, 학문적 성찰, 사회관계 등을 통해서 얻어지고 행동의 습관이 되는 것이다. 보편성도 구체적 사실들의 전개 속에서 발견되고 확인되어야 한다. 좋은 사회도 반드시 진실의 사회라기보다는 인간적 현실의 여러 요소가 균형을 이룬 사회다.”
   
   그는 과거 자신이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베네수엘라 차베스 정권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전체적으로 의도는 좋았는데 결과가 반드시 좋았다고 할 수 없다. 이데올로기와 기획만으로는 나라 형편이 좋아지지 않는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 도덕과 윤리가 개인의 삶에서도 중요한가. “내가 책에서도 소개했지만 유엔(UN)의 행복지수 조사를 보면 국민소득과 개인소득으로 나타내는 물질적 조건 외에 사회적 가치, 궁극적으로 도덕적 가치가 행복에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걸 알 수 있다. 미국 컬럼비아대학의 경제학자인 제프리 삭스는 유엔 행복지수 보고서에 붙이는 ‘행복의 추구를 위하여 덕성의 윤리를 부활하는 문제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인간 생활에 윤리의 회복이 긴급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행복은 결국 사람이 자신의 삶을 살면서 가질 수 있는 편안한 느낌을 말한다. 소설 ‘레미제라블’에서 묘사한 도둑질이 불가피한 사회를 벗어난 다음에는 너무 사회적인 것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자기가 뭘 원하는지를 파악해 자기의 삶을 사는 게 중요하다. 내가 만족스럽게 살면 그걸로 된다.”
   
   이 노학자의 삶도 자신의 말대로라면 ‘자기만족적인 보통사람’의 삶이었는지 모른다. 그의 제자들 사이에서 그가 평생 국산 소형차만 몰고 다니면서 낳은 일화들은 유명하다. 대학원장이나 공공기관 자문위원장 등의 직책을 맡았을 때 그의 얼굴을 몰라보는 수위들이 “김우창 선생님 자리니까 다른 데 주차하시라”며 정해진 자리에 주차하지 못하게 하는 일도 있었다. 그에게 “요즘도 소형차를 몰고 다니느냐”고 묻자 “15년 탄 현대차 엑셀이 가다가 서버려 조금 큰 아반떼로 바꿨다”고 했다.
   
   - 평생 법과 양심에 저촉되지 않게 살아왔다고 자부하지 않나. “법과는 부딪힌 적이 없는데 정치하고는 부딪혀 봤다. 전두환 정권 때 시국선언 주도하다가 잡혀간 적은 있다. 양심적으로 살았다기보다는 큰 야심 없이 공부하는 보통사람으로 살았다.”
   
   스스로는 보통사람으로 생각하지만 그의 삶이 모두에게 평범해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 그의 고려대 영문학과 제자인 영화감독 최정단씨는 그의 삶과 사상을 담은 다큐멘터리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를 찍고 있다. 내년 봄 일반에 개봉될 이 100분 안팎의 영상물에 대해 그는 “제자가 찍겠다고 해서 끌려다니고 있다”며 “내가 사고라도 나야 재미있을 텐데 재미 없을 것”이라고 했다.
   
   “릴케의 시에 장례식 장면이 나온다. 우리도 그렇지만 서양도 사람이 죽으면 깨끗하게 닦고 치장하지 않나. 그 이유가 그렇게 해야 뭔가 새로운 준비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얘기다. 그런데 내 생각으로는 늙어갈수록 준비할 대상이 없어진다. 준비하는 것 같지만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꽃도 보고 별도 보고 그때그때 인생의 즐거움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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