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헝가리 국립 데브레첸 의과대학
ⓒphoto 헝가리 국립 데브레첸 의과대학

외국 의대 유학생이 국내 의사 자격을 따기 위한 첫 시험 관문인 의사 예비시험 중 1차 필기시험에 2005년부터 2009년까지 모두 14개국 의대 유학생이 56회 응시, 이 중 9명이 합격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같은 합격률은 20%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 이는 매년 90~95%에 이르는 국내 의대 졸업생의 의사 국가시험 합격률과 비교된다.

필리핀·네덜란드·독일 등 14개국 유학생 응시

국가별로는 일본 의대 유학생의 경우 4회 응시해 한 명도 합격하지 못했고 아르헨티나, 도미니카, 네덜란드, 우크라이나, 영국의 경우도 각각 1회 응시했으나 합격자가 없었다. 가장 응시횟수가 많은 의대 유학 국가는 필리핀으로 모두 30회 응시했지만 2명만이 합격했다. 이밖에 우즈베키스탄, 독일, 러시아의 경우 각각 4회 응시해 한 명의 합격자를 배출했고 미국의 경우는 2회 응시해 1명이 합격했다. 호주, 오스트리아, 파라과이의 경우 1회 응시했지만 모두 합격했다. 1차 예비시험은 무제한 재시가 가능하기 때문에 응시횟수가 유학생 수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이 같은 통계는 의사 예비시험을 관장하는 한국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이하 국시원)이 주간조선에 제공한 자료에서 밝혀졌다. 외국 의대 유학생의 예비시험 합격률은 매년 공개돼 왔지만 이 제도가 도입된 지난 5년간의 자료가 국가별로 집계돼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러한 통계는 최근 급증하고 있는 외국 의대 유학생의 경우 국내에서 의사 자격증을 따기 어렵다는 통설을 뒷받침하고 있어 의대 유학생들의 철저한 준비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외국 의대 유학생들이라고 해서 아무나 예비시험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선 보건복지가족부 장관의 외국 의대 인정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이는 자신이 유학한 의대의 교육 과정과 질이 예비시험을 볼 만한 수준인지를 정부가 판단하는 것으로, 정부는 해당 의대의 교과과정, 교수요목, 학칙 등을 고려해 국내 의대 수준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인지를 판단한다. 이와 관련, 국시원 측은 “인정 심사를 통과한 의대와 통과하지 못한 의대 리스트는 공개할 수 없다”고 밝혔다. 국시원 측은 다만 중국, 도미니카, 벨라루스 등 3개국의 일부 의과대학 출신자는 인정 심사에서 탈락시켰다고 말했다.

법 개정으로 유학국가 의사면허증 제출해야

인정 심사를 통과하더라도 예비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유학한 의대 졸업장은 물론 해당 유학국가 정부가 발급한 의사면허증도 제출해야 한다. 지난 1994년 의료법 개정 이전에는 졸업장이나 의사면허증 중 하나만 제출하면 됐지만 법이 개정되면서 요건이 강화됐다. 필리핀의 경우 현재 자국 의대를 졸업한 외국인에게 의사면허증을 발급하지 않기 때문에 필리핀 의대에 유학할 경우 원천적으로 예비시험을 볼 수 없다. 지난 5년간 예비시험에 응시한 필리핀 유학생의 경우 모두 1994년 이전 유학생이라는 게 국시원 측의 설명이다.

2005년 도입된 예비시험의 목적에 대해 국시원 측은 “실력이 검증되지 않은 외국 의대 졸업생들의 무분별한 유입으로 한국 의대 졸업생들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 도입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예비시험에 나오는 의학용어는 모두 한국어로 출제되기 때문에 외국어로만 의학 수업을 받은 경우 추가적인 준비가 필요하다. 필기 1차 예비시험을 통과하면 2차 실기시험을 봐야 하는데 2차 실기시험에서는 지난 5년간 11명이 응시해 8명이 합격, 1차 필기시험에 비해 합격률이 훨씬 높았다. 1차 예비시험의 경우 한 번 떨어지더라도 무제한 재시가 허용되고 1차 시험 합격 후 2차 시험에 떨어지면 그 다음 해에 한해 1차 시험을 면제받고 2차 시험에 바로 응시할 수도 있다. 지난 5년간의 통계를 보면 2차 실기시험까지 통과한 경우 모두 의사 국가시험에 합격한 것으로 나타나 1, 2차 예비시험만 통과하면 국내에서 의사 자격증을 따는 데 큰 어려움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외국 의대 유학의 현실과 유의할 점

일부 유학원 “유럽·미국·한국서 의사될 수 있다”

해당 국가 시민권 없으면 진입장벽 높아

성적 최상위권 고교 졸업생들의 의과대학 쏠림 현상이 심화되면서 국내 의대 문턱이 까마득히 높아졌다. 이로 인해 상대적으로 입학이 쉬운 외국 의대 유학에 대한 관심이 크다. 그러나 의사와 같은 전문직은 국가마다 면허 제도가 모두 제각각일 뿐 아니라 국적과 언어가 다른 외국인에게는 더 엄격한 기준이 제시되기 때문에 외국 의대 유학을 생각하고 있다면 졸업 후 수련을 어떻게 받을 것인지, 어디서 개업이나 취직을 할 수 있는지를 잘 따져봐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외국 의대 유학 알선업체 난립

저렴한 학비와 용이한 입학 조건을 내세우며 학생을 모집하는 외국 의대 유학 알선 업체들은 도처에 있다. 업체들은 대부분 의대 졸업 후 한국에 돌아오거나 유럽·미국 등 선진국에 진출할 수 있다고 광고하지만, 해당 국적이 없는 외국인에게는 각종 제도적 장벽이 있다. 실제로 외국 의대를 졸업했지만 해당 국가에 정착하지도, 한국에 돌아오지도 못하게 되는 경우가 한둘이 아니다. 1994년 7월 우리나라 의료법 개정 후 외국 의대 졸업생이 한국에서 의사 예비시험을 보려면 의대 졸업장과 함께 해당 국가의 의사면허증을 제출해야 하지만, 필리핀처럼 자국 의대를 졸업한 외국인에게 의사면허를 부여하지 않는 나라도 있다.

국내에서 의사 예비시험을 보기 위한 사전 관문인 의대 인정 심사에서 탈락하는 경우도 있다. 예비시험을 관장하는 국시원 측은 인정 심사에서 탈락한 외국 의대 리스트를 공개하기를 꺼리지만, 2004년 1월 중국 베이징(北京) 의대와 옌볜(延邊) 의대 졸업생들이 인정 심사에서 탈락했다는 언론 보도도 있었다.

2003년 7월 파라과이 치대 졸업생이 치대 인정심사에 떨어진 후 보건복지부를 상대로 소송을 내자 서울행정법원 제2부(재판장 한강현 부장판사)는 “(원고가) 졸업한 대학은 어학 실력과 관계없이 편입학을 허용하고 있고, 한국 학생에 대해서만 조기졸업제를 시행하며 파라과이 전체의 치과의학 수준도 우리에 비해 뒤떨어지므로 보건복지부의 처분은 정당하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일부 외국 의대 유학원의 허위 광고가 판치자 2007년 6월 보건복지부가 직접 나서 외국 의대 인정 심사 기준을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 하지만 이로부터 1년 후인 2008년 6월 카리브해 연안 영국령 몬세라트에 무인가 의대를 세우고 영국 의사면허를 취득할 수 있다고 속여 학생과 학부모를 상대로 수억원을 가로채는 사건도 벌어졌다.

헝가리에만 100여명 유학

최근 한국 의대 유학생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곳은 헝가리다. 수도 부다페스트, 페치, 세게드, 데브레첸 등 4개 도시에 위치한 헝가리 국립 의과대학은 수업을 영어로 진행하는 외국인 전용 의과 학제가 있기 때문에 유럽·미국·이스라엘 등 각국에서 유학생이 몰린다. 미국의 30%에 불과한 학비와 한국에 비해 용이한 입학기준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몇 년 사이 유학생이 크게 늘었다. 현재 헝가리 의대 네 군데에 재학 중인 한국 유학생은 각각 20~60명씩, 최소 1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헝가리 의대 유학 알선업체들은 대부분 학교 측과 공식 약정을 맺고 한국 학생을 선발해 헝가리로 보낸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중학교 때부터 헝가리 의대에 가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유학을 준비하는 경우도 있다. 유학원들은 “졸업 후 유럽과 미국으로 진출이 가능하다”고 광고하며 적극적으로 학생을 유치한다. 데브레첸 의대에 유학을 알선하는 유학원 겸 평생교육기관인 거창국제학교는 웹사이트에 “헝가리 의학학위(MD·Medical Degree)는 유럽 25개국에서 별도의 시험 없이 100% 인정됩니다” “헝가리 의사 면허를 취득하면 국내 의사국가고시 응시를 신청할 수 있습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또 다른 헝가리 의대 유학 알선 업체인 ㈜이넥코리아 역시 웹사이트에 “(헝가리 의대에서는) 교육이 영어로 진행되므로 유럽에서의 학위 취득뿐 아니라 미국 의사 면허 취득도 가능하다” “(헝가리 의사 학위는) 전세계 여러 나라에서 인정하는 학위로서 독일과 영국에서도 근무가 가능하다” “EU 국가에서 개업 가능”이라며 학생들을 모집한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정은 훨씬 복잡하다. 우선 헝가리 의대를 졸업하고 한국에 돌아온 선례가 없다. 국시원 측은 주간조선에 “헝가리 의대 졸업자 중 예비시험 응시를 신청한 사람이 아직 없다”며 “따라서 헝가리 의대가 예비시험 자격을 부여할 만한 외국 의대 기준에 적합한지 여부를 심사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때문에 아직 한번도 인정 심사가 이뤄지지 않은 헝가리 유학생을 상대로 “한국에 돌아와서 의사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장담할 수 없는 주장일 수 있다.

해당 국가 시민권 없으면 취업 힘들어

또 유학원들이 주장하는 바와 달리 EU(유럽연합) 시민권이나 영주권이 없는 한국 국적자는 헝가리 의사면허가 있더라도 취업을 원하는 해당 EU 국가에서 별도의 면허 시험과 언어 시험을 봐야 하고 특히 별도의 노동 허가를 받아야만 의사로 일할 수 있다. 주 헝가리 한국대사관의 한 관계자는 “헝가리가 2004년 EU에 가입한 뒤 많은 헝가리 의사들이 다른 EU 국가로 진출하긴 했다”면서도 “하지만 EU 시민권이나 영주권이 없는 한국인 졸업생은 헝가리 의사면허를 인정받아도 취업하려는 해당 국가의 노동 허가를 자동으로 받지 못하기 때문에 비자 스폰서를 해줄 용의가 있는 수련 병원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영국의 경우 EU 시민권이 없거나 비EU 국가 의대를 졸업한 사람은 전문의 자격시험인 PLAB(Professional and Linguistic Assessment Board) 시험과 영어 시험인 IELTS 시험을 높은 점수로 통과해야만 의사 활동을 할 자격을 준다. 물론 이런 시험을 통과해도 외국인 의사에 대한 수요가 있어 노동 허가를 받아야 의사로 활동할 수 있다.

미국 진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헝가리·필리핀 의대 유학원들은 수업이 영어로 진행된다는 점만 내세우며 미국의사면허시험(USMLE)을 보고 미국에 진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헝가리 의대는 졸업생 응시자 중 USMLE 합격률이 90%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나 USMLE 합격은 미국에서 전문의 수련을 받기 위한 기본 자격 중 하나에 불과하다. USMLE에 합격하더라도 USMLE 점수, 학교 성적, 교수 추천서, 인터뷰 결과 등을 고려해 수련병원과 학생을 짝지우는 매칭(Matching) 과정을 통과해야 수련의가 될 수 있다. 미국 국립 레지던트 배정 프로그램(NRMP)의 보고서에 의하면 2009년 외국 의대를 졸업한 비 시민권자의 매칭 합격률은 43%에 그쳤으며, 그것도 최근 경제 위기로 인해 하락세에 있다. 언어 문제뿐 아니라 외국인 비자 스폰서를 해주려면 병원 측에서 복잡한 비자 심사 과정을 거치고 그 비용까지 부담해야 하기 때문에 외국 의대 졸업생 뽑기를 꺼린다는 것이다. 헝가리 의대에 자녀를 유학 보낸 한 학부모는 “USMLE에 붙어 미국에서 일하게 되길 바라지만 미국 진출이 어렵다면 싱가포르에 있는 국제의료영리병원에 취직하거나 세계보건기구(WHO) 등에서 비(非) 진료직으로 일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키워드

#유학
심혜기 인턴기자·미국 브라운대 졸업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