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정문 ⓒphoto 조선일보 DB
서울대 정문 ⓒphoto 조선일보 DB

몇 년 전 한 서울대생이 ‘서울대와 서울대생에 대한 편견과 진실, 그리고 해결방안’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썼다. 이 논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어느 학교 다녀요?”

“서울…에 있는 대학교 다녀요.”

“아, 어디?”

“서울대학교요.”

“헉! 정말? 너 정말 ㅇㅇ한 사람이구나?”

이런 대화, 본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에게 빈번히 발생하는 일이다. 서울대가 대체 무엇이기에 외부에서 이런 반응을 일으킬까? 또 심지어 학교 이름을 말하는 것처럼 아무것도 아닌 일도 이렇게 회피하려는 학생들이 나타날까. ‘똑똑한데 외모는 좀 빠지고, 능력은 있지만 성격은 별로’ 서울대생의 이미지는 61년째 변화가 없다.

서울대가 ‘서울대다움’ 찾기에 나섰다. 엄밀히 말하면 서울대인에 대한 편견 깨기 프로젝트다. 서울대를 대표할 만한 인물을 발굴, 4~6분짜리 인물 스토리 영상을 만들어 서울대인 및 일반인이 널리 보게 하는 것이 기획의 내용. 서울대 협력부처장 강준호 교수(체육교육과)는 주간조선에 “서울대인에 대한 인식 조사 결과 부정적 인식이 생각보다 강했다. 이기적이고 나약하다, 우수한 역량을 사회보다 자신의 출세를 위한 입신양명에 쓴다는 인식이 많았다. 서울대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 타파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했다”라고 프로젝트의 의도를 밝혔다. 이번 프로젝트의 목적은 두 가지다. 하나는 서울대인에 대한 일반인들의 부정적 인식을 바로잡고, 또 하나는 서울대인 스스로 서울대가 추구하는 방향을 다잡는 것. 이준웅 교수(언론정보학과)는 이번 기획에 대해 “다른 이들에게 우리를 진정성 있게 알리는 일인 동시에 스스로에 대해 더 충실하게 알기 위한 기획”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나라 최고의 인재들이 모인 서울대. 서울대의 지향점은 대한민국미래 인재의 지향점과 맥을 같이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번 프로젝트의 명칭은 ‘서울대다움 찾기’ ‘서울대 DNA 찾기’다. 제작된 스토리 영상은 서울대 웹사이트와 유튜브를 통해 볼 수 있다. 서울대 홍보팀 조문주씨는 “이 영상은 서울대홍보영상이라기보다 서울대의 진짜 모습을 알리기 위한 영상”이라며 “한 해 2~4명의 스토리 영상이 차곡차곡 쌓이면 서울대 DNA 지도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프로젝트를 총괄한 강준호 교수는 방향성에 대해 이렇게 정리했다.

“아직 이 사회에는 서울대에는 의대, 법대 출신이 많고, 고시를 지향하는 사람들로 꽉 차 있다고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 서울대에는 숨겨진 소영웅들이 많다. 겉으로 인정받지 않아도 각자의 자리에서 빛나는 사람들이 많다. 서울대는 자신을 위한 엑설런스(Excellence)가 아니라 사회를 위한 엑설런스를 지향한다. 그게 서울대를 만든 목적 아닌가. 서울대가 지향하는 핵심가치가 사람을 통해 구현되고 있다는 것을 진정성 있게 보여주고 싶었다.”

지난해 3월에 시작한 이 프로젝트의 스토리 영상은 지난 6월 말에 들어서야 최종 완성됐다. 꼬박 1년3개월이 걸렸다. 이 기획은 난관이 많았다. 인물 선정이 가장 어려웠다. ‘누가 서울대다움을 대표할 것인가’를 두고 갑론을박했다. 재주와 성향이 제각각인 서울대인 중에서 공통의 DNA를 뽑아낸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번 프로젝트에 투입된 공식 자문위원단은 총 6명. 서울대 홍보 총괄업무를 맡은 강준호 교수(체육교육과), 입학본부에서 10년 이상 재직해 서울대에 대한 대중적 인식을 민감하게 꿰뚫고 있는 김경범 교수(서어서문학과), 영상에 대한 창의적 아이디어가 반짝이는 김수정 교수(디자인학부), 대중 소통 분야에서 전문성을 구비한 이준웅 교수(언론정보학과), 서울대 출신으로 대기업 홍보팀에 근무하는 이현수 팀장(SK 하이닉스), 역시 서울대 출신으로 화제의 CF를 다수 제작한 조풍연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가 그들이다.

두 번째 ‘서울대다움’ 스토리 영상의 주인공으로 선정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photo 서울대 홍보영상
두 번째 ‘서울대다움’ 스토리 영상의 주인공으로 선정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photo 서울대 홍보영상

자문위원단은 아홉 차례의 공식자문회의를 포함해 20여차례의 자문회의를 거쳤다. 10여명의 ‘서울대다움’ 스토리 영상 후보군으로 압축됐다. 3000여명의 베트남 얼굴기형 어린이들을 무료로 수술해준 백롱민 교수(서울대병원), 사법연수원생들이 ‘가장 존경하는 법조인’으로 꼽은 고 조영래 변호사, 전 재산을 학교에 기부한 기부왕 정석규 전 태성고무화학 회장,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전기공학도로서 그래미상 클래식 부문 녹음기술상을 수상한 황병준씨, 우주인 고산씨, 건축의 본거지인 로마에서도 인정한 건축예술가 정태남씨, 지는 게임을 하면서도 늘 최선을 다하는 ‘열정의 꼴찌’ 서울대 야구부 등이 그들이다. 세계적 연구성과를 낸 김빛내리 교수, 임지순 교수, 현택환 교수도 거론됐고, 안철수 국회의원도 잠시 거론된 것으로 전해진다.

1차 ‘서울대다움’에 선정된 주인공은 바로 서울대 야구부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서울대 야구부를 통해서는 ‘야구는 혼자 하는 게 아니다’ ‘이기는 게 전부가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을 통해서는 ‘한 사람의 탁월함은 주변과 사회를 위해 사용할 때 빛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각각 6분29초, 4분7초짜리 영상은 일단 감동적이다. 기자는 서울대 야구부 스토리 영상을 보면서 눈물이 찔끔 났다. 배스킨라빈스31, 케토톱, 피자헛 등의 광고를 제작한 CF 감독이자 뮤직비디오 감독 조풍연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 멀티미디어 영상과)가 메가폰을 잡아 한 편의 뮤직비디오처럼 감각적이다.

서울대 야구부 영상은 서울대 야구부 이광환 감독(전 LG트윈스·한화이글스 감독)이 야구부원들에게 하는 말로 시작한다. “야구는 혼자 되는 게 아니야. 같이 잘해 줘야 해. ‘공을 잘 던져야겠다’는 건 상대편에 대한 배려야. 남들 오기 전에 일찍 나와서, 내가 외야수지만 내야 땅 갈아주는 것. 그런 플레이가 굉장히 많아. … 우리 서울대 학생들이 공부는 다 잘하지만 내가 볼 때 그런 게 부족하다고 생각해. 아껴 쓰고 절약하면서도 공용 물건을 내 물건처럼 생각해줘야 돼.”

1승1무265패. 창단 36년 서울대 야구부의 성적표다. 공부만 하던 공부벌레들의 야구 실력은 엉망이다. 서울대 야구부는 이기기 위해 야구를 하는 것이 아니다. 번번이 지면서도, 다음 경기 역시 질 가능성이 크다는 걸 알면서도 쉼 없이 연습하고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또 하나, 서울대 야구부의 유니폼에는 이름표가 없다. 선배들이 입던 유니폼을 물려입기 때문이다. 이광환 감독이 2010년 서울대 야구부 감독을 무보수로 맡으면서 주고 싶었던 메시지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래서 새 물건 대신 선배들이 쓰던 물건을 물려받게 했다. 서울대 야구부에는 실밥이 터진 야구공, 낡은 운동화, 부러진 배트, 너덜너덜한 유니폼투성이다. 그런데 서울대 야구부는 이런 부분을 오히려 자랑스러워한다.

발뺌을 하던 조풍연 감독이 덥석 영상 제작을 수락한 것도 이 지점이다. 조 감독은 처음에는 자문단 중 한 명으로 회의에 참여했다. 제작 의뢰를 받았지만 내내 고사했다. 그러다 서울대 야구부 이광환 감독과 야구부원들을 만나고 마음이 동했다. 조 감독의 말이다. “이광환 감독의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다. 감독님은 ‘나는 이 아이들에게 야구를 가르치는 게 아니다. 이 학교 아이들은 나라를 이끌어갈 가능성이 높다. 개개인의 인성은 괜찮지만 너무 공부만 해서 매너나 배려 등에서 부족한 게 보였다. 야구를 통해 협동과 배려, 헌신, 팀을 위한 희생을 가르치고 싶었다’고 말씀하셨다.” 조풍연 감독 역시 서울대 야구부 출신이다. 그 역시 서울대 야구부를 통해 야구 기술이 아니라 팀을 위한 배려와 헌신을 배웠다고 한다. 까마득한 야구부 후배들의 깍듯한 인사성과 승패에 관계 없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모습을 영상에 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는 재능기부 형태로 제작을 수락했다.

조풍연 감독이 촬영에 들인 공은 놀랍다. 6분29초짜리 서울대 야구부 영상 제작을 위해 40시간 넘는 시간을 촬영했다. 서울대 교내는 물론 청각장애인들인 충북 청심학교 야구단과의 친선경기, 남해스포츠파크에서 열린 추계대학야구대회를 일일이 따라다녔다. 식사도 함께하고 훈련도 함께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생들이 스태프로 참여해 6~7대의 카메라가 따라다녔다. 결과 서울대 야구부원의 표정 하나하나, 이광환 감독이 서울대 야구부원들에게 주는 핵심적 메시지를 담을 수 있었다. 조 감독은 이번 영상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인사 장면을 꼽았다. “서울대 야구부는 경기 종료 후 인사 코스가 있다. 상대팀에, 덕아웃에 가서, 본부석에, 응원팀을 향해 차례로 깍듯이 인사를 한다. 밝은 표정으로 ‘감사합니다’ 외친다. 늘 지고 늘 그렇게 인사한다. 뭉클했다.”

서울대 야구부 출신 조풍연 한예종 교수가 제작한 서울대 야구부 스토리 영상 중 한 장면. ⓒphoto 서울대 홍보영상
서울대 야구부 출신 조풍연 한예종 교수가 제작한 서울대 야구부 스토리 영상 중 한 장면. ⓒphoto 서울대 홍보영상

두 번째 ‘서울대다움’ 스토리 영상의 주인공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세계의 대통령’으로 통하는 유엔 사무총장이 되어 세계 평화에 헌신하는 반 총장의 삶은 누가 봐도 ‘서울대다움’의 현재이자 미래였다. 하지만 조풍연 감독은 “만들기 너무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질곡이 없었다는 이유다. 가난을 딛고 성공했지만 도덕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성공 스토리라서 신선한 감동을 주는 영상 제작이 쉽지 않았다는 것. 서울대 야구부는 연출과 별도의 촬영이 가능했지만, 반 총장의 경우 기존의 영상 자료를 활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난관이었다.

그러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반 총장이 당시 유엔 사무총장이던 다그 함마르셸드 유엔 사무총장에게 보낸 편지를 담은 동영상 자료를 발견했다. 또한 반기문 총장이 유엔총장이 된 후 연설하는 자리에서 자신이 당시에 쓴 편지를 언급하는 장면을 발견했다. 두 자료는 ‘신념’을 상징했다. 어릴 적부터 가슴에 품은 신념을 이뤄낸 불굴의 주인공. ‘서울대다움’의 표상이라고 할 만했다.

‘서울대다움’ 스토리 영상에 대한 반응은 엇갈린다. 열광하거나 발끈하거나. 서울대 지망생이나 서울대 재학생, 젊은 교수들은 대체로 열광한다. ‘대한늬우스’ 스타일을 탈피한 감각적 영상, ‘우리는 최고다’를 넘어 최고가 지향해야 할 가치를 담은 영상에 대한 공감대가 넓다. 그러나 50대 이상의 아버지 세대는 ‘저게 무슨 서울대다움이냐’고 지적한다. 조풍연 감독은 “살아온 시대적 가치의 차이 때문인 것 같다”고 말한다.

첫발을 뗀 ‘서울대다움’ 찾기 프로젝트는 갈 길이 멀다. 강준호 교수는 “반응을 보는 중”이라며 “지금은 유리하지 않다”고 말했다. “신입생들에게는 반응이 괜찮지만 나이 드신 분들께는 생소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번 스토리 영상이 가치를 가지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서울대 스스로 서울대에 대한 부정적 인식 타파에 나섰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서울대다움’의 표상으로 ‘야구 실력보다 인성’을 가르치는 서울대 야구부를 꼽았다는 것이다.

이광환 감독의 말대로 이 나라의 리더가 될 가능성이 높은 이들에게 ‘승리보다는 최선을’ ‘나보다는 팀을’ ‘실력보다 인성을’ 핵심가치로 표방했다는 것은 큰 박수를 보낼 만하다. 서울대에 대한 편견은 언제쯤 깨질까. 조풍연 감독은 이런 말을 남겼다.

“외부에서 서울대를 바라보는 인식이 바뀌려면 아직 멀었다. 오랜 시간 동안 다양한 가치들이 합쳐져야 서울대다움이 나올 것 같다. 내가 사회에 나와서 보니 자신이 일궈온 퍼포먼스들이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될 수 없더라. 주변과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서울대다움이란 사회적 파장에 대한 책임감 아닐까. 낮은 자세가 중요하다. 서울대의 이번 기획이 단발성으로 그치지 않고 이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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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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