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오롱등산학교 이용대 명예교장 ⓒphoto 염동우 영상미디어 기자
코오롱등산학교 이용대 명예교장 ⓒphoto 염동우 영상미디어 기자

“나 고시 7번 낙방했어.” 산악인 이용대(78)씨의 입에서는 뜻밖의 말이 나왔다. “그게 계기가 됐어. 심하게 좌절했다고. 마음을 달래기 위해 도선암이라는 무당들이 살던 작은 암사를 자주 오르내렸지. 같이 공부하던 친구가 북한산 노적봉에 가자는 거야. 그때 처음 바위를 탔어. 죽을 고비 넘기고 아슬아슬하게 정상에 올라갔어. 정상에서 석양이 빨갛게 물들고 쫙 늘어진 한강을 보니까 가슴이 뻥 뚫리더라고.”

이용대 코오롱등산학교 명예교장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며 말을 이었다. “아내가 나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지. 내가 법학이 전공인데 인생 후반기에 산으로 전공을 바꿨으니까.”

이용대 명예교장을 만난 건 지난 6월 2일 서울 우이동에 있는 코오롱등산학교 교장실에서였다. 교장실은 이 교장을 만나러 온 사람들로 붐볐다.

이용대씨는 1997년부터 한국 산악인 양성의 요람인 코오롱등산학교 교장으로 일했다. 체신부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1985년 코오롱그룹이 등산학교를 설립할 때 도왔다. 이후 대표강사로 재직하며 북한산·설악산의 새 루트를 개척하고 알프스, 몽블랑, 히말라야 등반에 성공했다. 1997년, 코오롱그룹 직원들이 맡았던 등산학교 교장 자리를 산악인으로는 처음으로 맡았다. 그는 20년 가까이 재직하던 코오롱등산학교 교장직을 지난 6월 4일 열린 개교 30주년 기념식에서 후배에게 물려줬다. 윤재학 대표강사가 새 교장으로 취임했고 이용대씨는 명예교장으로 추대됐다.

이용대 명예교장은 한국 산악계에서 ‘공부하는 산악인’으로 유명하다. 그동안 출판한 산서(山書)만 7권이다. 그중 ‘알피니즘, 도전의 역사’는 현대 등산의 역사를 한글로 펴낸 최초의 산서로 평가받는다. 그는 각종 산악 전문지에 기고활동도 하고 있다.

공부하는 원로 산악인이 들려준 산 이야기는 재미있었다. 인류가 산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말, 유럽이 시초다. 이 교장의 말에 따르면 산은 대항해 시대가 끝날 무렵인 18세기까지도 유럽인에게 있어서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당시 유럽인은 산에 용이나 악마가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때문에 알프스 등반은 근대에 와서야 이뤄졌다. 르네상스 시대처럼 인간의 존엄성을 깨닫고 ‘산’이라는 불가침의 영역에 대한 도전이 등산의 출발이었다. 이를 ‘알피니즘’이라고 한다. 현대에 와서 등산은 생활스포츠의 개념이 짙어졌다. 친목이나 건강을 목적으로 한 산행도 많아졌다. 한국에서 주말에 산행을 하는 인구만 1000만명으로 추산된다. 최근 한국을 찾는 외국인 중에는 한국의 산을 필수 관광코스로 여기는 이도 늘고 있다고 한다.

“(한국 사람이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한국은 아름다운 산이 많아. 외국의 산을 가보면 아름답기보다는 무섭고 괴팍하게 생겼어. 한국의 산처럼 아름다운 곳이 없어. 외국인 등산객들도 와보면 좋다는 걸 알 수밖에 없을 거야.”

북한산 인수봉이 보이는 카페로 자리를 옮겨 이용대 명예교장과 산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등산에서 중요한 것은 Altitude(고도)가 아니라 Attitude(태도)야. 등산은 스포츠적 요소보다는 철학적 요소가 더 진하거든. 높이 올라갔다고 좋아할 것 없어. 어떻게 올라갔느냐가 중요해. 그게 바로 등산의 도전정신이지.”

국내에서 가장 권위 있는 등산학교장의 설명은 멈출 줄 모르고 이어졌다. “산이 좋다고 산을 배우고 싶다고 온 사람들이 많았어. 다들 어리고 어설펐지. 미영(故 고미영씨)이가 가장 기억에 남아. 근데 너무 아쉽게 갔어. 내가 정말 아꼈단 말이야. 처음에 학교 왔을 땐 미영이가 갓 대학을 졸업한 사회 초년생인가 그랬어. 처음엔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못했지. 살집도 퉁퉁하고. 그러다가 나중에 몇 년이 지나고 누가 나한테 와서 인사를 하는데 몸매가 탄탄해져서 누군지 못 알아보겠는 거야. 그게 미영이더라고.”

산악 사고로 고인이 된 고미영씨는 코오롱등산학교 암벽반 13기 졸업생이다. 그는 각종 국제암벽등반 경기에서 상위권에 들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또한 2007년 여성 산악인으로는 8000m급 산 3개 등정에 성공해 대한민국 여성 산악인의 대표로 꼽혔다. 하지만 2009년 7월 10일 히말라야 낭가파르바트산 등정에 성공하고 하산하던 중 ‘칼날 능선’에서 실족해 목숨을 잃었다.

이용대 명예교장은 코오롱등산학교를 이끌면서 숱한 제자를 양성해냈다. 그 숫자만 1만8000여명에 이른다. 그는 평소 제자들에게 “산서(山書)를 읽지 않는다면 그것은 반쪽 산행”이라고 가르쳤다. 이용대 교장을 흠모해 그의 밑에서 27년 동안 가르침을 받은 원종민(56) 코오롱등산학교 교무는 그를 “아버지 같은 분”이라고 말했다. “정말 흠모하는 분입니다. 산행을 하다 우연히 선생님과 마주치면 먼발치에서 바라만 봤죠. 말을 붙일 엄두도 못 냈으니까요.”

원 교무는 현재 코오롱등산학교 커리큘럼을 직접 짜고 모든 교육과정을 기획하는 교무 담당이다. 그는 이 교장에게 배운 등산 철학을 청산유수로 읊었다.“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어요. 산을 좋아하는 사람, 그리고 산 자체는 좋아하지만 산을 오르기 싫어하는 사람. 산을 미워하거나 혐오하는 사람은 없어요. 다만 오르는 게 힘들어서 싫은 거죠. 등산을 잘못 이해해서 그래요. 등산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다면 등산이 힘들게 느껴집니다. 우리는 올바르게 등산하는 법을 가르쳐요.”

원 교무는 2008년 알프스 마터호른(4478m)을, 2011년 캐나다 로터스플라워타워(2650m)를 등정하면서 자신의 자질과 성품을 풍부하게 만들었던 건 무엇을 이뤘다는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이란 걸 깨달았다고 했다. 이후 원 교무는 자신의 모습으로 오롯이 존재하기 위해 등산을 한다.

교학상장(敎學相長). 스승과 제자가 서로 가르치고 배우면서 서로 성장한다는 뜻이다.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요시하는 코오롱등산학교의 정신은 한 명의 낙오자도 만들지 않는다는 원칙에서 비롯됐다. 이와 관련, 원 교무로부터 7박8일의 코오롱 등반교육과정 중에 있었던 일화를 들을 수 있었다. 원종민 교무 수업에 고등학교 교사 A씨가 수강했다. A씨는 수업 내용을 따라가는 속도가 더뎠다. 평소에 웬만한 건 다 자신 있던 A씨는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자 좌절했다. 코오롱등산학교 강사진은 한 명의 낙오자도 만들지 않는다는 노력으로 A씨의 실력을 다른 등반 학생들과 같은 수준으로 만들었다. A씨는 집에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펑펑 울었다. 학교에서 자신의 수업을 듣는 학생 중 집중력 좋은 3분의 1만 가르치고 포기했던 나머지 학생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A씨는 7박8일의 등반 수업 이후 방과후에 성적이 안 좋은 학생들을 모아 간식을 사주기 시작했다. 나아가 수업을 따라가지 못한 제자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이 일화는 당시 코오롱 등반강사들 사이에서 꽤나 알려져 있다. 원 교무는 이 일화를 예로 들며 “한 사람의 태도를 바꿀 수 있는 게 진짜 교육”이라며 코오롱등산학교의 정신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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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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