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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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그룹은 지난 7월부터 야구단을 주인공으로 한 ‘나는 불꽃이다’ 광고를 시리즈로 내보내고 있다. 그중 선수 편은 주장 김태균의 내레이션으로 한 선수가 유니폼을 입는 모습으로 광고의 마지막 장면을 장식한다. 김태균은 “아픔을 이기고 반드시 그라운드에 돌아올 선수”라고 소개했다. 등번호 5번, 외야수 정현석(31)이었다.

김태균의 말대로 정현석은 그라운드에 돌아왔다. 지난 8월 5일 경기도 이천에서 2군 퓨처스 경기 중 1군의 부름을 받았다. 1군에 올라오자마자 문학경기장의 SK전에서 5회 대수비로 교체출장했고, 7회 첫 타석에 모습을 드러내자 구장 전광판에는 ‘정현석 선수의 건강한 복귀를 축하합니다’라는 메시지가 떴다. 관중은 그에게 뜨거운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정현석은 초구를 받아쳐 우전안타를 터뜨리며 344일 만의 1군 복귀전을 자축했다.

정현석의 복귀는 지난 겨울 위암 진단을 딛고 일어섰다는 점에서 한 편의 인간승리와 같다. 정현석은 지난해 12월 한화 구단에서 실시한 정기검진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위암 초기로 수술을 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은 것이다. 정현석은 평소 ‘뭉치’ ‘터미네이터’ 등의 별명처럼 타고난 강철 몸과 체력을 자랑했다. 특히 그해 11월 일본 오키나와에서 치른 김성근 감독의 지옥훈련을 완주하며 눈에 띄게 기량이 향상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 그가 갑자기 위암이라니, 믿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정현석의 위암이 세상이 알려진 건 FA 보상선수로 삼성행이 결정 난 뒤였다. 삼성은 한화의 20인 보호선수 명단에서 제외된 정현석을 지명했고, 이 과정에서 위암 수술이 밝혀져 재지명 논란이 벌어졌다. 결국 한화가 정현석을 보상금에 해당하는 5억5000만원에 재영입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정현석은 지난해 12월 12일 위의 3분의 2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은 뒤 통원치료와 함께 제주도와 강원도에서 요양하며 몸을 추슬렀다. 짜고 매운 자극적인 음식을 피하며 철저하게 식이요법을 했다. 그 와중에도 야구를 하고 싶은 의지가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왔다. 정현석 스스로는 수술 이후 6개월 이내 그라운드 복귀를 목표로 마음먹었다.

한화 구단 관계자는 “야구를 하고 싶어하는 의지가 워낙 강해 빨리 선수단 합류를 바랐다. 몸부터 제대로 챙기라고 해도 말릴 수 없었다”고 했다. 정현석은 4월부터 한화 2군·육성군이 있는 서산에서 몸 만들기에 들어갔다. 6월 중순부터 2군 경기에 출장했고 두 달이 지난 뒤 1군의 부름까지 받았다. 1군 복귀 후에도 그는 “예상보다 늦게 왔다”며 만족을 몰랐다. 그만큼 야구가 간절했다.

대전고 출신 정현석은 원래 투수였다. 이름도 개명 전에는 정형순이었다. 롯데가 2003년 신인지명 2차 4번 전체 25순위로 그를 뽑았다. 프로 입단을 포기한 뒤 경희대로 진학했으나 어깨부상에 시달리며 투수로서 생명이 끝났고, 2007년 고향팀 한화에 육성선수로 입단했다. 장종훈 타격코치와 함께 2군에서 타격의 기초부터 다졌다. 장종훈 코치는 “현석이와 2군에서 함께 고생한 기억이 있다. 힘든 훈련에도 매사 성실하고 긍정적이었다”라고 말했다.

2008년부터 1군에 모습을 드러낸 정현석은 2010년 왼손투수 전문 대타요원으로 존재감을 각인시킨 뒤 경찰청에 입대했다. 2군 무대를 휩쓸고 돌아온 2013년 주전으로 기대를 모았지만 성적이 미흡했다. 타율 2할8푼7리 102안타에 비해 27타점에 그친 결정력이 아쉬웠다. 2014년은 타율도 2할2푼5리로 곤두박질쳤다. 어느새 1군에서 밀려나 2군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정현석은 대타 요원 이상이 되기 어렵다”는 냉정한 평가가 나왔다.

이 시기 정현석은 두려움과 싸우고 있었다. 주자가 2루 이상 위치해 단타 하나면 득점으로 연결되는 득점권 찬스에서 타율이 지나치게 낮았다. 2013~2014년 2년간 정현석의 득점권 타율은 1할9푼7리로 2할도 되지 않았다. 주자가 없을 때에는 2할8푼9리로 수준급이었지만 주자가 득점권에 나가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위축됐다.

“내가 경기를 바꿀 만한 상황이 많았지만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찬스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어야 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아 힘들었다. 정신적으로 쫓겼고 자신감도 떨어졌다. 솔직히 자존심도 상했다. 찬스에 약하다는 것에 너무 신경 썼다.”

야구가 풀리지 않았던 그에게 김성근 감독 부임은 새로운 기회였다. 지난해 가을 일본 오키나와 마무리캠프에서 베테랑 포수 조인성과 훈련을 한 번도 빠짐없이 완주했다. 그런 상황에 뜻하지 않은 위암 진단과 함께 수술대에 올랐다. 다시 방망이를 잡았을 때 그는 마음가짐부터 달라졌다.

수술 이후 정현석은 외형으로도 변했다. 한때 근육질 몸매로 건강미를 자랑했지만, 수술 이후 체중이 7~8㎏이나 빠져 유니폼이 펄럭일 정도다. 몸매가 날씬해졌고, 턱 선도 선명하게 드러나며 얼굴이 더욱 잘생겨졌다. 그는 “체중이 빠지면 힘이 떨어진다고 하는데 수술 후 웨이트트레이닝과 보강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 예전보다는 체지방이 많이 빠진 느낌”이라고 변화를 설명했다.

날렵해진 몸처럼 마음도 가벼워졌다. 첫 번째 야구인생이 끝없는 도전과 두려움의 연속이었다면 수술 이후 맞이한 두 번째 야구 인생은 ‘후회 없이 즐기자’는 마음으로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주변 사람들이 ‘덤으로 산다고 생각하고 마음 편히 즐기면서 살아라’고 조언해 준다”며 “그동안 야구를 즐기지 못했다. 아팠을 때 그게 가장 후회됐다”고 말했다.

1군 복귀 후 정현석은 12경기에서 48타수 17안타 타율 3할4푼5리 5타점을 올리고 있다. 지난 8월 12일 수원 kt전에서는 개인 최다 4안타를 몰아치는 등 2안타 이상 멀티히트가 5경기나 된다. 5~6번 중심타선에서 해결사로 떠올랐다. 첫 번째 야구인생에 움츠러들었던 득점권에서도 타율 3할5푼7리로 강하다. 암을 극복하고 돌아온 인간승리만으로도 화제인데 이전보다 향상된 실력까지 더해져 더욱 주목받고 있다.

김성근 감독은 “정현석이 대단한 것은 작년 11월 캠프 마지막 5일을 남겨놓고 잡은 타격 폼을 그대로 갖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상체로만 쳤는데 이제는 하체를 이용할 줄 안다”며 “정현석이 암에 걸렸다고 했을 때 많이 아쉬웠다. 의사한테 야구를 해야 하니까 종양을 남기지 말라고, 재발하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했다더라. 살도 야구를 할 수 있게 적당히 빠져 있다. 말 없이 묵묵히 성실한 선수라서 이렇게 돌아올 것이라 믿었다”고 말했다.

정현석은 수술 전후로 김성근 감독의 격려에 큰 힘을 받았다고 한다. “감독님께서 ‘병에서 가장 빨리 낫는 방법은 야구장에 빨리 오겠다는 생각만 하면 된다. 그러면 병도 빨리 낫고 기운도 차릴 수 있다’고 격려해주셨다. 가끔씩 감독님께서 보내주신 문자메시지를 보면서 마음을 다잡았다”는 것이 정현석의 말이다. 김 감독은 1군에 돌아온 정현석을 보고 “잘해라”고 웃으며 짧게 말했지만 눈빛으로도 통했다.

정현석처럼 김성근 감독도 암투병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1998년 쌍방울 감독 시절 시즌 중에 남몰래 신장암 수술을 받았다. 이 사실은 10년 후 SK 감독 시절 뒤늦게 알려졌다. 김 감독은 정현석의 위암 진단 당시에도 “어떤 병이든 마음에 달려 있다. 마음만 똑바로 잡으면 병은 빨리 낫게 되어 있다. 본인 스스로 의욕을 갖고 있으니 그렇게 크게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다”고 장담했다.

다행히 수술 후 첫 재검이었던 지난 8월 3일 진단 결과, 별다른 이상이 없는 것으로 나와 더욱 야구에 전념할 수 있게 됐다.

정현석은 말한다. “사람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는 것 같다.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고 노력하면 얼마든지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인생 최대의 시련을 전화위복으로 삼은 정현석의 강한 의지가 한국 사회에 던져주는 메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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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학 OSEN 야구담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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