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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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야구계에서 가장 뜨거운 인물은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의 강정호(28)다. 강정호는 메이저리그 입단 첫해부터 팀의 중심으로 도약, 동양인 최초로 성공한 거포 유격수가 됐다. 지금까지 일본의 수많은 ‘천재’ 유격수들이 빅리그의 벽 앞에서 좌절한 것과 정반대다. 강정호는 피츠버그 공격의 핵이며 유격수와 3루수를 모두 소화하는 선수로 자리매김 중이다.

한국 야구팬이 강정호에게 열광하는 사이, 메이저리그의 시선은 다시 한 번 서울 목동구장을 향하고 있다.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이 강정호의 옛 팀동료 넥센 히어로즈의 박병호(29)를 바라보고 있다. 지난해 같은 장소에서 강정호를 지켜보던 이들이, 올해는 박병호를 분석한다. 넥센 구단 관계자에 따르면 이미 지난해보다 많은 메이저리그 스카우터가 목동구장을 방문했다. 벌써 미국 현지 언론에선 올겨울 박병호를 데려오기 위해선 강정호 이상의 몸값을 지불해야 한다는 예상도 나왔다. 또 한 명의 코리안 메이저리거가 탄생하려고 한다.

박병호는 KBO리그 최고의 홈런타자다. 2012시즌 홈런왕에 오른 것을 시작으로 지난해까지 3년 연속 홈런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올해도 박병호는 홈런 45개(8월 26일 기준)로 홈런 부문 리그 1위다. 박병호의 홈런 페이스가 시즌 끝까지 이어질 경우, 박병호는 이승엽(39·삼성 라이온즈)의 한 시즌 최다 홈런(56개)도 돌파할 수 있다. 대기록을 남기고 더 큰 무대로 향하는, 한 편의 새로운 신화가 만들어지려 한다.

박병호는 순탄치 않은 길을 걸어왔다. 2012시즌 자신의 잠재력을 폭발시키기까지 7년 동안 1할 타자에 머물렀다. 2005년 LG 트윈스 입단 후 2011년까지 ‘터지지 않는 유망주’였다. 이따금씩 1군 무대에서 강한 인상을 남겼으나, 금방 헛스윙을 반복하며 2군으로 내려갔다. 결국 LG는 2011년 7월 31일 박병호를 넥센으로 트레이드시켰다. 당장 성적이 급했던 LG는 박병호를 넥센으로 보내고, 팀에 힘이 될 수 있는 선수들을 얻었다. 이후 박병호는 넥센 유니폼을 입고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박병호 이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LG는 2009년 4월 19일 내야수 김상현(35·kt 위즈)을 KIA 타이거즈로 트레이드했다. 당시 김상현은 ‘2군 베리 본즈’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1군 무대와 2군 무대의 성적 차이가 컸다. 홈런타자로 대성할 재능을 지녔으나 1군 무대에선 그 재능이 발휘되지 않았다.

그런데 김상현은 KIA 유니폼을 입고 나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2009시즌 타율 3할1푼5리 홈런 36개 127타점을 기록하며 KIA의 우승을 이끌었고, MVP까지 차지했다. 김상현은 박병호보다 먼저 한국 야구 역사에 남을 ‘신데렐라 맨’이었다.

2015년 LG를 떠난 또 한 명의 타자가 오랫동안 묵혔던 잠재력을 터뜨리고 있다. 2003년 그 누구보다 큰 기대를 받고 LG 유니폼을 입었던 내야수 박경수(31·kt 위즈)가 12년 만에 ‘천재 타자’로 부활한 것이다. 박경수는 지난해 겨울 FA 자격을 얻고 kt로 이적, 올 시즌 타율 2할9푼4리 19홈런을 기록하고 있다. 박경수의 개인 통산 한 시즌 최다 홈런은 8개. 이미 자신의 최고 시즌을 만들었다.

이쯤이면 강한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대체 왜 LG를 떠나면 잘되는 걸까? 첫 번째 원인은 서울 잠실구장에 있다. LG의 홈 잠실구장은 중앙 펜스까지 125m, 좌우 파울라인까지 100m, 좌우 중간 펜스까지 거리가 120m인 초대형 구장이다. 메이저리그에도 좌우 중간 펜스까지 거리가 모두 120m인 구장은 없다. 중앙 펜스까지 거리가 125m 이상인 구장은 있으나, 좌중간이나 우중간 펜스까지 거리는 115m 이하로 확 줄어든다. 좌중간 펜스가 125m 이상이면, 우중간 펜스는 110m 정도다.

LG 트윈스 수퍼스타 박용택(36)은 “잠실구장은 한국 현실과 너무 맞지 않는다. 잠실구장에서 힘을 쓸 수 있는 선수는 우즈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박용택은 올 시즌에 앞서 장타력 향상을 꾀했으나, 잠실구장의 벽에 막혀 다시 이전의 스타일로 돌아가고 있다.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잠실구장에서 살아남으려면 홈런 욕심을 버려야만 한다”고 입을 모은다.

외국인 선수도 마찬가지다. KIA의 강타자 브렛 필(31)은 올 시즌 잠실구장에서 단 하나의 홈런도 치지 못했다. 박병호와 홈런 레이스를 벌이고 있는 NC 다이노스 에릭 테임즈(29)도 잠실구장에서 기록한 홈런은 단 하나다. 박용택이 언급한 타이론 우즈(46·전 두산 베어스)를 제외하면, 잠실구장을 홈으로 사용하면서 2년 연속 30홈런 이상을 기록한 타자는 전무하다.

LG 선수들은 두산전을 포함, 잠실구장에서 한 시즌 70경기 이상을 치른다. 박병호와 김상현 모두 미래의 4번타자란 기대를 받고 LG 유니폼을 입은 만큼, 홈런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다. 그러나 이들 모두 홈런을 의식하다가 제대로 된 타격 기술을 습득하지 못했다. 잠실구장 펜스 앞에서 타구가 잡히는 순간, 긴 슬럼프가 시작되곤 했다. 홈런타자가 나오기 힘든 환경에서 홈런타자가 되려고 했고, 잠실구장을 탈출하고서야 꽃을 피웠다.

두 번째 원인은 LG가 처했던 내부상황이다. 김상현, 박병호, 박경수 모두 LG의 길고 긴 암흑기와 함께했다. 셋 다 LG 유니폼을 입고 포스트시즌을 치른 경험이 없다. 2003시즌부터 2012시즌까지 포스트시즌은 남의 이야기였다. 10년 동안 성적부진에 대한 책임으로 많은 감독과 코치가 옷을 벗었다. 5명의 감독을 거쳤고, 1·2군 총합 40~50명의 코치가 오갔다. 새 감독, 새 코치가 올 때마다 유망주들은 새로운 지도를 받는다. 지도자 입장에선 재능 있는 선수들을 하루빨리 올려놓아야 한다. 자신의 방식대로 열정을 다한다. 그렇게 어린 선수들은 수차례 다른 옷들을 입었고, 성장은 지체됐다. 잠실구장을 받아들이고, 중장거리형 타자로 길을 잡은 코치가 있는가 하면, 홈런타자로 커야 한다고 주장한 코치도 있었다. 암흑기 10년 동안 LG는 성적은 물론 수많은 유망주까지 잃었다.

한편 LG 선수단은 팀을 떠나 맹활약하는 옛 동료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있다. 특히 박병호를 두고는 모두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2군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는 모 코치는 “병호는 처음부터 남달랐다”고 했다.

“2군 시절에 밤에도 홀로 택시를 타고 훈련장에서 개인연습을 하는 선수가 박병호였다. 모두가 언젠가는 병호가 잘될 것이라 믿었다. 병호가 우리 팀을 떠나 다른 팀을 갔기 때문에 잘됐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에 있었어도 병호는 잘됐을 것이다. 단지 우리는 병호가 올라서기까지 필요한 시간을 줄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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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세호 OSEN 야구담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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