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네소타 트윈스의 박병호(왼쪽)와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김현수. ⓒphoto 연합
미네소타 트윈스의 박병호(왼쪽)와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김현수. ⓒphoto 연합

‘심하게 어지럽다. 두통이 너무 심하다.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고 밥을 삼키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기분을 매일 느끼고 싶다.’

MLB 명예의전당에 헌액된 메이저리그의 명장(名將) 토니 라루사 감독의 자서전인 ‘8월의 3일 밤(3 nights in August)’을 보면 서문에 이런 표현이 있다.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다. 마치 항암 치료를 받는 이의 상태를 구술한 듯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상태를 매일 느끼고 싶은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이 말은 33년간 메이저리그 팀의 감독을 맡으며 무려 5093경기를 이끌었던 사령탑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토로이다. 매 경기마다 극심한 긴장감에 쓰러질 것 같은 고통이 수반되지만 이런 순간을 즐기는 묘한 엇갈린 심리적 이율배반을 표현한 것이다.

현대인들에게 하루하루는 긴장의 연속이고 외줄타기를 하는 듯한 압박감을 준다. 이와는 다르게 야구선수 역시 그들만의 압박감이 작용을 한다. 메이저리그의 경우 어느 프로 팀 스포츠보다 많은 한 시즌 162경기를 수만 명 관중 앞에서 펼쳐야 한다. 이런 경기를 수백만 명의 시청자들이 바라보며 자신의 플레이 하나하나를 마치 현미경 밑에 놓고 해부하듯 분석을 해댄다.

야구는 팀 스포츠지만 기본적인 대결은 투수와 타자의 개인 대결로부터 시작된다. 투수의 손을 떠난 공에 대해 타자가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에 따라 플레이가 진행된다. 한마디로 공 하나에 경기의 명암이 갈리는 경우가 빈번하다보니 이에 대한 집중력이 극대화될 수밖에 없다. 이런 집중력은 자칫 지나친 긴장감으로 연결되기 십상이다. 과연 나의 투구 하나, 타구 하나가 팀의 운명을 가르는 순간에 마운드 혹은 타석에 섰을 때 나는 얼마나 압박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1970년대 뉴욕 양키스의 거포로 인정받던 레지 잭슨을 보자. 늘 스포트라이트를 즐긴다고 공언했던 그는 실제로 구장을 찾은 관중이 3만명을 넘었을 때 타율이 3할이 넘었다. 반면 관중 수가 이에 미치지 못했을 때 성적은 2할5푼에도 미치지 못했다. 자신의 말처럼 본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강하면 강할수록 팽팽한 긴장감을 즐겼고, 성적으로 이를 입증했다.

국민 타자 이승엽은 어떤가!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 일본과의 동메달 결정전에서 일본 팀의 에이스 마쓰자카 다이스케를 상대로 8회 2타점 적시타를 기록하며 귀한 동메달을 따냈다. 2006년 1회 월드베이스볼 클래식에서는 숙적 일본을 상대로 8회 초 역전 투런 홈런을 기록하며 극적인 역전승을 이끌어냈다. 이런 모습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도 준결승 일본을 상대로 2 대 2 동점 상황을 깨뜨리는 홈런으로 다시 한 번 극적인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었다. 일반적인 선수들이 야구 일생에서 한 번 꿈꿔 볼 수 있는 여러 상황에서 이승엽은 늘 엄청난 압박감을 이겨내며 팀에 귀한 승리를 안겼고 ‘국민 타자’라는 호칭을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중요한 경기에서 숨겨진 힘을 발휘하는 선수가 있는 반면 평소 기량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고 긴장감에 몸이 얼어 붙는 선수가 훨씬 많다. 실제로 메이저리그에서 어느 신인 투수는 자신의 데뷔전에서 지나친 긴장감에 경기 전 구토를 하고 마운드에 올라갔다고 실토한 적도 있었다.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한 점 차 리드를 지키기 위해 마운드에 오르는 마무리투수의 다리가 후들거린다면 결과는 이미 나온 것이나 다름없다.

단순히 경기 자체의 상황만이 선수들을 압박하는 것이 아니다. 전체적인 상황 자체가 이들을 위축시키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2016시즌 메이저리그에 도전장을 던진 여러 선수 중 시범경기 초반이지만 볼티모어 오리올스 김현수가 이런 현상에 시달리고 있다. 국내 최고의 타자 중 한 명으로 인정받고 누구 못지않게 정교한 방망이를 자랑하던 그이지만 첫인상을 좋게 보여야 한다는 극심한 압박감에 흔들리며 3월 10일 현재 21타수 연속 무안타를 기록하며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미네소타 트윈스의 박병호와는 대조적이다. 본인 스스로가 심리적으로 위축되며 자신의 스윙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이다.

“야구는 90%가 멘탈에 달려 있다”

국내 리그에서 뛸 당시에도 슬럼프는 늘 있었다. 하지만 여유가 있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미 수년에 걸쳐 검증된 기록이 있기 때문에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긋하다는 것을 본인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을 믿고 시간이 약간 흐르면 아니나 다를까 실력 발휘를 하며 본 궤도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다르다. 상대적으로 주전 좌익수 경쟁 양상에서 선두주자로 주목받으며 스프링 트레이닝에 들어갔지만 국내와는 다르게 아직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그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한 발자국만 삐끗해도 벤치로 밀려날 수 있다는 생각이 엄청난 압박감으로 다가온다.

김현수는 국내 야구에서 타석당 평균 4개 이상의 공을 기다리며 자신이 원하는 공을 가려내는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시범경기 초반 타석당 그가 바라보는 투구 수는 2개에 채 미치지 못한다. 물론 국내에서도 시즌 초반 스트라이크존을 넓히며 타격감을 잡아나가는 부분이 있었지만 심리적으로 흔들리는 최근에는 자신에 대한 자책감이 커지고 있다. 과연 이런 심리적 요소가 얼마나 선수를 흔들 수 있을까.

지난해 타계한 메이저리그의 전설 요기 베라는 “야구는 90%가 멘탈에 달려있다”라는 표현을 썼다. 이 말은 야구에서 그만큼 정신적 요소가 자신의 기량 발휘에 엄청난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국내 스포츠심리학의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는 조수경 박사는 박태환, 손연재, 박인비와 같은 국내 유수의 스포츠 스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전문가이다. 종목이 다르고 선수들 각각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도움의 방식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조 박사는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공통 주제가 있다고 한다. 바로 ‘행복한 선수’가 되는 것이 그것이라 한다. 어쩌면 이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답을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고 했다.

그 질문은 바로 ‘나는 왜 운동을 하는가’라는 것이다. 돈, 명예, 명성 모두 중요하지만 지금 현재 하는 일에 집중을 해서 그 자체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야 현재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긴 안목의 성공을 향해 차분히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미래를 위해 현재에 집중하고, 여기서 얻어진 작은 만족감을 쌓아 나가며 궁극적으로 행복감을 찾는 것이 조수경 박사가 강조하는 일차적인 해답이다.

눈에 보이는 그때그때의 성적으로 판단되고 이에 따른 극심한 압박이 선수를 괴롭힌다. 하지만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란 간단한 명제가 김현수 선수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송재우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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