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잉글랜드와의 경기에 네덜란드 대표로 나선 크루이프. ⓒphoto Getty Images
1977년 잉글랜드와의 경기에 네덜란드 대표로 나선 크루이프. ⓒphoto Getty Images

“크루이프가 없으면 현대 축구는 없다.” 토털사커의 상징 요한 크루이프(Hendrik Johannes Cruijff·1947~2016)가 지난 3월 24일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지난해 10월 폐암선고를 받았지만 “폐암과의 대결에서 2 대 0으로 앞서고 있다”고 자신했을 만큼 회복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던 요한 크루이프. 하지만 결국 여생을 보내던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자택에서 생을 마감했다. 69살 생일을 꼭 한 달 남기고.

1960년대 세계 축구는 브라질의 영웅 펠레의 시대였다. 화려한 개인기와 화끈한 득점력은 펠레를 축구 황제로 만들었다. 그 펠레의 시대가 저문 1970년대 세계 축구의 새 황제는 유럽의 작은 나라 네덜란드에서 등장했다. 바로 플라잉 더치맨(Flying Dutchman) 요한 크루이프다. 그는 축구 혁명가였다.

180㎝의 키에 늘씬하고 긴 다리가 내뿜는 폭발적인 스피드와 드리블, 순간적으로 발바닥이나 발 안쪽 면을 이용해 공의 진행 방향과 드리블 방향을 180도 바꿔 수비수를 제쳐버리는 크루이프 턴(turn), 여기에 강력한 슈팅과 탁월한 골 결정력까지 크루이프는 펠레에 비견될 만큼 화려한 공격수로서의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그가 공격수로서 화려하고 뛰어난 기능만을 보여줬다면 그저 ‘네덜란드의 펠레’쯤으로 불렸을 것이다. 크루이프는 뛰어난 공격수 그 이상이었다.

그라운드 전체를 조망하는 광활한 시야와 뛰어난 패스 능력, 경기 속도를 조절하고 흐름을 바꿔버리는 클러치 능력, 심장이 두 개인 듯 90분을 쉼 없이 뛰는 폭넓은 활동량과 체력, 누구보다 뛰어난 전술 이해도, 여기에 관중과 상대 선수까지 깜짝 놀라게 했던 순간적인 전술 창조력에 축구팬이 열광했다.

역사상 가장 영리한 플레이어

이런 능력들은 크루이프를 세계 축구 역사상 가장 똑똑한 축구지능을 갖고 있는 선수로 만들어 줬다. 그리고 이것은 펠레나 마라도나 등 다른 위대한 축구 스타들과 크루이프를 완전히 차별화시켰다. KBS 축구해설가 한준희 위원은 “시대를 막론하고 전 세계 축구장에서 가장 영리한 선수를 꼽으라 하면 단연 요한 크루이프”라며 “현대 축구에서 사용되고 있는 전술과 플레이 개념이 요한 크루이프에서부터 시작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했다.

크루이프가 보여준 이 능력의 결정체가 바로 ‘토털사커’다. 토털사커는 공격에서 수비로 전환될 때 공격수가 상대 공격수를 1차적으로 압박해 수비 효율을 높이는 것이다. 반대로 공격 시에는 수비수 라인을 최대한 상대방 진영으로 끌어올려 공격 집중도와 강도를 높이는 것이다. 또 수비수와 공격수 간 활발한 포지션 체인지를 통해 공격과 수비 시 상대방보다 유리한 공간에서 수적 우위를 점하는 전술이다.

이 토털사커를 그라운드에서 완벽하게 구현하고 발전시킨 이가 바로 크루이프다. 사실 토털사커를 작전과 전술의 개념으로 구체화시킨 이는 크루이프의 스승이자 완벽한 파트너로 불리는 리누스 미헬스(Rinus Michels) 감독이다. 리누스 미헬스 감독을 만나며 크루이프가 비로소 세계 축구의 판을 바꾼 축구 혁명가로 등장한 것이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나 아약스에서 뛰는 것이 꿈이던 소년 크루이프. 열 살이던 1959년 아약스 유스팀에 입단해, 1964년 아약스 성인팀에 데뷔하며 리누스 미헬스 감독을 만났다. 이때부터 크루이프의 천재성과 스타성이 폭발했다.

1965~1966시즌 아약스의 주전으로 올라서며 23경기 25골을 터뜨려 팀을 우승시켰다. 1966~1967시즌에는 33골을 넣으며 다시 팀을 우승시켰고, 1967~1968시즌 역시 팀에 우승을 안겼다. 특히 1972년에는 네덜란드 리그와 KNVB컵 우승, 유러피언컵(현 UEFA챔피언스리그) 우승, 유럽과 남미 클럽챔피언이 맞붙는 인터컨티넨탈컵 우승, 유러피언컵과 컵위너스컵(현재 유로파리그) 우승팀이 맞붙는 UEFA수퍼컵 우승까지 아약스를 무려 5관왕으로 이끌었다. 펠레 이후, 세계 축구판이 요한 크루이프의 시대가 됐음을 인정받은 것이다. 크루이프의 시대를 열어준 것이 바로 압박과 공간 개념으로 짜인 토털 축구다. 리누스 미헬스가 설계해 주문한 토털사커를 크루이프가 지휘하며 팀은 물론 그 스스로 세계 최고가 됐다.

1973년 스승인 리누스 미헬스가 스페인 FC바르셀로나 감독으로 자리를 옮기자, 크루이프 역시 미련 없이 FC바르셀로나로 이적했다. 아약스는 FC바르셀로나로부터 200만달러의 이적료를 챙겼다. 당시로서는 사상 최고 이적료였다. 당시 크루이프 영입 경쟁에 먼저 뛰어들어, 가장 비싼 몸값을 제시했던 곳은 사실 스페인 최강 레알 마드리드였다. 하지만 크루이프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갈망하던 스페인 남부 카탈루냐의 FC바르셀로나를 택했다.

바르셀로나에서 크루이프와 미헬스 콤비는 토털사커를 완성했다. 이적 첫 시즌 크루이프는 1960년 이후 14년 만에 레알 마드리드를 밀어내고 FC바르셀로나를 프리메라리가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후 1978년까지 FC바르셀로나에 머물며 세계 최고의 축구선수로 불렸다. 1979년부터 1981년까지 미국 LA 아즈텍스와 워싱턴 디플로매츠에서 뛰었고, 1981년 네덜란드로 돌아와 레반테와 아약스를 거쳐, 1984년 페예노르트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1985년 고향팀 아약스의 감독이 됐고, 1988년부터 1996년까지 FC바르셀로나의 감독을 맡아 선수 시절 이상의 화려함을 보여줬다. 특히 FC바르셀로나 감독을 맡으며 미헬스의 토털사커를 넘어서는 요한 크루이프의 토털사커를 만들어냈다. 세계 축구계에서는 감독 크루이프의 토털사커를 ‘크루이피즘’이라 부른다. 1980년대 말 시작된 크루이프식 토털사커 크루이피즘은 현재 FC바르셀로나와 스페인 축구를 상징하는 ‘티카타카’의 원형(原形)이다. 조직적이고 강한 압박, 높은 점유율과 빠르고 강한 패스, 여기에 선수들의 파괴적 포지션과 90분 동안 쉼 없이 공간을 만들었다 없애기를 반복하는 공격적 축구다.

바르셀로나가 사랑한 더치맨

네덜란드인 크루이프는 선수로서는 물론 감독으로서도 카탈루냐와 바르셀로나인들의 영웅이 됐다. FC바르셀로나는 2000년대 이후 UEFA챔피언스리그 단골 우승팀이다. 하지만 크루이프가 감독을 맡기 전까지 UEFA챔피언스리그(당시 유러피언컵)에서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다. 이런 FC바르셀로나에 토털사커로 무장한 크루이프가 첫 유러피언컵 우승을 안겨줬다.

축구에 관한 한 모든 것을 가졌을 것 같은 크루이프지만 월드컵 우승은 맛보지 못했다. 1970년대 세계 축구판을 뒤흔들었지만, 월드컵 무대를 밟은 건 1974년 서독월드컵 한 번뿐이다. 1978년 아르헨티나월드컵에선 팀을 본선 무대로 이끌었지만, 정작 자신은 월드컵 본선에 나서지 않았다.

축구의 종가는 잉글랜드다. 하지만 이 축구를 현대 축구로 진화시킨 주인공 중 한 명이 바로 크루이프다. 화려한 공격수임에도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 모두를 조율하는 현대적 의미의 플레이 메이커 역할과 압박, 공간의 개념을 선보인 이가 바로 크루이프다. 한준희 해설위원은 크루이프를 “현대 축구의 모든 사조(思潮)에 영향을 미친 거의 유일한 인물”이라며 “현대 축구의 시스템은 물론 지금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축구에 철학을 덧씌우고 남긴 주인공”으로 평가했다. 요한 크루이프가 없었다면, 현재 세계 축구를 지배하고 있는 리오넬 메시(FC바르셀로나)도 펩 과르디올라(바이에른 뮌헨 감독)도 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조동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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