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빈 스컬리가 다저스타디움에서 방송을 하고 있다.
2008년 빈 스컬리가 다저스타디움에서 방송을 하고 있다.

20대 시절의 빈 스컬리.
20대 시절의 빈 스컬리.

지난 4월 11일 미국 LA 다저스의 홈구장 다저스타디움의 입구에서 세리머니가 열렸다. 이 세리머니의 주인공은 무려 67년간 다저스 중계를 전담한 빈 스컬리 캐스터였다. 1927년 11월 29일생이니 한국 나이로 90세의 노인이다.

이제 100세 시대가 열린 마당에 60대 노인은 동네 노인정에서 실제로 막내 취급을 당하고 어디서 노인 대접 받기도 어렵다고들 한다. 이렇게 고령의 노인은 일을 하고 싶어도 현실적으로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물며 전문직종에서 일하는 노인은 더더욱 찾기가 어렵다. 그런 면에서 아흔 살의 나이에도 현업에서 존경을 받으며 일하는 사람은 남의 나라 일로 느껴진다.

이날 행사는 빈 스컬리의 이름을 딴 다저스타디움의 공식 도로주소명 명명식이었다. 원래 이 주소는 ‘엘리시안 파크 애버뉴’였지만 이날을 기점으로 ‘1000 빈 스컬리 애버뉴’로 명칭이 바뀌게 된 것이다. 아마 살아 있는 이에게 부여할 수 있는 최고의 영예 중 하나가 아닐까.

LA 지역에 수많은 볼거리가 있지만 다저스타디움 역시 관광 책자에 소개될 정도로 도시의 상징 중의 하나이다. 1962년 개장한 구장으로 지어진 지 반백 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아름다운 구장으로 꼽히고 있다. 1958년 다저스가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LA로 프랜차이즈를 옮긴 이후 샌디 코팩스, 돈 드라이스데일, 페르난도 발렌수엘라, 오렐 허샤이저 등 수많은 스타들을 배출했지만 어느 누구도 가지지 못했던 영예를 중계 아나운서가 누리게 된 것이다.

브루클린 다저스 시절부터 경기 중계

빈 스컬리 캐스터는 다저스가 뉴욕에 있던 1950년 개막전을 시작으로 다저스와 인연을 맺게 된다. 23살의 나이에 명문팀 중계를 전담하는 메인 캐스터가 되었고, 이후 올해까지 한 해도 빼놓지 않고 무려 67년간 다저스의 목소리로 중계 방송을 해왔다. 이는 프로스포츠 역사상 단일 팀을 중계한 시간으론 최장 기록이다. 현재 다저스에 남아 있는 관계자 중에서 박찬호 선수가 뛰던 당시의 감독으로 유명한 타미 라소다 전 감독이 마이너리그 선수로 1949년에 다저스와 인연을 맺었으니 단 1년 차로 다저스와의 연을 두 번째로 오래 맺고 있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올 시즌 개막을 앞두고 이번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하겠다는 선언을 한 것이다.

여기서 잠깐 그의 목소리를 생각해 보자. 국내에 메이저리그 중계가 소개된 것은 박찬호가 뜨기 시작한 1997년부터이다. 제1호 코리안 메이저리거 박찬호를 시작으로 서재응, 최희섭 그리고 현재의 류현진에 이르기까지 물론 국내 중계팀의 목소리가 주를 이루지만 뒷배경에 깔리는 그의 목소리는 아마 국내 팬들에게는 ‘아하 이 목소리’라고 바로 인식이 될 것이다. 경기가 시작하기 직전 “It’s time for Dodger baseball(다저스 야구를 즐길 시간입니다)”이라는 멘트와 뒤이어진 ‘Hi everybody! and a very pleasant good day/evening to you(여러분 안녕하세요, 아주 즐거운 날입니다)’라는 그만의 멘트를 들을 수 있다.

고령의 나이로 인해 최근 수년간은 이동거리가 긴 원정 경기에는 동행을 하지 않아 그의 목소리로 다저스 중계를 듣지 못하는 경우가 생겼지만 실제로 지난 67년간 최소 70대 초중반의 나이까지의 팬들은 평생 그의 목소리로 다저스 중계를 즐겼다는 얘기가 된다.

그는 뉴욕 맨해튼에서 났다. 여덟 살 때 라디오로 미식축구 중계를 들으며 스포츠 캐스터에 대한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2년간 해군 복무를 마친 이후 뉴욕의 포드햄대학에서 이미 학생 스포츠 캐스터와 기자 생활을 병행하며 자신의 꿈을 좇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학교 야구팀의 중견수로도 활약했다.

25살 때 최연소 월드시리즈 중계한 기록도

대학 4학년 때 동부 지역의 스포츠 방송국 150군데에 이력서를 보내며 전문 직업인으로의 길을 모색하게 된다. 그를 원한 곳은 단 한 곳, 워싱턴 지역의 CBS 라디오 지사의 대학 스포츠 중계 캐스터로 긴 방송 커리어 시작을 알리게 된다. 당시 대학 풋볼을 보스턴에서 중계하기로 한 날 날씨가 아주 추웠다. 스컬리씨는 코트와 장갑을 호텔에 두고 중계석에 앉게 되었다. 중계석이 오픈되어 있어서 온몸으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중계를 해야 했다. 하지만 전혀 흔들림 없이 끝까지 꿋꿋하게 훌륭히 중계 방송을 마쳐 상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결국 바로 이듬해 꿈에 그리던 다저스 중계팀에 합류하며 다저스와의 67년간의 인연을 시작한 것이다.

67년간 그가 마이크 잡으며 숱한 명승부를 전해줬고 캐스터로서의 기록을 만들었다. 1953년 만 25세의 나이로 월드시리즈를 중계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최연소 월드시리즈 중계 캐스터 기록으로 아직까지 건재하다. 그의 목소리로 중계된 노히트 경기는 무려 20번에 달한다. 또한 1973년 당시로선 누구도 깨기 어렵다던 전설의 베이브 루스의 통산 홈런 기록을 행크 애런이 715호 홈런으로 갈아치울 때의 목소리도 스컬리 캐스터였다.

1958년 다저스가 프랜차이즈를 LA로 옮길 때 자연스럽게 팀과 함께 LA로 이주를 했다. 1964년 자신의 고향팀이었던 뉴욕 양키스로부터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지만 이를 거절하고 다저스에 남을 정도로 깊은 애정을 과시했다. 그의 중계는 남다르다. 일반적인 야구 중계는 경기의 플레이를 전해주는 캐스터와 해설자 한두 명이 함께하는 2인 혹은 3인 중계가 보편적이다. 하지만 스컬리 캐스터는 늘 단독으로 경기를 중계한다.

사실 주요 프로스포츠 종목은 시간제로 경기가 운영되지만 메이저리그 야구는 평균 3시간 전후의 경기 시간과 승패를 가릴 때까지 시간에 관계없이 진행되는 끝장 승부 스타일이라 혼자서 경기를 진행하는 것은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빈 스컬리만이 가능한 중계 형태일 것이다. 그만의 노하우와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중계 스타일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메이저리그 중계팀에서 유일하게 TV 중계를 혼자서 하는 인물인 것이다.

1982년 포드 프릭 어워드를 수상했고, 1995년에는 에미 어워드에서 평생공로상도 받았다. 그렇지만 그에게 최고의 영예는 야구선수 혹은 관계자로서 절대 경지에 오른 인물만 들어갈 수 있다는 메이저리그 명예의전당에 1991년 헌액된 일일 것이다. 그리고 올해를 마지막으로 길고도 화려했던 방송 인생의 막을 내리지만 자신의 영원한 사랑 다저스의 홈구장 스타디움의 주소를 자신의 이름으로 장식하는 큰 선물을 받게 된 것이다.

어느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을 우리는 대가(大家)라 부른다. 이런 명칭은 함부로 붙여서도 안 되고 쉽게 붙여지는 호칭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이런 점에서 빈 스컬리 캐스터는 진정한 대가라 할 수 있다. 그의 중계를 들으며 스포츠 캐스터의 꿈을 키워온 수많은 젊은이들의 롤모델인 빈 스컬리. 올해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들을 수 없지만 다저스타디움이 존재하는 한 그의 이름은 영원히 우리의 곁에 함께할 것이다.

송재우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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