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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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비(28)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부모님에게 듣다 “아, 정말요?”라고 되묻게 됐다. 초등학교 마치고 미국으로 골프유학 간 박인비가 영어로 말하는 게 서투르던 시절 우승 인터뷰할 걱정에 일부러 2등을 하곤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였다. 어머니는 “애가, 내성적인 편이이기도 하고 완벽주의 같은 게 있어요”라고 했다. 지금은 국내 골프선수, 범위를 넓혀 스포츠 선수를 통틀어서도 가장 조리 있게 말할 줄 아는 선수를 꼽으라면 박인비가 떠오른다. 이런저런 질문에 생각이 잘 정리돼 있고, 적절하게 표현한다. 이 어릴 때 일화는 이후 박인비가 US여자오픈 최연소 우승(2008)을 차지하고 4년간의 깊은 슬럼프를 거쳐 한 해 3개 메이저대회 연속 우승(2013)과 커리어그랜드슬램(2015), 명예의전당 입회(2016)로 이어지는 그의 골프 경력을 이해할 때도 중요한 단서 비슷한 것이 되곤 했다. 내성적이지만 완벽을 추구한다. 그래서 남들 눈에는 큰 실수처럼 보이지 않는데도 그걸 참지 못하고 수정을 가하다 되레 큰 부진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이 정한 기준에 조건이 맞아떨어지면 완벽에 가까운 능력을 발휘한다. 그동안 지켜본 박인비는 이런 성격이었다.

올해 초 허리 부상에 이어 지난 4월부터 왼손 엄지 부상에 시달리던 박인비가 지난 7월 11일 리우올림픽에 나가겠다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박인비는 “올림픽 출전은 오랜 꿈이자 목표였다”며 “최근 손가락 부상이 많이 호전돼 올림픽에 나가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가장 반긴 건 여자골프대표팀 감독 박세리였다. 박세리는 “박인비가 올림픽에 나선다는 소식을 들으니 마음이 든든하다”며 “성적도 중요하지만 박인비가 출전하는 것만으로도 대표팀원들에게 큰 힘이 될 것”이라고 했다. 올해 잦은 부상과 실전 경험 부족으로 박인비가 올림픽에서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란 우려도 작지 않다.

호주 출신 캐디 10년째, 멘털트레이너는 8년째

박인비가 공식대회에 모습을 드러낸 건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명예의전당 입성이 확정된 지난 6월 중순 위민스 PGA 챔피언십이 마지막이었다. 1라운드에서 1오버파(공동 20위)를 쳤던 박인비는 2라운드에서 왼손 통증이 도지자 8오버파로 무너지면서 중간 합계 9오버파로 컷 탈락했다. 당시 대회에 앞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박인비는 “내 컨디션이 좋지 않다면 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는 선수가 올림픽에 나가는 게 맞다”고 했었다. 출전 포기 선언으로 비쳤지만 나중에 보니 그 말은 정말로 ‘내 컨디션이 좋지 않다면’ 그러겠다는 것이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리우올림픽 개인전의 유력한 금메달 후보였던 박인비는 최근 세계랭킹에서도 10대 선수인 리디아 고(뉴질랜드), 브룩 헨더슨(캐나다)에 이어 3위로 떨어졌다. 렉시 톰프슨(미국), 에리야 쭈타누깐(태국) 등 만만치 않은 상대도 많다. 부상에서 회복해 올림픽에 나가더라도 메달을 장담할 수 없고 자칫 명예에 금이 갈 수도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박인비는 지난 6월 24일 귀국해 치료와 재활에 집중하면서 마지막까지 올림픽 준비를 하겠다는 자세를 보였다. 두 차례 우승했던 US여자오픈에도 되레 부상을 키울 수 있다며 출전하지 않았다. 그 대신 스윙코치인 남편 남기협씨와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갔다. 드라이빙 레인지에서 다양한 샷 훈련을 하고 병원에서 부상 부위를 체크해보는 일정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다.

미국에서 US여자오픈이 열리는 동안 박인비는 국내에서 실제 라운드를 돌며 마지막 자체 테스트를 했고 결국 리우올림픽행을 결심했다. 평소 성격으로 볼 때 박인비가 올림픽까지는 충분히 컨디션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판단이 서지 않았다면 지난 6월 공언했던 것처럼 컨디션이 더 좋은 선수에게 양보했을 것이다. 2년 전 결혼한 박인비가 지카바이러스를 걱정해서라도 결국 리우올림픽에 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있었다. 하지만 박인비는 “올림픽에 대한 꿈을 그런 이유로 접었던 적은 없다”고 말했다.

박인비는 뚝배기 된장 맛처럼 깊고 구수한 인간관계를 맺는다. 박인비는 올해 10번째로 출전한 대회인 위민스 PGA챔피언십 1라운드를 마치고 LPGA 투어 명예의전당 가입 조건을 모두 채웠다. 가족과 스승, 친지들이 모인 파티에서 “명예의전당 회원이 된 것 이상으로 골프를 통해 맺은 좋은 인연으로 행복을 찾게 된 것이 가장 감사한 일”이고 “혼자 힘으로는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것”이라며 머리를 숙였다.

캐디인 호주 출신 브래드 비처는 올해 10년째 호흡을 맞추고 있다. 강수연과 정일미의 가방을 멨던 비처는 2007년 LPGA 투어 신인이던 박인비의 백을 들기 시작했다. 비처는 “박인비는 마음이 깊고 변하지 않는 심성을 지녔다”며 “인비가 은퇴할 때까지 캐디를 맡고 싶다”고 한다. 멘털트레이너 조수경 박사는 자신감이 바닥까지 떨어졌던 2008년 11월 처음 만났다. 조 박사는 “처음엔 매일 국제전화를 했고, 8년째 매주 상담을 하는 선수는 박인비가 유일하다”고 했다. 매니저인 갤럭시아 SM의 이수정 국장과도 2008년 이후 지금까지 친자매처럼 지낸다. 스윙코치를 하며 박인비를 깊은 슬럼프에서 구출한 남편 남기협씨는 “인비는 사람을 한번 믿으면 거짓말을 해도 믿는다”며 “이런 믿음이 바탕이 돼 믿기 어려운 결과를 만들어 낸 것 같다”고 했다.

필드 위의 박인비에게는 ‘침묵의 암살자’라는 무시무시한 별명이 붙어 있다. 엉성해 보이면서도 고성능 유도탄처럼 정확한 샷 능력과 신기의 퍼팅 능력이 있다. 박인비가 3개 메이저 대회 연속 우승을 하던 당시 타이거 우즈의 스윙코치였던 션 폴리는 “박인비의 미소는 달라이 라마(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를 떠올리게 한다”며 “그녀는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 같다”는 찬사를 보냈다. 그녀의 미소에서 깨달음을 얻은 고승(高僧)의 이미지가 느껴진다는 것이다. 세계적 스포츠심리학자인 밥 로텔라 박사는 “그녀는 결정적 순간에도 별일 아닌 것처럼 해내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며 “박인비의 미소와 템포는 그녀가 지닌 균형감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리우에서 박인비는 어떤 모습일까. 무표정하게 한 홀 한 홀 점령해 가는 ‘침묵의 암살자’를 보고 싶다.

민학수 조선일보 스포츠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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