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스포츠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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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의 별’ ‘4번타자 왕종훈’ ‘터치’ ‘H2’ ‘메이저’ ‘다이아몬드 에이스’….

일본은 만화의 왕국이다. 특히 종교처럼 신성하게, 일상처럼 친근하게 생각하는 야구 소재 만화가 끊이질 않는다. 이들 만화 주인공들은 입을 쫙 벌리게 만들 정도의 천재성과 온갖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다 갖고 있다. 그래서 때론 현실 생활과는 다소 동떨어진, ‘만화는 만화일 뿐’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오타니 쇼헤이(大谷翔平·22), 적어도 이 선수가 나올 때까진 그랬다는 얘기다. 일본 퍼시픽리그 니혼햄 파이터스의 에이스이자 중심타자인 오타니는 타석에선 불방망이를 휘두르고, 마운드에선 160㎞대 직구와 140㎞대 포크볼을 던진다. 역할이 철저히 분업화된 현대야구에서 천연기념물에 가까운 투타 겸업, ‘이도류(二刀流)’의 주인공이다. 일본 야구 만화 캐릭터의 ‘합체’에 가까운 그에겐 ‘만화 같은’이 아니라 ‘만화를 찢고 나온’이란 표현이 더 어울린다.

오타니는 올해 퍼시픽리그에서 투수로 10승4패(평균자책점 1.86)·174탈삼진, 타자로 타율 0.322(323타수 104안타)·22홈런·61타점·65득점에 도루까지 7개를 성공했다. 일본 야구 역사에서 한 선수가 10승·150탈삼진·타율 3할·20홈런을 한 시즌에 달성한 것은 오타니가 처음이다. 공을 던지는 오른손 중지 물집 부상까지 당하는 바람에 출장 기회가 줄어 규정 이닝과 규정 타석을 못 채웠음에도 탈삼진은 리그 3위이며 홈런(8위)·득점(6위)·타점(13위)·도루(21위) 부문에서 모두 30위권 내에 이름을 올렸다. 퍼시픽리그에서 그의 평균자책점은 10승 이상 투수 중 유일하게 1점대이며, 장타율은 홈런 20개 이상을 때린 타자 중 가장 높다.

오타니는 지난 9월 28일 일본 사이타마현 도코로자와 세이부돔에서 열린 세이부 라이온스전에 선발투수로 등판해 9이닝 동안 안타와 볼넷을 1개만 내주는 무실점 완봉승을 거두며 니혼햄이 4년 만에 퍼시픽리그 우승을 확정 짓는 주역이 됐다. 니혼햄은 오타니가 투타에서 본격적으로 활약하면서 상승세를 타 극적인 역전우승 드라마를 썼다. 구리야마 히데키 니혼햄 감독은 “오타니의 투타 동시 기용이 역전 우승의 키 포인트”라고 했다. 개인 타이틀이 한 개도 없지만 오타니의 리그 MVP 얘기가 벌써 나오고 있을 정도이다.

오타니 주연의 ‘야구 이도류’ 1편은 초등학교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이와테현 오슈시(전 미즈사와시)에서 사회인 야구선수 출신 아버지와 배드민턴 선수 출신 어머니의 스포츠 유전자를 갖고 1994년 태어났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리틀리그에서 야구를 시작했고, 5학년 때 시속 110㎞의 빠른 볼로 일찌감치 주목받았다. 세 살 위 선배 투수인 기구치 유세이를 동경해 그의 모교인 하나마키히가시고등학교에 진학한 그는 1학년 때 최고 147㎞, 2학년 때 151㎞에 이어 3학년 때 아마추어 사상 최초로 160㎞에 이르는 공을 던졌다. 메이저리그 성인 무대에서도 160㎞ 공을 던지는 선수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다. 오타니는 타자로서도 고교 시절 56개의 홈런을 때리며 거포의 자질을 과시하면서 ‘괴물’로 떠올랐다.

오타니는 고교 졸업 후 메이저리그 직행을 공언했다. LA다저스, 보스턴 레드삭스 등 메이저리그 구단들도 일찌감치 영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니혼햄이 신인 드래프트에서 오타니를 단독 1순위로 지명한 뒤 그의 마음을 돌리는 데 성공했다. 니혼햄은 구리야마 감독까지 나서 30쪽에 달하는 협상자료와 다르빗슈가 니혼햄 시절 달았던 등번호 11번, 그리고 ‘이도류 육성 플랜’까지 내밀면서 오타니를 감동시켰다.

오타니는 2013년 프로 첫해엔 다소 부진하면서도 데뷔 2경기 연속 홈런을 때리며 가능성을 보였다. 그는 투수로선 11차례 선발등판해 패배 없이 3승을 챙겼다. 평균자책점은 4.23으로 평범했다. 2014년부터 괄목성장했다. 그해 11승4패(평균자책점 2.61)에 타율 0.274, 10홈런으로 일본 프로야구 사상 첫 동일 시즌 ‘10승 10홈런’을 달성했다. 미국에서도 한 선수가 시즌 두 자릿수 홈런·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한 것은 공식기록상 베이브 루스(1918년 13승·11홈런)가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투수 쪽에 주력한 2015년에는 15승5패(평균자책점 2.24)를 기록한 대신 타격에서 0.202, 5홈런에 그쳤다. 그는 연말 치른 국가대항전 ‘프리미어12’에선 한국을 상대로 두 차례 등판해 13이닝 동안 3피안타 무실점으로 완벽 투구를 뽐내며 국내 팬들에게 존재를 각인시켰다.

구속 163㎞로 일본 신기록

오타니는 올해 더욱 만개한 실력을 뽐냈다. 지난해 투수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은 그는 올해 아예 개막전에서 “20홈런을 때리겠다”며 공언했고, 그 목표를 이뤘다. 5월에는 5경기 연속 홈런을 때렸고, 7월에는 1번타자 겸 투수로 출전해 1회 초구 홈런을 때리고 8이닝 무실점 승리를 따내는 원맨쇼를 펼쳤다. 올스타전에선 투수로 뽑혔으나 손가락 부상 때문에 야수로 출전해 2차전에서 자신의 올스타전 첫 홈런을 터뜨리며 MVP에 선정됐고, 올스타 홈런더비까지 우승했다. 6월에 160㎞를 찍은 그의 구속은 점점 빨라져 9월 13일엔 일본 야구 최고 신기록인 163㎞를 찍었다.

오타니가 지닌 또 하나의 강점은 성실함에 있다. 그는 고교 1학년 때 일본 전체 8구단의 드래프트 1순위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이를 위해 스피드(시속 160㎞), 제구, 몸 만들기, 변화구 등 야구 기술적 요소와 함께 멘탈(승리에 대한 집념, 동료를 배려하는 마음 등), 인간성(감사, 예의, 감성, 사랑받는 사람, 신뢰받는 사람), 운(인사하기, 쓰레기 줍기, 심판을 대하는 태도, 책 읽기, 물건을 소중하게 쓰자) 등의 항목을 세워놓고 몸소 실천하고 있다. 또 올해 2억엔(약 21억원)을 받는 고액 선수임에도 여전히 부모로부터 용돈을 받는 검소함에 잘생긴 용모와 건장한 체격(193㎝ 100㎏)까지 갖춘 오타니의 최종 꿈은 메이저리그 진출이다.

일본 야구에서 FA로 해외에 진출하려면 9시즌을 뛰어야 한다. 하지만 25세에 메이저리그에 도전하겠다는 생각을 밝힌 그는 포스팅(비공개 경쟁입찰)을 통해 2~3년 내 메이저리그의 문을 노크할 가능성이 높다.

그가 미국에서도 ‘이도류’를 펼쳐야 할 것인지에 대해선 찬반 양론이 나뉜다. 나가시마 시게오, 장훈 등 일본 야구 전설들과 다르빗슈(텍사스 레인저스)는 투수, 스즈키 이치로(시애틀)는 타자를 권했다. 출장 경기수가 많고 강철 같은 체력이 요구되는 미국에서 투타를 동시에 하면 오히려 둘 다 망칠 수 있다는 우려가 바탕에 깔려 있다. 물론 노무라 가쓰야 전 한신 감독 같은 사람은 “어느 누구도 하지 않았던 걸 하는 것 자체가 매력”이라며 찬성 의사를 밝히기도 한다.

팬들은 그가 투수가 타석에 서는 내셔널리그 소속 팀에 입단해 투타의 꿈을 동시에 이루길 원하는 분위기다. ‘만화 캐릭터보다 더 만화 같은’ 야구 삶을 펼치고 있는 오타니가 각본을 쓰고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도류’에서 그의 최종 목표는 메이저리그의 전설 베이브 루스(총 714홈런·94승)를 뛰어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강호철 조선일보 스포츠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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